‘중국 헤이룽장성, 발해’…한국 지운 日 도쿄대 발해史 [일본 속 우리문화재]

강구열 2024. 2. 10.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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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중국 동북지방을 중심으로 동아시아 동북부에 퍼져 있던 나라다. 자국 역사서를 남기지 않아 그 역사에는 불분명한 점이 많고 20세기 초 이후 하라다 요시토를 시작으로 본교 연구자들이 고고학적 조사를 실시해 왔다. 도성의 구조나 기와 등 물질문화는 헤이조쿄(平城京), 헤이안쿄(平安京)와 같고, 당나라 장안성과 비슷한 점이 지적되고 있다.”

발해를 설명한 도쿄대박물관의 전시 패널
일본 도쿄대학종합연구박물관(도쿄대박물관)의 전시품 설명 중 일부다. 위치 설명만 보면 중국 왕조를 소개한 것 같다. 관련 유적, 유물을 두고는 일본의 수도였던 교토, 나라를 언급해 일본 고대국가인가도 싶다. 사실 발해에 대한 설명이다. 세 문장에 불과한 짧은 글이지만 한국에 대한 언급은 없다.  

언짢기 짝이 없는 이 캡션은 일제강점기 식민사학의 성립, 한반도 통치를 위한 기초조사를 주도했던 일본 최고의 이 대학이 한국과 얽힌 좋지 않은 인연을 떠올리게 한다. 

도쿄대박물관
◆중국 왕조 연상시키는 발해 유물 설명

일본 고고학의 선구임을 자부하는 도쿄대박물관은 전시를 통해 세계 각지에서 실시했던 발굴조사를 자랑한다. 발해 조사는 동북아시아 발굴조사의 한 성과로 꼽는다. 주목되는 것은 발해사를 한국사로 여기지 않는 듯한 태도다. 

도쿄대박물관에 전시된 불상 등 발해유물
도쿄대박물관에 전시된 발해 기와
기와, 불상, 금속장식물 등 전시된 7점(지난달 26일 기준)의 발해 유물 캡션에도 한국이 없다. 유물의 이름, 형태, 의미를 담은 캡션은 ‘중국 헤이룽장성, 발해’로 시작해 발해사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중국 왕조로 연상하기 딱 좋다. 전시회 캡션은 대개가 짧은 몇 개의 문장으로 구성되지만 해당 기관이 그 유물에 대해 가진 가장 기본적인 인식을 담기 마련이다. 또 관람객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기초 지식이다. 따라서 이런 캡션은 도쿄대박물관이 발해사가 한국사의 일부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는, 혹은 무시해도 좋은 것으로 여기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떠올리게 한다.   발해에 대한 조사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한 홈페이지 자료도 마찬가지다. ‘북동 아시아, 발해 조사’라는 제목의 문서다. 발해 건국에 대해 “속말말갈(粟末靺鞨)이나 668년 멸망한 고구려의 후예들이 관련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거나 발해 도성의 양상에 대해 “고구려 문화와의 연속성” 등을 언급하고는 있다. 

하지만 “1990년대 말 이후 주로 중국과 한국 사이에 고구려, 발해의 역사인식을 두고 논쟁이 일어나”라고 하며 발해사를 한국사로 단정하지 않는다. “(박물관이 소장했던 발해 유물인) 석불이나 삼채(三彩) 도자기 등의 정품(精品)을 포함한 일부가 중화민국(대만)정부와 중화인민공화국(중국)정부에 반환됐다”는 점을 당연한 일인양 소개한 것도 눈에 띈다.  

도쿄대박물관 소장 발해 석제용두 도쿄대박물관 홈페이지 캡처
도쿄도 매장문화센터 주임조사연구원을 지낸 이가라시 아키라씨가 쓴 책 ‘문화재 반환문제를 생각하다’에는 도쿄대박물관 소장 발해 유물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어 눈길을 끈다. 2010년 서울을 방문했을 때 국립중앙박물관 발해실에서 석제용두(石製龍頭) 복제품을 봤다는 사실을 전한 그는 “이 석제용두는 1933년, 1934년 두 해에 걸친 동아고고학회의 고대 발해국 도성지 ‘상경용천부’ 조사에서 출토된 것”이라며 진품은 도쿄대박물관에 있다고 소개했다. 당시 단체 관람 중인 초등학생들이 발해실에 있었다고 하는데 “그들(초등학생들)이 이 전시품을 보며 어떤 감상을 갖게 되었을까. 그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졌다”고 적었다.   

◆“조선 유물이 셀 수 없이 많다”  

생각해보면 도쿄대는 우리 문화재와 관련해 여러가지로 좋지 않은 기억들로 얽혀 있다.

1925년 11월 25일 경성일보는 평양시 왕우묘 유물이 발굴조사를 실시한 도쿄제대(2차 대전 종전 후 도쿄대로 개칭)로 반출된 것과 관련해 이 대학 구로이타 가쓰미의 설명을 담은 기사를 실었다. 

“연구가 끝나면 현재와 같이 도쿄대학이나 경성, 그 외 민간에 분산되어 있는 것은 좋지 않기 때문에 평양에 박물관만 생긴다면 언제라도 돌려보낼 생각이다.”

출토품은 현지에 두는 게 원칙이었는데 왕우묘 유물은 도쿄제대로 옮겨졌다. 조선총독부 산하 고적조사위원회에서도 문제가 되자 되돌려 놓겠다고 했다. 하지만 돌아오지 않았다.  

일제의 한반도 침탈이 본격화된 된 이래 일본인 학자들은 한반도 전역에서 고적조사, 유적 발굴을 일삼았다. 학술적 목적이라고 떠들긴 했으나 한반도 통치를 위한 기초조사,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역사왜곡의 성격이 강했다. 조사과정에서 확보한 유물을 일본으로 빼돌리는 데도 거침이 없었다. 그 수량이 얼마나 많았는지 1912년 발행된 ‘고고학잡지’의 도쿄제대 건축학과 전람회 소개글에는 “제3구역 조선의 부(部)는 복도 및 제3실에서 전시 중인데 세키노 조교수 일행이 조선에서 세차례 가지고 온 것으로 재료가 풍부하여 일일이 셀 수 없다”는 내용이 있다. 세키노 조교수는 세키노 타다시(關野貞) 도쿄제대 교수를 말한다. 그가 1902년 실시한 한국 고건축 조사는 일본인에 의한 한반도 고적조사의 시작이다. 이 전람회에는 마한과 낙랑, 대방,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조선 등과 관련된 각종 자료, 유물이 전시되었다고 한다. 한국사 전체를 관통하는 유물을 갖추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조선왕조실록 오대산사고본. 문화재청
도쿄대와 얽힌 가장 험한 기억은 조선왕조실록 오대산사고본의 수난이다. 조선이 실록, 의궤 등 각종 기록물을 보관하기 위해 운용한 외사고(外史庫) 4곳(정족산, 적상산, 태백산, 오대산) 중 하나인 오대산사고본 실록이 1913년 3월 일본으로 무단 유출된 게 시작이었다. 오대산사고 수호사찰인 월정사 사적에는 당시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총독부 관원 및 평창군 서무주임 히구치 그리고 공용원, 조병선 등이 월정사에 머무르며 사고와 선원보각에 있던 사책(史冊) 150짐을 강릉군 주문진으로 운반하여 일본 도쿄대학으로 직행시켰다. 간평리의 다섯 동민이 동원되었는데 3일에 시작하여 11일에 역사를 끝냈다.”

도쿄제대에 있던 실록은 1923년 간토대지진 때 발생한 화재로 대부분 불탔다. 당시 대출 중이던 74권이 겨우 화를 면했는데 이 중 27권은 1932년 경성제대로 옮겨졌다. 하지만 47권(성종실록 9권, 중종실록 30권, 선조실록 8권)은 도쿄제대에 남았다. 

2000년대 초반 환수의 단초가 마련됐다. 도쿄대에 실록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한 환수운동이 전개됐다. 불법유출이 명백하다는 점을 근거로 소송까지 불사하겠다는 압박에 도쿄대는 2006년 서울대에 ‘기증’을 결정했다.

9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 어렵사리 이뤄진 귀향은 반갑지만 아쉬운 대목이 있다. 실록이 도쿄대의 선의를 전제로 한 ‘기증’ 형식으로 되돌아 온 점이다. 불법유출이 명백한 만큼 ‘반환’ 형식이 타당했다. 환수운동을 이끌었던 조선왕조실록환수위원회는 ‘반환’을 주장했다. 하지만 이런 요구를 받아들일 경우 불법 반출을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도쿄대는 ‘기증’을 고집했다. 일본 지성의 대표임을 자부하는 도쿄대가 문화재 약탈의 거점임을 인정하기는 싫었을 것이다. 우리는 일단 되돌려 놓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한 게 아닌가 싶다.  

오롯한 문화재 환수가 이렇게 어렵다.    

도쿄=강구열 특파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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