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만명 ‘손에 손잡고’ 천지개벽 일군 이 동네…전 세계가 감동하다 [사-연]

한주형 기자(moment@mk.co.kr) 2024. 2. 10. 13:42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잠실지구의 개발에 대해 이야기해 보았습니다. 이번 화에서는 ‘올림픽 도시’라 불러도 과언이 아닌 잠실에 종합운동장과 올림픽공원, 선수촌이 들어서기까지 과정을 살펴보며 ‘88올림픽과 서울 도시구조의 변화’편을 마무리하겠습니다.

백자의 곡선을 표현한 올림픽 주경기장
종합경기장의 건설의 밑그림이 그려진 것은 1970년입니다. 잠실지구의 매립공사와 동시에 새로운 땅을 어떻게 채워나갈 것인지 개발안이 세워지기 시작합니다. 이 때 잠실지구 종합개발계획의 일부로서 ‘공설경기장 시설계획’이 처음으로 수립되었고, 이후 1975년 ‘잠실종합운동장 신축공사 기본계획’이 세워지며 점차 구체화됩니다.
1983년 6월 서울종합운동장 주경기장 지붕이 상량되고 있다. 지붕 철골 공사는 설치 면적 2만 3000여m²에 80개의 H빔이 사용되는데, 철골 1개 무게는 43t, 길이는 18~36m에 달했다. [서울역사아카이브]
아시안게임 개최 실패의 쓰라린 경험과 이로 인해 경기장 건설 여론이 촉발되었음을 지난 화에서 알아보았습니다. 대형 경기장 신설이 필요했던 이유는 납득이 가지만, 왜 경기장이 들어설 곳으로 잠실이 선정되었을까요. 당시 서울시 내의 운동장이라면 서울운동장(동대문운동장)과 효창운동장이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이 두 곳 모두 국제경기를 열만큼 규모가 크지 않았고, 주변으로의 확장도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앞서 말한 ‘공설경기장 시설계획’에는 잠실지구에 종합운동장이 입지할 타당성에 대해 밝힌 부분이 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잠실이 도시종합계획이 시행되는 신시가지인 만큼 많은 면적의 확보와 계획이 용이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영동지구와의 상호 발전이 가능하고, 시내에 산재한 보조경기장과의 연결이 비교적 쉬운 점, 수상경기장의 설치가 가능한 점을 들었습니다.
전두환 대통령이 1983년 10월 잠실 종합운동장 건설현장을 시찰하고 있다. [정부기록사진집]
1977년, 잠실지구 54만 5000㎡의 부지에 2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종합운동장 단지의 착공이 시작되었습니다. 초기 설계는 김수근 건축가가 이끄는 공간연구소가 맡았습니다. 처음으로 종합운동장이 계획될 당시 서울시가 구성했던 시설물은 주경기장과 실내체육관 2개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종목별 단체들의 민원에 따라 수영장과 야구장, 실내체육관이 추가되며 계획은 수정의 수정을 거치게 됩니다. 그러던 중 1981년 대한민국이 88년도 올림픽대회 개최지로 선정되었고, 다양한 종목 경기를 열 수 있는 경기장의 완공이 시급해졌습니다.

초기 잠실종합운동장은 서울운동장과 구분하기 위해 ‘남서울대운동장’으로 불렸습니다. 남서울대운동장과 잠실대운동장이라는 두 이름이 혼용되다가 1978년 11월 국제대회 유치를 대비하여 ‘서울종합운동장’이라는 명칭으로 정식 개칭되었습니다.

1979년 4월 개장을 앞둔 서울종합운동장 실내체육관 내부 모습(왼쪽). 실내체육관은 1976년 12월에 착공해 1979년 4월 준공되었다. 수용인원은 2만 명으로 본 경기장과 2개의 보조경기장을 갖추었고, 본 경기장에서는 농구, 배구, 탁구, 권투, 유도, 체조, 레슬링 등 12개 종목의 경기를 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오른쪽은 1980년 12월 개장한 서울종합운동장 실내수영장. 수영장의 외형은 거북선을 본떠 긴 팔각형 모양이며, 지붕은 자연채광이 가능하도록 지어졌다. 우리나라 최초로 국제 공인 규격을 갖춰 수구, 다이빙, 싱크로나이즈 등 모든 국제경기가 가능하였다. [서울역사아카이브]
1988년 올림픽대회 개막을 앞둔 잠실종합운동장 일대의 전경. [매경DB]
1979년 실내체육관을 시작으로 실내수영장, 야구장, 마지막으로 1984년 주경기장이 완공되었습니다. 주경기장은 공사기간이 7년이나 걸린 대공사였습니다. 철근 2만 4000t, 철골 5700 t, 시멘트 16만 포대가 투입됐고 동원된 총인원만 80만 명에 달했습니다. 종합운동장 총 건설비 1000억 원 중 절반이 넘는 금액이 주경기장의 건설에 사용되었습니다. 주경기장은 서구권의 대형 스타디움을 참고해 지어졌지만, 그 사이사이 우리 건축의 개성을 담아냈습니다. 80여 개 콘크리트 기둥이 사방으로 떠받치는 지붕의 곡선은 조선 백자 항아리 외형을 본떠 만들어졌습니다. 좌석은 7만 5000석으로 2만석이던 서울운동장의 3배가 넘는 세계 정상급 규모의 경기장이었습니다.
1988년 9월 잠실 주경기장에서 열린 서울올림픽 개막식에서 성화대에 성화가 점화되고 있다. [정부기록사진집]
한편 주경기장을 건설할 당시 설계자였던 김수근은 ‘훗날 이곳에서 올림픽이 열릴 줄 누가 알겠냐’며 성화대의 제작을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는 당시 말도 안 되는 이야기처럼 여겨졌고, 비용 측면에서 여러 전문가들의 반대로 무산되었습니다. 몇 년 뒤 서울올림픽 개최가 확정되자 부랴부랴 성화대 현상공모가 시작되었으나 당선작이 없어 결국 김수근이 본래 계획했던 안으로 성화대가 제작됩니다.
서울 삼성동에서 바라본 잠실종합운동장과 잠실 일대의 모습. [한주형기자]
한성백제의 토성이 올림픽공원으로 탈바꿈하기까지
광주의 남한산에서 북쪽으로 뻗어 내려온 낮은 구릉지에는 자연지형을 활용해 흙을 쌓아 올린 성벽이 있었습니다. 토성 안에는 ‘몽촌’이라는 자연부락이 있어 이곳은 몽촌토성으로 명명되었습니다. 몽촌토성은 오래전부터 한성백제시대 지어진 토성이라고 전하여 왔을 뿐, 아무도 그 정확한 내용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1970년대 잠실 매립공사가 진행되는 중, 매립에 필요한 토사가 부족해지자 잠실개발공사는 몽촌토성 성벽을 헐고 흙을 파내 매립자재로 사용할 것을 요구합니다. 확인된 바는 없지만 막연하게 이곳이 백제의 위례성일지도 모른다는 학설이 떠돌던 때였습니다. 역사유적에 대한 보호를 이유로 서울시는 이 요구를 불허하였고, 덕분에 몽촌토성은 훼손 없이 보존될 수 있었습니다.

1984년 서울대학교 박물관의 참여 아래 몽촌토성 발굴이 진행되고 있다. [서울역사편찬원]
1981년 올림픽 유치 이후 몽촌토성 일대가 국립경기장 부지로 정해짐에 따라 토성의 성격을 파악하고 동시에 유적을 공원화하는 사업이 시작됩니다. 서울대학교 박물관에서 1983년부터 5년에 걸쳐 발굴조사를 실시하였고, 백제의 첫 도읍이었던 한성의 위치와 구조, 생활상에 대한 발견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때의 자료와 유물들을 토대로 토성의 복원과 정비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1986년 1월 올림픽공원 내 역도 경기장(현 우리금융아트홀), 펜싱 경기장(현 핸드볼 경기장), 체조 경기장(현 KSPO 돔)의 건설현장의 모습. [서울역사아카이브]
1986년 6월 아시안게임을 백일여 앞두고 올림픽공원 내의 사이클, 역도, 펜싱, 체조경기 등 4개 경기장 시설과 몽촌토성, 야외극장, 인공호수 등 부대시설 공사가 마무되었다. [매경DB]
올림픽공원은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대회 개최를 위해 43만여 평에 달했던 국립경기장 부지에 1984년 착공해 약 2년여 만인 1986년 완공되었습니다. 앞서 이야기한대로 공원 중심부에는 몽촌토성이 복원되었습니다. 한강의 지류인 성내천의 수로를 끌어다 공원 안으로 흐르게 하여 인공호수를 조성했습니다. 경기장 부지는 공원 전체 면적의 약 30%를 차지했습니다. 몽촌토성을 둘러싸는 모양으로 테니스장, 펜싱경기장, 체조경기장, 역도경기장, 수영장, 벨로드롬 등의 경기장이 타원형으로 배치되었습니다. 공원의 서편 모퉁이는 잠실종합운동장과 대로로 연결되는 점을 고려하여 광장을 두었습니다. 동편에는 전문 체육인을 위한 교육장소인 한국체육대학교와 체육고등학교가 설립되었습니다.
올림픽공원 입구에 ‘세계평화의 문’이 1988년 9월 준공되었다. 올림픽정신을 구상적으로 표현하고 대회 개최를 기념하기 위해 건립된 이 문은 건축가 김중업이 설계했다. [서울역사아카이브]
올림픽공원 설계의 핵심 개념은 몽촌토성으로 대표되는 ‘보전’과 신식 경기장들이 상징하는 ‘개발’의 만남이었습니다. 과거와 미래, 전통과 쇄신, 문화와 체육, 자연과 인공이 한 곳에 조화롭게 만나는 공원을 추구한 것입니다. 몽촌토성 주변은 개발제한구역으로 설정해 시민을 위한 공간으로 보존하였고, 경기장 건물은 토성과 대비되는 현대적인 모습이되 위압감을 주지 않는 높이로 건설되었습니다.
주거건축문화의 정수를 담아낸 올림픽선수촌
1986년 11월 올림픽 선수·기자촌 기공식이 열리고 있다(왼쪽). 이날 기공식에는 전두환 대통령을 비롯하여 이세기 체육부장관, 박세직 올림픽조직위원장, 염보현 서울시장 등이 참석했다. 오른쪽은 1987년 3월 건설이 진행 중인 올림픽 선수·기자촌의 모습. [서울역사아카이브]
올림픽대회의 규율을 제시하는 ‘올림픽 헌장’에는 ‘대회 개최국은 선수와 임원이 동일한 장소에서 숙박할 수 있도록 선수촌을 설치해야 하며 위치는 가능한 한 올림픽 주경기장과 연습장 및 기타 부대시설에 가까운 곳이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1980년대 초 잠실종합운동장 일대에는 이미 주공아파트들이 밀집해 있었고, 이에 따라 올림픽선수·기자촌은 종합운동장이 아닌 올림픽공원에 인접한 부지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1988년 8월 촬영된 올림픽선수·기자촌아파트와 중심상가. 왼쪽 중앙에 상가(현 올림픽프라자상가)가, 뒤편에 아파트가, 오른쪽에는 테니스 경기장이 보인다. 올림픽 선수·기자촌 아파트는 1988년 6월에 준공되어 1단지는 기자촌으로, 2·3단지는 선수촌으로 사용되었다. [서울역사아카이브]
올림픽선수·기자촌은 대회기간에는 각국 선수들과 관계자들의 숙소로 쓰이고, 대회 이후에는 민간에 분양해 주택으로 사용될 것이었기에 설계과정에서 두 가지 활용방안 모두를 고려해야 했습니다. 동시에 이곳은 방문객들에게 한국의 주거건축문화 수준을 보여줄 수 있는 매개로서, 단순히 주거공간을 제공하는 이상의 의미를 가졌습니다.
1988년 6월 완공 직후의 서울올림픽 선수·기자촌과 올림픽공원의 항공촬영 사진. 서울시 올림픽공원 동남쪽 20만 평에 2,604억 원을 투입하였으며, 대회 이후 5,540가구가 입주했다. [인터넷 캡쳐]
1884년 국제 현상 공모에서 당선된 설계안에 따라 선수촌은 20여만 평의 대지에 총 5,540세대를 수용하는 122개동으로 지어졌습니다. 설계의 가장 큰 특징은 중심을 기준으로 방사형 구조로 단지가 배치되었다는 것입니다. 가장 층수가 낮은 동을 중앙으로, 층수가 높아질수록 외곽으로 배치하여 계단 모양의 스카이라인을 만들었습니다. 구심점에 위치한 건물은 올림픽 대회기간에는 식당, 안내센터, 상점, 은행, 극장 등이 입점한 선수회관으로, 대회 이후에는 아파트 상가로 사용되었습니다. 올림픽이 막을 내린 이후 서울시가 올림픽선수·기자촌을 인수하였고, 정비를 거친 후 일반에 분양하였습니다.
1988년 9월 올림픽 선수촌 개촌식이 열린 가운데 161개의 참가국 국기가 게양되고 있다. [매경DB]
올림픽을 통한 국제도시로의 도약
1988년 9월 잠실 주경기장에서 서울올림픽 개막식이 열리고 있다. [VOA]
서울올림픽은 ‘화합과 전진’이라는 대회 모토에 그대로 들어맞는 대회였습니다. 1988년 9월 17일 개막해 10월 2일 폐막까지 16일간 열린 대회에는 올림픽 역사상 최대 규모인 159개국 8,397명이 참가했습니다. 냉전시대 이념의 문제로 번갈아가며 대회를 불참했던 동서 양 진영이 대부분 참가하며 올림픽 역사상 최다 국가가 함께한 화합의 행사가 되었습니다. 이 대회에서 한국은 종합 4위의 눈부신 성과를 이루었습니다.
1988년 10월 2일 서울올림픽 마지막 경기로 마라톤이 실시되었다. 사진은 이날 마라톤 경기의 중계화면. [국가기록사진·올림픽 유튜브 채널 캡쳐]
대회의 대미를 장식하는 경기는 마라톤이었습니다. 주경기장을 출발해 한강을 따라 여의도, 강남, 잠실을 순회하는 42.195km의 코스였습니다. 맑은 물이 흐르는 넓은 한강과 잘 포장된 도로, 다양한 형태의 교량, 정돈된 도시의 모습이 컬러 TV를 통해 전 세계로 송출되었습니다. 올림픽 대회를 통해 대한민국의 서울은 전쟁과 분단의 상흔을 입은 세계 최빈국의 수도에서 ‘한강의 기적’을 이룬 국제적 도시로 도약하게 되었습니다.

<참고자료>

ㅇ「88올림픽과 서울」, 서울역사박물관

ㅇ「88서울올림픽, 서울을 어떻게 변화시켰는가」, 서울역사박물관

ㅇ 김기호 외 6인, 서울도시계획사 제2권 「광복~1970년대의 도시계획」, 서울역사편찬원

정부기록물과 박물관 소장 자료, 신문사 데이터베이스에 잠들어 있는 빛바랜 사진들을 열어 봅니다. ‘사-연’은 그중에서도 ‘길’, ‘거리’가 담긴 사진을 중심으로 그곳의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연재입니다. 거리의 풍경, 늘어선 건물, 지나는 사람들의 옷차림 등을 같은 장소 현재의 사진과 이어 붙여 비교해볼 생각입니다. 사라진 것들, 새롭게 변한 것들과 오래도록 달라지지 않은 것들이 무엇인지 살펴봅니다. 과거의 기록에 지금의 기록을 덧붙여 독자님들과 새로운 이야기를 이어 나가고 싶습니다. 해당 장소에 얽힌 ‘사연’들을 댓글로 자유롭게 작성해 주세요. 아래 기자페이지의 ‘+구독’을 누르시면 연재를 놓치지 않고 읽으실 수 있습니다.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