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 ‘인터넷 쇄국 정책’ 가나…중국식 또는 북한식 통제 유력
‘인터넷 주권’ 구상이 우크라 침공 이후 구체화
지난달 30일 러시아의 인터넷 사이트들이 몇시간 동안 접속되는 않는 사태가 발생했다. 러시아에서 많이 사용하는 검색 서비스인 얀덱스, 소셜네트워크 서비스 프콘탁테(VK), 전자 상거래 서비스 오존, 주요 은행 등이 줄줄이 서비스 차질을 빚었다.
러시아가 지난 2022년 2월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두 나라의 ‘사이버 전쟁’도 치열해졌지만, 이번 사태는 사이버 공격과는 무관했다. 대부분의 인터넷 이용자들이 러시아의 인터넷 국가 코드 ‘.ru’를 쓰는 사이트들을 접속할 수 없었지만, 일부 사용자들은 문제를 겪지 않았다. 문제를 겪지 않은 이들은 러시아가 자체적으로 구축한 ‘도메인 네임 시스템’(DNS)을 이용한 사용자들이었다.
도메인 네임 시스템은 전세계 전체 인터넷 사이트의 주소록을 갖고 있다가 이용자가 특정 사이트 접속을 요청하면 연결해주는 일을 한다. 예를 들어, ‘abc.ru’라고 입력하면 ‘123.456.789.123’처럼 숫자로 등록된 실제 사이트와 연결해주는 것이다. 러시아 국내에 있는 주소록 서비스에 접속을 요청한 이용자는 제대로 연결됐다는 이야기다.
러시아 디지털개발부는 나중에 ‘.ru’ 도메인을 쓰는 전체 사이트가 ‘도메인 네임 시스템 보안 확장 집합’(DNSSEC)을 일시적으로 상실하면서 접속 장애가 발생했다고 밝혔다. 이 확장 집합은 인터넷 이용에 필요한 ‘디지털 서명’과 같은 것이다.
이 서명이 사라지는 일은 보통 해커의 공격이나 시스템 관리 실수 때문이지만, 이번 사태는 러시아 정부가 자국 내 인터넷을 외국과 끊는 실험을 하면서 발생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고 러시아 독립 언론 메두자가 전했다. 메두자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 전쟁을 계기로 자국 인터넷을 외국과 끊음으로써 정보 통제를 강화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전쟁 이후 사회 통제를 크게 강화한 러시아 정부가 인터넷마저 완전 통제하려 한다는 지적이다.
인터넷 분리 실험 여파로 추정되는 접속 장애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몇주 전에는 러시아 극동 지역에서 소셜미디어 텔레그램과 왓츠앱 접속이 한때 차단됐고, 상트페테르부르크와 프스코프, 노브고로드 등 서북부 지역에서는 4세대 이동통신(LTE)의 인터넷 접속 장애가 발생하기도 했다.
앞서 지난해 7월에는 온나라에서 외국 인터넷 접속을 일시 차단하는 훈련도 실시됐다. 이 훈련은 2019년 11월 발효된 ‘주권 인터넷법’에 따라 매년 실시하게 되어 있지만, 2022년에는 실시되지 않았다가 지난해 재개됐다. 러시아는 이 법 발효와 함께 독자적인 ‘도메인 네임 시스템’도 구축하기 시작했으며, 이 시스템은 연방 검열기관인 로스콤나조르(RKN)의 통제를 받고 있다.
전문가들은 러시아 정부가 추진할 가능성이 높은 인터넷 통제 방식으로, 정보 검열에 집중하는 중국 방식 또는 국제 인터넷과의 연결을 완전 차단하는 이란·북한 방식을 가장 유력한 방안으로 보고 있다. 세계 각국의 인터넷 규제 방식은 중국이나 이란·북한 방식 외에 △규제를 하지 않는 미국의 자유방임주의 방식 △‘규정에 따른 규제’를 추구하는 유럽 방식 △서비스는 완전히 개방하되 기술의 물리적 측면에는 보호주의를 적용하는 인도 방식이 대표적이다. 또, 튀르키예(터키)는 외국 서비스를 그대로 이용하되, 표현의 자유 등을 둘러싼 논란을 빚으면 경제적 제재로 통제하는 방식을 쓰고 있다.
러시아의 언론 전문가 알렉산드르 암진은 우크라이나 침공 전쟁 전까지는 튀르키예 방식이 가장 유력한 통제 방식으로 꼽혔으나, 전쟁 이후 크렘린(대통령궁)의 인터넷 정책에서 이런 방식 논의는 사라졌다고 지적했다. 그는 결국 러시아가 선택할 수 있는 방안이 중국식 또는 이란·북한식밖에 남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러시아에서 독자적인 인터넷 구축 주장이 제기된 것은 크림반도 강제 병합으로 러시아가 서방의 제재와 압박을 받으면서다. 막심 카브자라제 상원 의원은 크림반도 병합 직후인 2014년 4월 러시아가 자체 내부 정보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러시아 아동문학가 예두아르트 우스펜스키의 그림책에 등장하는 캐릭터 이름인 ‘체부라시카’로 부르자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 이후 인터넷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러시아 독자 인터넷을 ‘체부르넷’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체부르넷 구상은 한해 뒤인 2015년 러시아의 유명 정보 전문가 이고르 아시마노프에 의해 구체화됐다. 그는 러시아 인터넷의 미래는 디지털 주권을 극대화하고 기술과 장비의 수입 대체를 서두르며, 정보 보안을 강화하는 데 맞춰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컴퓨터 운영체제, 소프트웨어는 물론 궁극적으로는 컴퓨터칩 제조까지 독자적으로 추진할 것을 촉구했다. 그의 구상대로라면 사용자 신상정보, 결제 시스템, 소셜네트워크, 심지어 온라인 게임까지 모두 정부 통제 아래 들어갈 수도 있다고 전문가들은 우려한다.
아시마노프의 체부르넷 구상은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잊혀져갔으나, 2022년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정부 정책으로 점차 구체화하고 있다고 메두자는 지적했다.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세계에서 고립되고 있는 러시아가 세계와의 마지막 연결 고리까지 끊는 ‘정보 쇄국’을 향해 가고 있다.
신기섭 선임기자 marishin@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디올백이 대통령기록물? 진짜 국고 귀속 명품을 소개합니다
- 귀성길 비행기 탔더니 탄소가 이만큼…다음엔 기차표 예매 다짐
- 설 당일 귀성·귀경길 동시 정체…서울→부산 6시간 40분
- [현장] “당원, 자가 보유, 외동”…중국 공원에 공개 구혼 수천장
- 사랑방이자 밥집, 폭행으로도 얼룩진…노인에게 경로당이란?
- 일론 머스크 “곧 전화번호 없앨 것”…통화·문자는 어떻게?
- 김경율 “내가 맞고 사과할 일”…‘명품백’ 받은 사람 따로 있는데
- 손글씨 구애, 심판론 부각…설연휴 정당별 현수막 전략은
- ‘의대 특수’에 노 젓는 학원가 “킬러 없는데 의대 못 가?”
- 한동훈과 사직 [말글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