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이자 밥집, 폭행으로도 얼룩진…노인에게 경로당이란?

고나린 기자 2024. 2. 10.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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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4일 찾은 서울 구로구의 한 경로당. 이곳에서 만난 장순환(84)씨는 “기념으로 우리도 사진 한 장 찍어줘”라고 말하며 웃었다. 고나린 기자

지난달 2일, 서울 구로구에서 경로당 제명에 앙심을 품은 한 노인이 다른 노인들을 폭행한 일이 있었다. 지난해 5월에는 전북 전주에서 경로당이 폐쇄되고 그 건물이 청소년센터로 사용되고 있다는 이유로 한 노인이 “노인정을 돌려내라”며 난동을 부린 일이 벌어졌다.

노인들에게 경로당은 어떤 의미일까.

지난달 4일 서울 구로구의 한 경로당에서 “삶에서 경로당이 없어선 안 된다”고 말하던 장순환(84)씨의 주름진 눈가에선 눈물이 흘렀다. 함께 앉아있던 노인들은 그에게 휴지를 뽑아주며 “저 언니는 마음이 참 순해. 우는 것도 매력이야”라며 웃었다. 남편과 사별 뒤 혼자 사는 장씨는 아침 8시부터 저녁 6시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아파트 경로당에서 시간을 보낸다. 일주일에 한번 있는 체조 프로그램에 참여하거나 화투를 치고 얘기를 나눈다. “늙는 건 참 슬픈 일이야. 어디 움직이기도 불편하고 활동하기도 어렵고…. 근데 경로당에서 또래들이랑 얘기 나누다 보면 의지가 참 많이 돼.”

장씨는 설 연휴에도 경로당을 찾을 예정이다. 경로당은 평일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운영되는 게 통상적이지만 회장과 회원들끼리 논의해 명절이나 휴일에 문을 열기도 한다. 장씨는 “(경로당에서) 살아온 얘기를 나누며 같이 울어주고, 안 온 사람이 있으면 전화를 걸어 요즘 무슨 일 있냐고 서로 안부를 묻기도 한다”라고 했다.

장씨와 같은 경로당에 다니는 황아무개(87)씨도 “집에 있으면 고독하고, 자식 걱정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등 안 좋은 생각만 나는데 경로당에 와서 담소를 나누다 보면 그런 잡념이 사라진다. 그 매력으로 1년째 경로당에 다니고 있다”라고 말했다.

구로구의 또 다른 경로당에서 만난 양양순(84)씨에게는 경로당이 사랑방이자 밥집이다. 그는 “집에 있으면 밥을 혼자 먹어야 해서 쓸쓸한데, 경로당에 오면 밥도 나눠 먹고 얘기도 나눌 수 있어 좋다. 집에 가면 다시 혼자니까 경로당이 닫는 오후 5시까지 있다가 간다”라고 말했다.

코로나19로 폐쇄됐을 당시 노인 우울증이 심각해졌을만큼 경로당은 노인들이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다. 노인들에게 경로당은 회비를 내고 회장, 총무 등을 맡으며 사회생활을 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각양각색의 사건들이 벌어지는 이유다. 2년 전에는 경남 진주시에서 경로당 회원이 회장에게 회비를 횡령했다고 따지며 폭행하는 일이, 서울 성북구에서는 경로당 감사 직책과 관련해 노인들 간 시비가 붙어 싸움이 일어난 일도 있었다.

65살 이상 노인 인구가 1000만명을 바라보면서, 경로당 수도 해마다 늘고 있다. 보건복지부의 ‘2023 노인복지시설 현황’ 자료를 보면, 전국 경로당 수는 2018년 6만6286곳에서 2020년 6만7316곳, 2022년 6만8180곳으로 늘었다. 동의대 지방자치연구소의 ‘노인의 경로당 이용 특성이 삶의 만족도에 미치는 영향’(2020) 논문을 보면, 경로당 전체 이용 기간과 주당 경로당 이용일 수가 많을수록 노인들의 삶의 만족도가 높다. 이 논문을 쓴 김정근 부산사회서비스원 사회서비스실 실장은 “가족 내 노인 돌봄 기능이 약화하며 지역사회를 기반으로 한 노인 돌봄이 중요해지고 있다. 경로당을 이용하는 분들이 주변에 홀로 계시는 노인들을 챙겨 경로당에서 같이 식사를 하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이런 이유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도 경로당을 지원한다. 근거 규정도 있다. 노인복지법은 정부와 지자체가 경로당 활성화를 위해 표준 모델 및 프로그램을 개발해 보급해야 한다는 의무가 명시돼있다. 경로당의 양곡구입비 및 냉난방 비용도 예산을 지원한다. 서울시의 경우 등록 경로당에 모두 월 35만원의 운영비와 40만원의 난방비 등을 지원한다.

다만 경로당 기능을 수행하지만 시설요건 등 일부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미등록 경로당’도 많다. 서울 9곳을 포함해 전국의 1600여곳에 달한다. 정부는 올해 미등록 경로당 전수조사와 환경 개선 연구를 시행할 예정이다. 서울시 어르신복지과 담당자는 “올해 미등록 경로당 9곳에 대해 운영비와 냉난방비 등 지원을 실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경로당 관련 연구를 진행한 노경선 대한노인회 서울시연합회 대리는 “노인에게 경로당은 쉼터를 넘어 점심 한끼를 해결하고, 내 몸 하나 뉠 수 있는 공간으로 여겨진다”며 “낙후된 시설 리모델링과 다양한 참여 프로그램 개발, 노인들의 사회공헌 활동 확대 등 경로당 활성화가 중요한 시점이다”라고 말했다.

고나린 기자 m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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