첩첩산중에 거상의 향기... 화가들이 사랑한 그림 같은 마을 [최종명의 차이나는 발품기행]
1년 중 쾌적한 날이 3개월 이상이다. 공기 질이 우수한 날이 70%가 넘는다. 생태 환경이 특별해 1㎤ 당 산소 이온이 1,000개가 넘는다. 수질은 3급수 이상이다. 생태 보호 대책도 완비해 여행지로 완벽한 조건을 갖춘 도시가 있다. 저장성 리수이(麗水)다. 중국 최초로 ‘산소 도시’에 선정됐다. 시 서쪽에 쑹양(松陽)현이 있다. 중국국가지리가 ‘강남 최후의 비경(江南最後的祕境)’이라 칭찬했다. ‘산소’와 ‘비경’은 찰떡궁합이다. 보물 같은 고촌이 숨어 있다.
첩첩산중에 위치한 상인 가문의 품격, 쑹양 양가당촌
동북쪽으로 산길 도로를 따라간다. 굽이굽이 고개를 돈다. 샛길로 접어들어 10분가량 들어서니 그다지 넓지 않은 주차장이 나온다. ‘고운산촌(古韻山村), 비경삼도(祕境三都)’라는 안내판이 반갑게 맞아준다. 싼두향(三都鄉)에 위치한 고촌 중 하나인 양가당촌(楊家堂村)이다. 옛 민가와 사당과 사찰, 뿌리 깊은 나무, 골목이 어우러진 산촌의 면모를 갖췄다.
흙벽돌로 쌓고 검은 기와로 덮은 가옥이 다닥다닥 붙었다. 나무가 도열해 있고 담장이 높다. 당나라 현종 시기 재상 송경(宋璟)의 후손 송현곤이 처음 이주했다. 1655년 청나라 순치 시대다. 서로 교차하는 나무가 있어 장교당(樟交堂)이라 불렸다. 500년 수령을 지닌 두 그루 녹나무가 자태를 뽐내며 합체하고 있다. ‘부부나무’라 부르는데 생과 사를 함께 한다는 연리지다. 서로 엉킨 채 생명을 보듬고 마을을 지키고 있다.
마을 이름은 양가당촌인데 주민 300명 중 양씨는 하나도 없는 송씨 집성촌이다. 송씨종사가 나타난다. 쪽문은 작은데 내부는 제법 크다. 조상의 신위와 초상화를 담은 벽화가 번듯하다. 기둥과 들보도 여느 사당 못지않다. 첩첩산중 산골에 이주했으니 찢어지게 가난했다. 증손자 송굉당이 가문을 일으켰다. 장작을 팔러 외지에 나갔다가 우연히 거상의 돈 보따리를 주웠다. 주인이 나타나길 기다렸다가 돌려줬다. 인연이 기회가 됐다. 거상의 직원으로 들어가 장사를 배운 후 독립했다. 쑹양의 제일 거부가 됐다. 족보를 바로잡고 사당을 세웠다.
업적과 부귀가 후대까지 계속 이어가라는 수유후곤(垂裕後昆)이 걸렸다. 속셈이 단순해 보여도 솔직한 바람이다. 3칸 모두 의관을 갖춘 조상을 모시고 있다. 관리이건 상인이건 후손에게 영향을 미쳤으니 사당에서 한 가족으로 뭉쳤다. 가족을 지키고 마을 공동체를 살리고 국태민안까지 생각하는 상인 가문의 역사가 느껴진다.
황토 담장과 녹색 차 밭 어우러진 쑹양 유전촌
산속으로 4km를 더 들어간다. 차에서 내려 아래쪽으로 내려가니 유전촌(酉田村)이 나타난다. 전망대에서 보니 배산임수가 확연하다. 나무가 무성한 산과 아담한 연못이 조화를 이뤄 평온해 보인다. 명나라 초기에 엽문청이 일가를 이끌고 처음 이주했다. 남송 시대에 호부상서를 역임한 엽몽득의 후손이다. 600년 역사를 지닌 고촌이다. 산이 높아 물이 기름만큼 귀해 원래 유전(油田)이라 불렸다.
언덕에 수령 450년인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마미송(馬尾松)이라 적었다. 산잣나무라 하는데 소나무인 듯 아닌 듯 헷갈린다. 푸릇푸릇한 상록수다. 차 밭이 골짜기를 따라 밑자락까지 개간돼 있다. 2008년 한 주민이 차 모종을 사서 산자락에 심었다. 귀족이 마시는 차로 한 근(500g)에 100만 원이 넘는다는 황금아(黃金芽)였다. 쑹양 일대에서 가장 유명한 차 생산지가 됐다. 마을을 포위할 정도로 사방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변했다. 공기 좋은 산에서 재배하니 채소보다 부가가치가 높을 터다.
황토로 범벅인 담장을 따라 골목으로 들어선다. 흙벽돌로 쌓고 틈을 진흙으로 바른 민가가 많다. 검은 기와로 덮고 지붕 끝에 마두장을 세웠다. 바람과 불을 막아주고 멀리 장사 나간 서방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낙네의 마음이다. 허공을 향한 간절한 외침이다. 강남 지방의 휘주나 수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건축문화다. 회백토와 잘 어울리나 싶었는데 황토도 손색이 없다. 진한 땅의 기운이 담장을 거쳐 솟아오르는 느낌이다. 담백한 황토 빛깔과 연두색 차 밭, 초록의 산이 에워싸니 비경이 따로 없다.
화가들이 사랑하는 마을, 리수이 고언화향(古堰畫鄉)
리수이 시 롄두구(蓮都區)에 이름조차 그림 같은 고언화향(古堰畫鄉)이 있다. 두 갈래 물줄기가 하나로 모여 흘러간다. 1,500년 전 쌓은 제방이 랜드마크다. 호수같이 고요한 강물 따라 나무가 우거져 그림처럼 예쁜 마을이다. 산수화를 그리는 학생이 많다. 정자 아래에 서로 다른 방향으로 앉아 자연을 감상하기도, 인문을 담기도 한다. 강변에서는 강남의 상징인 오봉선(烏逢船)을 그린다. 골목에서는 옛 건축물을 도화지에 담는다. 이름처럼 화가가 사랑하는 고향(故鄕)이다.
옛 제방을 보려면 강을 건너야 한다. 느린 속도로 가는 유람선을 타니 10분 정도 걸린다. 부두에 내리니 도랑으로 이어진다. 운무가 잔뜩 싸여 돌다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다. 운무는 인공으로 돌 틈에서 분출한다. 신선이 구름을 거니는 듯한 연출이다. 천년 수령을 지닌 나무도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운무가 없는 도랑은 고요하고 신비롭다. 바닥에 깔린 수초가 떨리듯 흔들리는 모양이 다 보일 정도로 투명하다.
통제언(通濟堰) 제방이 보인다. 길이 275m이고 너비 25m에 높이 2.5m니 대공사였다. 활처럼 휘고 반달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두 명의 조각상이 있다. 이름도 고향도 생몰연도도 알려지지 않은 첨사마가 남조 시대에 제방을 구축하자고 제안했다. 사마(司馬)는 군대의 참모와 비슷한 관직이다. 조정에서 남사마를 파견해 함께 작업하도록 했다. 수로를 통제하고 농토를 관개했다.
용묘(龍廟)가 있다. 물이 많은 곳에 늘 용왕 사당이 있어 그런 줄 알았다. 두 사마를 기념하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제방은 청나라 시대까지 여러 번 보수했다. 애민을 베푼 두 사마에 대한 마음은 지금껏 변하지 않았다. 이름조차 아름다운 관광지가 돼 여전히 사람의 발길을 부르고 있다. 홍수를 막고 수원을 관리했다. 산에서 흘러나오는 강물은 송음계(松陰溪)라 부른다. 1급수가 흐르고 산과 구름이 한 폭의 동양화를 그리고 있다. 물은 눈을 즐겁게 하고 공기는 허파를 씻어낸다. 산소 도시의 비경이라 할만하다.
다시 유람선을 타고 되돌아온다. 강변을 바라보며 잠을 자거나 밥을 먹는 식당 겸 숙소가 많다. 강계고가(江溪古街)는 꽃과 나무로 화장하고 있다. 오늘의 숙소는 화중유(畫中游)다. 나무줄기가 늘어져 이름을 가리고 있지만 ‘아름다운 경치를 보며 즐기는 여행’이란 뜻이다. 점점 홍등의 시간으로 색이 변하고 있다. 2층에 침실이 있고 문을 열면 담소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의자와 탁자가 놓여 있고 조명도 있다. 강의 적막을 들으며 차나 술을 마셔도 좋다. 고언화향을 제대로 즐기려면 강변 숙소를 콕 찍고 올 일이다.
상인 명성 사라져도 저택은 그대로, 리수이 하양고촌
천년도 훨씬 더 지난 옛 마을이 있다. 고언화향에서 동북쪽으로 80km 떨어진 하양고촌(河陽古村)이다. 오대(五代) 말기인 933년 주청원 형제가 전란을 피해 이주했다. 중원 땅 허난(河南)의 신양(信阳)이 원적이라 자연스레 마을 이름이 됐다. 주씨 집성촌이다. 사당과 고택이 많고 지금도 주민이 살고 있다. 골목도 복잡하다. ‘아궁이 팔백, 인구 삼천’이라 할 정도로 영화를 누리던 마을이다.
먼저 허죽공사(虛竹公祠)로 간다. 청나라 함풍제 시대 거상인 주중태의 호로 명명한 사당이다. 전국 최고의 거부인 홍정상인(紅頂商人) 호설암과 절친이자 합작 파트너였다. 18살에 거의 무일푼으로 장사를 시작했다. 항저우와 쑤저우 일대에서 염료의 하나인 전청(靛青)을 유통해 큰 이문을 남겼다. 거부가 된 후 근검절약하고 소박한 옷만 입었다. 도무지 부자라는 생색을 내지 않았다. 매년 100묘(畝)에 해당하는 소작료를 가난한 이를 구제하는 데 내놓았다. 선행과 자선을 실천해 인기가 많았다. 아들 6명이 비용을 갹출해 4년 만에 낙성한 사당이다.
건축 문화가 뛰어난 쑤저우에서 설계했다. 기둥과 들보나 목조 양식은 물론 높은 처마와 곧추세운 지붕까지 모두 최고 수준이다. 벗겨지고 뜯어졌어도 원형은 그대로 남았다. 세밀하면서도 매끈한 솜씨로 사당 구석구석을 치장했다. 두공에 새긴 맹수의 얼굴과 털가죽이 살아있는 듯 생생하다. 새끼도 옆구리에 앙증맞게 붙었다. 본당 구석에 세면대와 침대가 놓여있다. 거상이 사용하던 물건인지 모르나 고급스럽다. 도금을 입힌 문양과 공예가 예술이다. 맹수와 새, 나무와 연꽃, 삼국지에서 여포와 유관장의 전투 장면까지 시선을 사로잡는다.
청나라 건륭제 시대 건축된 주백헌의 저택이다. 둘째 아들이라는 이(二)를 썼다. 늙은이인 옹(翁)을 공(公)과 우(羽)로 나눠 썼다. 사각형 문 안쪽으로 동그란 원동문(圆洞门)이 연속으로 이어진 고택이다. 문 위에 적힌 글자가 매우 독특하다. 주씨 조상이 창조한 상형자라 한다. 위아래로 소(牛)와 밭(田)을 묶어 경(耕)이다. 입(口)과 마음(心)은 독(讀)이 된다. 지붕(宀) 아래에 사람(人)이 있으니 가(家)이고 펄럭이는 구름(雲)은 풍(風)이다. 경독가풍이라 읽는다.
사자성어를 안과 밖의 양쪽 문 위에 반반 나눠 새겼다. 바깥으로 나갈 때는 순규(循规), 안으로 들어설 때는 영월(映月)이다. 바르게 살며 규율을 잘 지킨다는 뜻이며 달빛에 책을 비추며 열심히 공부하라는 뜻이다. 낮에는 밭을 갈고 밤에는 공부하는 주경야독 집안이다. 한참 세월이 흐른 후인 청나라 도광제 시대에 썼다. 주인이 된 주석전이 조상의 뜻을 받들어 상형을 한자로 옮긴 묵적(墨跡)이다.
가훈을 받들어 과거를 통과한 인물이 많았다. 모두 8명이나 진사에 급제했다. 고급관리를 우수수 배출하니 명나라를 개국한 주원장의 칭찬을 들었다. 석사자 한 쌍을 하사했다. 아주 드문 일이었기에 사자에게 희한(稀罕)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명나라 시대에는 정문이 팔사문(八士門)이었다. 안타깝게도 사자의 목이 사라졌다. 보기 드문 일이 너무 자주 일어났다.
3,000㎡ 규모의 거대한 저택이 있다. 정문 이름을 따서 경착유풍(耕鑿遺風)이라 한다. 18칸 대원(大院)과 13칸 중원(中院)이 각각 두 채이고 하나의 종사로 이뤄져 있다. 하늘로 솟은 듯한 말머리 모양의 마두장이 마을을 덮고 있다. 거부 주허죽의 넷째와 여섯째 아들이 거주했다. 아무리 거상의 후손이라 하더라도 이렇게 웅장한 저택은 매우 드물다.
땅을 굴착해 사백당(四佰塘) 연못을 만들었다. 마두장이 하늘로 향하다가 물속으로 달려드는 형세다. 어디가 하늘인지 어디가 물인지 바로 봐도, 거꾸로 봐도 모두 하나다. 하늘을 찌를 듯하던 상인의 명성은 사라졌어도 어마어마한 저택은 고스란히 전수됐다. 온종일 돌아다녀도 새록새록 문화의 꽃이 돋아나는 마을이다. 다 담아내지 못한 곳곳을 다시 돌아봐도 좋다. 다시 마을의 속살 속으로 들어간다.
최종명 중국문화여행 작가 pine@youyu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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