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이민정책, 고숙련인력 유입 위해 끊임없이 진화하다
세계는 지금
‘이민자의 나라.’ 미국을 표현하는 가장 흔한 문구다. 그렇지만 이 평범한 문구가 미국 문화를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다. 미국에 주재한 2년은 ‘이민자가 만든 나라’라는 특수성에서 오는 문화 차이를 깨닫게 하는 시간이었다.
미국은 다른 나라와 태생부터 다르다. 대다수 국가는 나라가 먼저 있고 국민이 있었다. 즉, 한 개인이 태어나면서 자연적으로 한 나라의 국민이 됐다. 이에 비해 미국은 주민이 국가보다 먼저 존재했고 스스로 국가를 만들어 국민이 된 특이한 역사를 지녔다. 그래서 우리나라와 같이 단일민족국가에선 보기 힘든 ‘한국계 미국인’ ‘선천적 미국인’이라는 독특한 용어가 생겼다. 미국의 탄생 배경에서 보듯 미국은 다양한 인종과 민족이 이민을 와서 세운 나라로, 국가 정책에서 이민법이 기본이 되고 각 행정부도 이민법으로 나라의 미래를 준비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미국에 진출하고 수출하려면 미국 문화의 기저에 깔린 이민의 역사와 정책을 살펴보며 미국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신용과 다양성
‘이민자의 나라’에서 나온 특징적 문화가 ‘신용점수’와 ‘다양성 존중’ 문화다. 미국에서는 ‘불법체류보다 신용불량이 더 무섭다’는 말이 있다. 신용점수제도는 ‘전세계 각국에서 넘어온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끼리 어떻게 믿고 거래할까?’라는 고민에서 시작됐다. 그 결과, 국가가 관리하고 사회에서 인정하는 점수제도를 만들었고 그것이 미국에 온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적용받는 신용점수제도다. 다른 나라에서 얼마나 부유하고 사회적 위치가 높았는지는 미국에 오는 순간부터 중요하지 않다.
예를 들어 방글라데시에서는 코트라(KOTRA)라는 대한민국 정부기관에서 일하는 사람이 오면 통장이나 신용카드를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다. 대한민국 정부를 신뢰해 미지의 존재이자 방글라데시에서 신용도 없는 사람에게도 경제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해준다. 하지만 미국은 상황이 다르다. 직업이나 재산과 상관없이 미국에 오는 순간 신용점수는 0점에서 시작한다. 몇 달간 신용카드도 만들기 어렵고, 당장 집을 구해야 하는데 신용점수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되기도 한다. 신용점수를 높이려면 공과금 등을 매달 빠짐없이 납부하고 신용카드 대금도 꼬박꼬박 내야 한다. 결국 다양한 배경의 구성원이 미국 시스템에 얼마나 잘 적응하는지가 중요하다.
또 다른 특징은, 미국은 서로 다른 문화와 인종이 어우러져 ‘다양성 존중’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인종차별은 미국 내에서 가장 중차대한 범죄로 여겨지며 더 나아가 성별, 인종, 장애인,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적 표현도 조심한다. 이 분위기는 단순히 선언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제도적으로도 보장됐다. 미국의 기업, 정부 부처, 학교 등 일정 규모 이상의 주요 기관에는 다양성·형평성·포용성(DEI) 담당 부서가 있어 임직원과 학생에게 다양성 교육을 주기적으로 하고, 다양한 인종·종교·문화 소그룹의 행사도 지원한다.
다양성 존중 문화는 일상 표현에도 녹아 있다. 미국에서는 남편과 아내, 남자과 여자친구를 지칭할 때 파트너(partner)라는 표현을 쓴다. 이는 다양한 인종과 문화적 배경을 지닌 상대방에게 의도치 않게 상처 주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다. 최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유행한 영상이 하나 있다. 아시아계 여성한테 백인 남성이 “어디서 왔냐?”(Where are you from?)고 묻는다. 여성이 “캘리포니아에서 왔다”고 대답하지만, “원래 출신이 어디인데?”(Where are you originally from?)라고 서너 번 되묻는 영상이다. 이는 ‘미국인이면 이렇게 생겼을 것이고 영어가 모국어일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아시아인 외모를 가진 사람은 당연히 외국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터인데, 미국 문화에서는 다양성 존중 문화를 해치는 굉장히 무례한 질문으로 들릴 수 있다.
이러한 미국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민법의 방향성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려면 먼저 비자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국은 비자 종류가 많기로도 유명한데 A비자(외교관), B비자(관광·비즈니스용), E비자(주재원), F비자(학생), H비자(현지채용), O비자(특기자) 등이 있다. 여기서 이민법 정책의 방향성을 파악할 수 있는 비자는 H비자다. H1B비자는 전문직 종사자에 해당하는 자격을 갖춘 사람이 받을 수 있는 비자다. 개인이 신청하는 게 아니라 외국 국적의 개인을 고용하려는 기업이 신청하는 비자인데, 고용주는 해당 업무를 수행할 노동자가 미국 내에는 없음을 증명해야 한다. 현실적으로 영주권(Green Card)을 받기 위한 디딤돌 구실을 하는 비자라, H1B를 어떻게 운영하느냐가 이민법의 방향에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H1B 비자는 1991년 아버지 조지 부시 대통령 행정부에서 처음 도입됐다. 도입 당시 H1B 비자의 발급 수는 6만5천 개였다. 이후 약 15년 동안 유지되다가 2006년부터 8만5천 개로 수를 늘렸다. 미국은 늘어난 2만 개의 비자를 석사 이상 졸업생에게 우선 배정하고, 고숙련 노동자 유입을 장려했다. H1B는 추첨제로 운영된다. 매년 30만 명이 넘게 지원해 실제 당첨 확률은 무척 낮다. 2023회계연도(2022년 10월1일~2023년 9월30일) 기준으로 H1B 추첨경쟁률은 3.79 대 1이었다. 온라인 사전신청으로 48만3927건이 신청됐고, 이 가운데 쿼터 8만5천 개를 포함해 쿼터에 잡히지 않는 H1B 비자까지 12만7600건이 발급됐다. 참고로 한국인 H1B 비자 발급 수는 12만7600건 중 2천 명대로, 전체의 1.6%밖에 되지 않는다.
▶이코노미 인사이트 구독하기http://www.economyinsight.co.kr/com/com-spk4.html
최근 미국 행정부의 이민정책 방향은 고숙련 노동자를 유입시켜 노동력 질을 높게 유지하는 것이다. 고숙련 노동자의 이민을 촉진해 지금까지 미국이 이룩해놓은 기술·연구 분야의 글로벌 선두 지위를 유지하는 것이 미국 이익에 부합한다는 점에 이견을 제기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다만 이민자 유입이 미국인 노동자의 임금과 고용 등에 부정적 영향을 주리라는 두려움이 있다. 이런 이유로 경제 규모가 꾸준히 확대됐음에도 20년 가까이 유지된 8만5천이라는 H1B 비자 쿼터를 늘리는 논의엔 아직 조심스러워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최근 학계를 중심으로 고숙련 외국노동자의 유입이 기술혁신을 촉진해 미국인 노동자를 포함한 미국 경제 전반에 긍정적 효과를 준다는 연구가 꾸준히 이뤄지고 있다. 나아가 고숙련 외국노동자의 유입이 저숙련 노동자의 생산성 확대에 도움을 줘서 저숙련 노동자의 임금을 높이고 고용을 확대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고숙련 노동자의 이민이 산업의 전체 파이를 키워 결국 전체 일자리의 양과 질을 늘리는 데 기여한다는 것이다.
H1B 비자 추첨제 개혁 공감대
이와 함께 추첨제를 개혁하자는 공감대도 조금 더 확대되고 있다. 학사 이상 6만5천 개, 석사 이상 2만 개라는 구분이 있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선발이 노동자의 능력보다는 ‘운’에 달렸다는 점은 미국의 인적자원 경쟁력 확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노동자의 생산성을 객관적으로 수치화하기 어렵기에 최근 캐나다나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운영하는 점수 기반 제도(Point based system)를 향한 관심도 늘어나고 있다. 나라마다 세부 운영 방식은 다르지만 노동자가 가진 여러 자격에 점수를 부여해 합산한 결과를 비자 발급 심사에 반영한다는 것이 뼈대를 이룬다.
미국이 2023년 12월, 월간 수출액 기준으로 20년 만에 한국의 수출대상국 1위가 됐다. 월 대미 수출액 110억달러로, 역대 1위의 성과다. 2023년은 여러 산업에서 미국 내 우리나라 산업의 진출이 활발했다. 소비재 분야에서는 냉동김밥 열풍이 일었다. KOTRA의 서울식품전시회에서 만난 바이어와 국내 기업 ‘올곧’이 계약을 체결해 냉동김밥을 수출한 게 소셜미디어를 타고 전 미국에 히트상품으로 판매됐다. 이런 케이푸드(K-Food)의 약진을 증명하듯 뉴욕 미슐랭 한식당 수는 2018년 3곳에서 11곳으로 약 4배 늘었다. 운전하며 듣는 라디오에서 케이팝(K-Pop)이 나오는 게 더는 신기하지 않고, 맨해튼 내 식당에 들어가도 한국 가수의 노래가 흘러나와 어느 나라에 있는지 헷갈리는 경우가 있다.
우리나라의 대미 투자도 활발해 전기자동차·배터리·반도체 등 제조업 위주로 삼성, 엘지(LG), 현대자동차, 에스케이(SK) 등 대부분의 대기업이 앞다퉈 투자를 확대했다. 그 결과, 2022년에는 투자 신고 기준 369억달러(약 48조원)를 기록해 미국의 전략적 파트너로서 관계가 더욱 강화됐다. 미국은 다양한 민족과 인종으로 구성돼 수용성과 전파력이 빠르다. 우리가 수출할 것도 많고, 진출해서 할 일도 많다. 미국의 뿌리를 알고 조금 더 깊이 있게 이해해 우리나라의 경제영토를 더욱 넓혔으면 하는 바람이다.
장재호 KOTRA 뉴욕무역관 차장 changjaeho@kotra.or.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디올백이 대통령기록물? 진짜 국고 귀속 명품을 소개합니다
- ‘개혁신당’ 이름으로 제3지대 통합 합의…이낙연 “고민 끝에 당명 수용”
- ‘윤석열-이재명 연장전’ 4월 총선…최대 변수는 ‘내부 갈등’
- 김경율 “내가 맞고 사과할 일”…‘명품백’ 받은 사람 따로 있는데
- ‘의대 특수’에 노 젓는 학원가 “킬러 없는데 의대 못 가?”
- [단독] 대학·인력업체 짜고 외국인 불법 입학…전복양식장 강제노동
- 사흘간 편집한 ‘윤석열 다큐’…사과는 없었다 [공덕포차]
- “조선시대도 파산자 위한 ‘판셈’…아프면 병원 가듯, 빚 많으면 법원으로”
- 8살 아이가 스스로 인슐린 주사…보건교사는 돕고 싶어도 못 해
- 한동훈과 사직 [말글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