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국이냐, 떡만둣국이냐…맛에 담긴 집안의 내력

한겨레 2024. 2. 10.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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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두 유무 따라 이북·이남 나뉘어
음복술 얼큰히 취해 귀한 술 서리
친구 아버지 것 ‘시바스리갈’ 순삭
떡국과 떡만둣국. 게티이미지뱅크

설날 음식은 집집마다 전통이 다르다. 우선 떡만둣국이냐, 그냥 떡국이냐 논쟁이 벌어진다. 집의 음식 기준은 복잡한 혼맥(?)이 작용한다. 어른들의 각기 다른 고향에다가 선대의 고향까지 섞여서 하나의 거대한 서사를 이룬다.

예를 들어 만두만 해도 경기도 이북과 충북 일부 지역 윗선에서는 설날에 반드시 만든다는 쪽이고 남부 지역으로 갈수록 만두가 별로 없다. 그것도 정답이 아닌 게 이북 출신 할머니가 떡하니 들어온 집은 또 부산과 광주라고 할지라도 만두를 빚는다. 한국사의 대혼돈이 음식문화사를 빚어왔다. 보통 떡국이든, 떡만둣국이든 그게 ‘메인’이다. 옛날엔 세배 다니면 정말 배가 터지는 줄 알았다. 집집마다 내놓은 떡국을 안 먹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세뱃돈 욕심에 대여섯 그릇의 떡국을 먹어치우기도 했다.

설 명절엔 부잣집 친구네로

앞서 어른의 출신지에 따라, 본가의 지역적 특성에 따라 만두가 들어가느냐 마느냐 한다고 했는데 서울에 살았던 우리 집은 또 그게 별로 관계없었다. 어머니는 어디선가 평양식 만두를 배워 왔는데, 이게 집에서 대히트를 쳤다. 떡국은 간단하게 끓이고, 손바닥보다 더 큰 평양식 만두를 빚었다.(신의주식은 더 크므로 아마도 우리 집에서 먹던 건 평양식이 맞을 듯하다.) 우리 집에 들어온 여자들이나 나가는 여자들은 만두 레시피를 새로 받았다.

덜렁 떡국보다는 떡만둣국이든, 만두 빚어서 먹는 게 더 멋지지 않은가 생각한다. 좀 사는 집들은 설날 떡국만으로는 좀 그러니, 전도 많이 부치고 갈비찜도 해 먹었다. 요새는 잡채도 하고, 회도 뜬다. 해물탕을 끓이고 엘에이갈비를 굽는 집도 있다. 내 친구네는 삼겹살을 굽는다고 한다. 한국의 음식문화는 바뀌어가는 중이다.

설날은 떡국 먹고 나서 친지들 세배 다니는 일도 좋지만 친구들과 노는 것도 또 얼마나 좋았나. 설날 무렵은 대개 방학이 끝나가는 와중이어서, 밀린 숙제와 새 학기 준비를 해야 하는데 설날이라는 핑계로 친구들과 놀 수 있었다. 게다가 주머니도 넉넉하니 또 좋았다. 서울 변두리 중심가에는 재개봉관이나 삼봉관이 꼭 있었다. 설날엔 하춘화·서영춘 쇼 같은 것을 그런 동네에서도 했다. 우리는 그런 걸 볼 나이는 안 되어서 ‘월하의 공동묘지’나 이소룡 영화 아니면 소품팀이 돈이 없어서 피가 분홍색이던 한국형 무협물을 보았다.

몇 년째 돌고 있는 필름이 역촌동 영화관에 또 걸렸다. 그런 영화를 보러 가면 뭘 사 먹게 되었는데, 극장 주변에서 원 없이 번데기나 튀김, 찐만두를 사 먹었다. 설날에 집에 별로 먹을 게 없던 아이들이 모여서 그렇게 놀았다. 나이가 좀 들어서 극장 구경도 시시해지면 친구네 가서 술을 마셨다. 전도 넉넉하고 닭찜이나 갈비구이 같은 걸 하는 부잣집 친구네를 털어 먹었다. 지금은 친구들이 명절에는 다들 고향 동네로 와서 게임방에 모인다지만.

시바스리갈 12년산

소주+보리차=시바스리갈

‘서울의 봄’ 이후 전두환이가 대통령을 할 때였는데, 명절에 가도 언제든 환영해주는 부모님이 계시고, 음식 솜씨 좋은 할머니도 계신 친구 에이(A)네로 다들 모였다. 네댓명이 방에서 기타 치고 놀았다. 전도 닭찜도 갖다 먹으면서 말이다.

우리는 설날 음식과 음복술을 탐했다. 에이가 자기 할머니를 볶아서 음복상을 한 상 차려 2층으로 올라왔다. 어쩌다 보니 술이 백화수복 갈색 됫병이었다. 그런데도 술이 모자라는 게 아닌가. 과감하게 에이 대신 내가 부엌에 가서 그 집 아버지가 드시던 맥주를 몇 병 훔쳐내어 2층으로 귀환했다. 맥주가 끝나니 아버지가 약으로 드시려고 예쁜 인삼으로 담가서 촛농으로 봉한 인삼주병을 들고 온 것은 디(D)라는 친구였을 것이다. 그는 손아귀가 크고 심장이 무거워서 일을 잘 저질렀다. 그 크고 무거운 인삼주병을 ‘뽀려’(당시 우리가 쓰던 ‘서리’나 가벼운 절도에 해당하는 속어) 오는 건 일도 아니었다. 쭉 따라보니 맥주잔으로 일고여덟잔은 나왔을 것이다. 슬쩍 씁쓸하고 달큼하며 걸쭉한 인삼주를 마시니, 우리는 더욱 심장이 커졌다. 다시 아버지의 술 수장고에서 궁정동에서 박통이 마셨다는 위스키병을 들고 오기에 이르렀다. “딱 한잔씩 하자.”

인삼주를 마시던 잔에 위스키를 따랐다. 퐁퐁퐁퐁. 그런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김포막걸리만 마셨다는 뻥을 치시던 박통의 시바스리갈. 비가 오면 생각나는 호박색 액체. 그 병을 반절이나 마셔버린 건 순간이었다. 그러자 취한 와중에도 수습이 걱정되었다.

우리는 소주를 사 왔고 보리차를 챙겼다. 그 당시는 집집마다 생수는 없었고 보리차를 끓였다. 보리차는 썬키스트 오렌지주스 엠보싱 병에 담겨 냉장고에 충분히 있었다. 소주를 붓고 색깔을 내기 위해 보리차를 합쳤다. 그 술은 다시 아버지 수장고로 들어갔다. 인삼주병에도 좀 더 흐리게 조색(?)을 하여 술을 보충했다. 시간이 흘러서 에이로부터 가슴 졸이는 뒷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아버지가 밖에서 얼근하게 취하셔서 친구를 데리고 오셨단다. 아마도 “우리 집에 박통이 마시는 위스키가 있어. 한잔 더 해”라고 하셨겠지. 그 병을 따서 한잔씩 드시는 순간 옆에 있던 에이를 쳐다보시더란다.

“세상에 나는 아버지가 그렇게 무섭게 노려보시는 건 처음 봤어. 내가 여자친구 임신했다고 고백했을 때보다 더 무섭더라고.”

에이는 옛날얘기를 하면서 언젠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그때 ‘아버지 물에 타 드시는 게 건강에 좋걸랑요’ 하고 말할 걸 그랬어.”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사람, 아니 명절이면 기억나는 친구 아버지와 시바스리갈이다. 그 어른도 벌써 가시고 우리가 그때 아버지 나이보다 훨씬 많다. 아, 무상한 세월이다.

박찬일 요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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