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로 보는 세상] '나는 애도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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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은 기능이다.
기념이고 권위이며 때론 권력이다.
지금도 기념비를 찾는 사람들은 탁본을 뜨거나, 어루만지거나, 묵념하면서 사망자들을 기억한다.
건축은 단지 기능, 기념, 위세, 권력 따위에 머무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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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도광환 기자 = 건축은 기능이다. 기념이고 권위이며 때론 권력이다. 건축은 공학이기도 하지만, 바탕은 미술이다.
현대 건축물이 충격을 선사한 경우는 다수다. 스페인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이 대표적인데, 이를 건축한 프랭크 게리(1929~)는 '해체주의' 이름을 드높였다. 빌바오는 이 미술관 덕에 먹고 산다.
하지만 지금 이야기할 건축물만큼 건축 전부터 논란을 일으킨 사례는 없다. 나라 전체가 찬반으로 갈려 거대한 논란에 휩싸였다. 반대가 훨씬 많았기에 건축물 운명은 어렴풋했다.
미국 워싱턴DC 내셔널 몰에 지어진 '베트남 전쟁 참전 용사 기념비'(1982)다.
베트남 전쟁은 미국 현대사에서 가장 큰 상처다. 상처를 치유하거나 극복하는 일은 필수다. '베트남 참전 용사 기념 기금'은 미국 의회로부터 기금 모금과 참전 용사 기념물 건립을 인가받았다. 의회는 기념비 제작을 공모했다.
1천 4백 명이 넘는 지원자 중 당선의 영예를 쥔 주인공이 발표되자 논란이 시작됐다. 예일대학 재학생이었던 중국계 마야 린(1959~)은 당시 스물한 살에 불과했다.
건축 내용은 더 큰 논란을 일으켰다. 전쟁 기념비라면 으레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영웅으로 대접받는 군인이나 기억할 만한 전투 장면을 동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마야 린은 이를 일거에 뒤집었다. 상투성을 철저히 배제했다.
알파벳 V자 모양의 검은색 벽면이 길게 이어진다. 약 150m 길이로 높낮이 변화가 있다. 관람자들은 벽면을 응시하며 산책하듯이 걷는다. 기념비가 조성된 내셔널 몰 특성에 맞게 '공원 속 공원'을 구현했다.
블라인드 선정 방식이었기에 린의 안이 뽑힐 수 있었다. 설계자와 설계안은 건축 반대 폭풍에 갇혔다. 주최 측은 린에게 수정안 제출을 제안했지만, 린은 자신의 안이 당초 공모 조건을 모두 충족시켰다며 거부했다.
들끓는 반대에도 불구하고 1982년 11월 13일 마침내 완공된 기념비가 공개됐다. 결과는 어땠을까?
그동안 논란이 일거에 종식됐다. 기념비를 마주한 수많은 사람은 넋을 잃은 듯 바라보며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 울음을 터트렸다.
기념비에는 5만 8천 명이 넘는 사망자들 이름이 사망 연도 순서로 모두 새겨져 있다. 검은 화강암은 거울처럼 반사되도록 제작했다. 관람자가 죽은 이들의 이름을 바라보는 순간, 기념비에 자기 모습도 비친다. 죽은 이와 산 자가 공존한다. 추모와 치유가 동시에 이뤄진다.
'과연 전쟁은 기념해야 할 일인가?',하는 의문을 가장 명료하게 해소한 기념비라고 할 수 있다.
지금도 기념비를 찾는 사람들은 탁본을 뜨거나, 어루만지거나, 묵념하면서 사망자들을 기억한다. 그들 마음속에서 영웅으로 부활한다.
슬픔이나 상처는 숨기는 게 아니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1930~2004)는 데카르트의 명제를 빗대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애도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건축은 단지 기능, 기념, 위세, 권력 따위에 머무르지 않는다. 베트남 전쟁 참전 용사 기념비는 경건한 묵상, 진심 어린 추념, 과거에 대한 반추의 상징물이 됐다.
데리다 언술처럼, 살아감이란 '함께 살아감'이다. 죽은 자일지라도.
doh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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