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90세 대학생 새내기 배출' 부천 진영고 수업 참관기
누적 졸업생 1만6000명···구순(九旬)의 대학 새내기는 대학원 꿈도
노후화한 시설은 아쉬움···고령자 위한 시설 개선 필요성↑
지난 5일 오후 6시. 부천시 호현로 387번길 41에 자리 잡은 진영고등학교. 3학년 9반 1교시가 시작됐다. 이날 수업 내용은 기말고사 국어 문제풀이였다. 조은하 교사가 ‘탱자나무’ 수필을 읽으며 정답과 오답을 가리자 18명 학생들 사이에서 탄식과 환호가 엇갈렸다. 시험지를 살피는 학생들은 10대 고등학생들이 아니었다. 희끗희끗한 머리카락과 주름진 손등. ‘만학도’나 ‘늦깎이’ 이상의 어휘가 필요한 평균연령 66세의 고등학생들이었다.
조 교사는 부모뻘 학생들을 대하면서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눈높이에 맞는 농담으로 분위기를 주도했다. 금방 가르친 정답을 틀리는 할아버지를 겨냥해서는 “어르신 매력은 방금 들어도 깜빡, 어제 들어도 오늘은 깜빡. 날마다 새로우니 얼마나 좋은가”라고 말했다. 노인들은 오답에 기죽지 않았다. 모르는 것을 깨우치는 기쁨이 더한 듯했다. 하회탈 같은 웃음을 지은 채 수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조 교사가 국가인권위원회 권한과 한계를 설명하며 일상 속의 차별을 거론했다. 노인들은 지난 자신의 삶 속에서 차별의 사례를 끄집어냈다. ‘여자가 살림이나 하면 되지 공부는 무슨’이라는 핀잔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이는 할머니가 많았다. 조 교사는 “배우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차별”이라고 설명했다.
조 교사가 “어르신, 젊은 아가씨에게 커피 타오라고 하지 마세요. 이슬람 사람이라고 입국을 허락하지 않으면 차별이에요. 그럼, 혈압이 높아서 면접에서 탈락 시키면 차별인가요”라고 묻자 한 할머니가 손을 들고 “차별”이라고 답했다. 이유를 밝혀 달라는 조 교사에게 “긴장성 혈압도 있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조 교사가 “혈압 문제, 다들 박사시죠. 우리는 역시 대화가 통한다”고 말하자 수업 분위기는 한껏 고조됐다.
기자가 이날 찾은 진영고는 가난을 이유로 교육 받을 시기를 놓친 이들을 위한 학력인정 평생교육 시설이다. 고등학교 과정뿐만 아니라 초·중등 과정도 있다. 각 과정에 맞는 검정고시에 따로 응시하지 않아도 초·중·고교 졸업자와 동등한 학력을 인정받는다. 주간과 야간에 걸쳐 이원화된 수업을 진행하는데 현재 재학생은 1100여명이다. 누적 졸업생은 1만6000여명에 달한다. 1982년 이 학교가 문을 열 당시에는 ‘새마을 학교’로 불렸다. 산업화 시대 부천 일대 공단에서 일하던 10대들이 노동에 지친 몸을 이끌고 와 늦은 밤까지 공부를 했다. 고령화 시대로 접어든 21세기 들어서는 학교밖 청소년들과 배움의 시기를 놓친 노인들이 주로 이 학교 문을 두드리고 있다.
비록 시설이나 환경이 일반 고등학교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공부 욕심만큼은 10대에 뒤지지 않는다. 최근에는 의미 있는 졸업생을 배출해 이를 증명했다.
올해 구순(九旬)인 3학년 9반 유기성 할아버지가 중·고등학교 과정을 4년 만에 마치고 오는 3월 부천 대학교 재활스포츠학과 ‘새내기’로 입학하기 때문이다.
여주에서 화전민의 아들로 태어난 할아버지는 일제의 징용에 끌려가 생사를 알 수 없게 된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하기 위해 어려서부터 죽도록 일만 했단다. 타고난 성실성 덕에 돈도 꽤 모았고, 여섯 살 아래 아내와 오남매를 잘 키웠다고 한다. 하지만 1학년 담임이었던 조 교사의 말처럼 배우지 못했다는 한이 ‘탱자나무 가시처럼 마음속에 박혀 있었다’고 할아버지는 전했다. 어깨 너머로 배운 한글이 배움의 전부였던 할아버지는 85세에 교과서를 마주했다. 영어가 가장 어렵기는 했지만 간판에 적힌 영어를 읽는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신이 났다고. 봄바람이 불면 어엿한 대학생이 돼 캠퍼스를 거닐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신이 난다고 한다. “내친 김에 대학원 생각은 있으시냐”고 묻자 두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1991년 8월에 이 학교에 와 33년째 진영고에서 근무하고 있다는 김택진 교감은 “처음에는 경인 국도 옆에 학교가 있었다. 그때는 구두닦이와 신문팔이, 형광등 만드는 소년공들이 많았다. 말 그대로 주경야독이었다” “지금은 청소일 하시는 어르신, 전업주부들이 많아졌다. 세월이 가면서 학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 변화 중 하나가 지난 2016년 야구부를 창단한 것이다. 한국프로야구 다승왕 출신 임선동씨가 감독을 맡으면서 전국대회 16강 진출이라는 성과도 냈다.
올해가 정년 마지막 해라는 김 교감은 그동안 학생들과 함께 한 세월에 자부심을 숨기지 않았다. 다만 노후화한 시설 때문에 고령의 학생들이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현실이 아쉬울 따름이다. 특히 엘리베이터가 없다 보니 다리가 불편한 노인들에게는 계단 오르내리기가 고역 그 자체로 보였다.
김 교감은 “예산도 그렇지만 현행 건축법상 엘리베이터를 놓을 수 없다고 한다”며 “어르신들이 무릎이나 다리에 다 병 한 가지씩은 갖고 계신데, 방법을 찾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조 교사는 비교적 늦은 나이인 30세에 교생실습 나왔다가 이곳에 푹 빠져서 17년 째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여기 학생들은 청소부 일을 하시는 분도 있고, 개인사업을 하는 분도 있다. 일이 바빠 지각도 많이 하지만 먼 길 마다 않고 오신다. 부천 뿐만 아니라 시흥, 평택에서도 학생들이 온다. 오래 이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경기도교육청은 학력인정 평생교육시설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교육환경과 교직원 처우 개선을 위해 행정·재정적 지원을 확대할 예정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일반 학교 지원 수준에는 크게 미치지 못하고 있다. 경기도 내에는 학력인정 평생교육시설이 초등학교와 중학교과 각각 한 군데가 있고, 고등학교는 진영고를 비롯해 다섯 군데가 있다. 지난해 학령기 학생 419명, 성인 1681명, 총 2100명이 배움의 한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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