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두 촬영하느라 난리...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진풍경

박돈규 기자 2024. 2. 10.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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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인생은 숱한 기다림의 총합이다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첫 장면에서 구두를 벗으려고 끙끙대는 에스트라공(신구). /파크컴퍼니

시골길에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저녁 무렵. 부랑자 에스트라공(신구)이 바위에 걸터앉아 구두를 잡고 끙끙대고 있다. 벗으려고 기를 쓰는데 벗겨지지 않아 허탕이다. 숨을 헐떡이며 잠시 쉬었다가 그는 다시 시작한다. 같은 동작을 되풀이한다.

‘고도를 기다리며(Waiting for Godot)’는 이렇게 시작되는 연극이다. 에스트라공을 연기해 온 배우들에게는 이 장면부터 부조리하다. 한 손으로 구두를 벗으려고 기를 쓰고 다른 손으로 벗겨지지 않도록 꽉 붙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뱉으면서 동시에 삼켜야 하는 연기랄까. 그 작용과 반작용을 보면서 관객은 생각에 잠길 수도 있고 깔깔거릴 수도 있다. 다행히 구두가 싱겁게 벗겨진 적은 없다고.

구두는 이 연극의 상징물이다. 궁금하다면 ‘고도를 기다리며’를 공연 중인 남산 국립극장에 가볼 일이다. 1막과 2막 사이 인터미션(중간 휴식) 때 무대 앞쪽에 핀라이트를 비추는데 그 자리에 낡은 구두 한 켤레가 놓여 있다. 에스트라공이 안간힘을 쓰고도 좀처럼 벗지 못한 바로 그 구두. 그것을 촬영하려는 관객들로 무대 앞이 북적인다. 여기서만 볼 수 있는 진풍경이다.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1막과 2막 사이 인터미션 때 다른 관객들 틈에서 구두 한 켤레를 촬영했다. /박돈규 기자

여행길에서 이국적 아름다움을 마주치면 붙잡아 고정하고 싶어진다. 스마트폰을 꺼내 찍는다. 아름다움을 저장하고 소유하려는 욕망이다. 다시 보기 어려운 장면을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불안은 셔터를 누를 때마다 줄어든다. 연극도 일종의 여행이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관객은 집으로 돌아갈 때 저 구두 사진을 챙기는 셈이다.

연극은 날마다 덧없이 사라지는 장르지만, ‘고도를 기다리며’는 그런 소유 또는 이해에 저항한다. 진짜 주인공이랄 수 있는 고도는 끝내 등장하지 않는다. 끝없는 기다림, 되감기(rewind)라도 한 듯 반복되는 대사들을 들려줄 뿐이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50년 동안 고도를 기다려 왔다. 너무 오래 신어 신체의 일부가 된 저 구두처럼, 하염없는 기다림이다. 인간의 무력함, 거역할 수 없는 숙명과 같다. 수많은 기다림의 총합이 인생일지도 모른다.

1막에서 에스트라공은 마침내 구두를 잡아뺀다. 그다음 행동을 보자. 구두 속을 들여다보고 뒤집어보고 흔들어보고 혹시나 땅바닥에 떨어진 게 없나 살펴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구두 속에 손을 넣어보기도 한다.

에스트라공: “아무것도 없다.”

블라디미르: “어디 봐.”

에스트라공: “볼 게 아무것도 없다니까.”

블라디미르: “그럼 다시 신어봐.”

에스트라공: (발을 살펴보고 나서) “발에 바람을 좀 쐬야겠다.”

블라디미르: “제 발이 잘못됐는데도 구두 탓만 하나. 그게 바로 인간이라고.”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블라디미르(박근형)와 에스트라공(신구). 오른쪽에 구두 한 켤레가 보인다. /파크컴퍼니

에스트라공은 아이 같고 직관적이다. 블라디미르는 좀 지적이고 종교적이다. 앙상한 나무 한 그루만 있을 뿐 무대는 텅 비어 있다. 무대미술가 김종석은 발레리나의 전형적인 동작에서 나무의 형상을 가져왔다고 한다. 마른 몸에서 나오는 조형미, 팔과 허리가 역동적으로 움직이며 강인해 보이는 모습이다.

“가자.”

“안 돼.”

“왜?”

“고도를 기다려야지.”

“아, 그렇지!”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 사이에는 이런 대화가 10번도 넘게 되풀이된다. 그들의 존재 이유인 고도는 사뮈엘 베케트(1906~1989)가 쓴 희곡이 1953년 프랑스 파리에서 초연된 이후 70년 넘도록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번 한국 공연은 신구(88)가 에스트라공, 박근형(84)이 블라디미르가 되어 고도를 기다린다. 박정자(82)가 럭키, 김학철(65)이 포조를 맡았고 ‘라스트 세션’의 오경택이 연출했다.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포조(김학철)와 럭키(박정자)가 등장하는 장면. 휑뎅그렁한 무대에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파크컴퍼니

신발은 종종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 보는 것을 의미한다. 관객은 기약도 없는데 기를 쓰고 고도를 기다리는 광대들을 보며 한참 웃다가 퍼뜩 이런 생각이 든다. 저 광대들이 내 모습 아닌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슬픈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의 ‘고도’는 무엇이냐고. 종교인에게는 신(神), 수감자에게는 석방일 테고, 누구에게는 어릴 적 꿈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확실히 밝히지 않았다. “인물들에 대해 아는 것은 모두 대본에 있고, 더 많이 알았더라면 대본에 썼을 것”이라고만 했다.

배우 신구는 고도와 기다림의 의미를 묻자 “고도는 실존하지 않고, 두 부랑자가 하염없이 그를 기다리며 시간을 보낸다. 오늘은 못 오지만 내일은 올 거라는 희망으로 50년을 기다린다”고 답하며 말을 이었다.

“그 모습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 모습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해요. 저마다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그런 희망 덕분에 포기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저도 오래 전부터 이 연극을 기다렸어요. 마지막 작품이 될지도 몰라 과욕을 좀 부렸습니다. 잘해보고 싶다는 희망으로 오늘도 무대에 오릅니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오는 18일까지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공연한다. 이후 23~24일 강동아트센터, 3월 15~16일 세종예술의전당, 3월 29~31일 대구아양아트센터 4월 5~6일 고양아람누리, 4월 13~14일 대전예술의전당에서 저 낡은 구두를 만날 수 있다.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출연진. 모두 원캐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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