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 회원국들이 '강간'의 정의를 두고 싸우기 시작했다
유럽의회가 유럽연합(EU) 회원국에 동일한 '강간죄' 정의를 도입하려 했지만 불발됐다. 일부 회원국이 자국 국내법상 형법의 내용과 EU의 추진 방향이 다르다고 문제 제기 했기 때문이다. 일부는 유럽의회가 이 사안에 대한 권한이 없다고 반박하기도 했다.
유럽의회가 처음 '강간'에 대해 공통의 정의를 만들겠다고 선언한 건 약 2년 전이다. EU집행위원회는 지난 2022년 3월8일(현지시간) '세계여성의날'을 맞아 여성 대상 폭력에 대처하기 위한 규정을 명문화하겠다면서 이런 의지를 처음으로 밝혔다. 여성에 대한 폭력은 주로 △성별(젠더)을 기반으로 한 폭력 △강제 결혼 △여성 할례 △강간 △강제 낙태 △스토킹 △온라인 폭력 등으로부터 여성에 대한 구조적인 차별이나 폭력을 제한할 수 있도록 포괄적인 법안으로 상정하겠다는 취지다.
하지만 강간에 대해 누가,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를 두고 의견이 갈리기 시작했다. 회원국별로 미세한 입장 차이도 드러났다. 단순한 찬성과 반대를 넘어 EU 차원의 논의가 합당한 주제인가까지 논쟁거리가 됐다.
결국 지난 7일 유럽의회는 강간에 대한 공통된 정의를 빼고 여성에 대한 폭력 문제를 대처할 나머지 합의된 규정안을 발표했다. 유럽의회는 "이번 규정이 강간의 정의를 담고 있지 않지만, 회원국들은 합의되지 않은 성관계는 범죄행위로 간주한다는 인식을 높이는 것을 목표로 할 것"이라는 입장만 밝혔다.
EU는 "과거엔 폭력, 위협 또는 피해자가 저항할 수 있었는지 여부에 따라서 강간을 정의해왔다"며 "하지만 최근 보이는 새로운 강간의 사례와 피해자 반응을 살펴보면 이 정의는 심각하게 부족하다"고 설명한다. 이어 "피해자가 자신의 생명의 위협을 느껴 비자발적으로 수동적으로 응하게 되는 상황이나, 권력 관계를 배경으로 한 공격, 학대적인 관계에서 일반화된 폭력으로서의 성적인 학대 등 '동결된 공포'가 수반된 폭력도 강간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요약·주장했다.
2014년 공표된 유럽평의회 협약, 일명 '이스탄불 협약'은 강간죄를 어느 정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이 때 강간은 "다른 사람의 신체 부위나 물건을 동의 없이 성적인 의도로 성기, 항문 또는 구강에 삽입하는 행위"라고 규정했다. EU는 이를 차용해 "여성이 동의하지 않은 성기, 항문, 구강에 타인의 신체나 물건을 삽입하는 행위, 그리고 그런 행위를 하게끔 하는 관여하는 행위'라고 명시하고자 했다.
유럽 인권조약이 '동의'를 근간으로 한다는 점도 언급했다. 처음에 여성이 동의했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다음 단계로 가는 것까지 다 동의했다고 볼 수 없다며 중간에 언제든 철회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명백하고 자발적인 동의'를 강간의 판단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결국 이 문구는 포함되지 못했다.
일명 "'예스' 라고 말해야 진짜 '예스'다(only yes means yes)'는 원칙이다. 스웨덴, 스페인, 크로아티아, 그리스 등이 포함된다. 성적 접촉에 대한 명확하고 자발적인 동의가 있어야 하고, 그렇지 않다면 강간죄를 적용할 수 있다.
반면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는 "'아니오'라고 말해야 아닌 것(no means no)" 원칙이 여전히 적용되고 있다. 피해자가 성행위를 구두로 거부했음을 입증해야 한다는 의미다. EWL에 따르면 대부분의 동유럽 회원국을 포함한 나머지 11개 EU 국가와 프랑스, 이탈리아에서는 폭력이나 위협적인 상황에 대한 저항이 여전히 강간의 필수 요소로 간주된다.
이런 상황에서 유럽의회를 중심으로 공동 규정을 도출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는 평가도 나온다. 독일과 프랑스, 헝가리 등은 강간에 대한 정의를 논하기에 앞서, 유럽의회가 형법상 강간에 대한 통일된 정의를 만들 권한이 없다고 막아섰다.
또 다른 회원국들은 이미 EU가 공동 처벌로 채택한 '여성 성적 착취'의 틀에 강간을 포함시키는 방식으로 풀어낼 수 있다며, 이번 여성에 대한 폭력 관련 규정에선 제외하자고 주장한 것으로 전해진다.
결국 유럽의회는 이번 규정이 강간의 정의를 담고 있지 않지만 회원국들 사이 합의되지 않은 성관계는 범죄행위로 간주한다는 인식을 높이는 것을 목표로 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하늬 기자 honey@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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