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당 뺏기고 수교국 줄고···골치 아픈 대만 새 정부 대응은
집권 민진당, 원내 1당 내준 데 이어
국회의장·부의장도 국민당이 가져가
8년간 대만 수교국 22개국→12개국
中 거대 자본 앞세워 단교 압박 나서
라이, 美와 군사 결속 지속 강화 전망
TSMC는 日·美·유럽 등 투자 가속화
“우리의 노력이 부족했다. 겸허히 반성해야 할 점들이 분명히 있다”
1월 치러진 제16대 대만 총통 선거에서 라이벌들을 꺾고 당선된 라이칭더 차기 총통의 이같은 발언에는 마냥 승리를 자축하지 못하는 복잡미묘한 심정이 담겼다. 직선제 도입 후 처음으로 8년 이상 장기 집권의 길을 연 민주진보당(민진당)의 분위기 역시 마찬가지다. 총통 선거와 함께 실시된 입법위원(국회위원) 선거에서 민진당은 참패했다. 정부 정책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필수적인 입법원 과반 의석 고수에 실패한 데다 다수당 지위마저 제1야당 국민당에 빼앗겼다. 입법원의 의제를 주도적으로 이끄는 입법원장(국회의장)직을 야당에 내준 것 역시 당연한 수순이다. 밖으로는 얼마 남지 않은 대만 수교국들이 중국의 압박에 밀려 단교를 선언하는 등 외교적 입지 역시 위협 받고 있다. 어려운 상황에 직면한 라이 차기 정부는 우선 ‘친미 독립’의 차이 현 정부의 기조를 이어받아 임기를 시작할 것으로 보인다. 이는 ‘중국 견제’로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미국과 군사적 결속을 강화해 고조되는 대만해협 안보 위협에 대응하고, 세계 반도체 공급망의 중심에 있는 TSMC를 앞세워 민주 진영과의 경제 협력을 다지는 한편 중국과 긴장 관계를 ‘현상 유지’ 수준으로 풀어나가는 방식이 될 가능성이 높다.
대만 제11대 입법원장에 선출된 국민당 소속 한궈위(韓國瑜) 입법위원은 2일 취임식에서 “즉시 입법원 개혁에 착수하겠다”고 강조했다. 한 신임 입법원장은 “의사 중립 원칙을 준수하고 군소 정당의 권리까지 존중하고 보호할 것”이라며 민진당과 민중당 등에 “대만인의 이익을 위해 협조해달라”고 덧붙였다. 새로 취임한 입법원장이 으레 내놓을 수 있는 발언이지만 현지 매체들은 일제히 곧 임기를 시작할 라이 차기 정부와 여당에 대한 견제구를 날린 것으로 풀이했다.
제1야당인 국민당에 원내 다수당 지위를 내준 데 이어 입법원 수장직까지 빼앗긴 라이 차기 정부는 국정 운영에서 큰 도전에 직면할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달 13일 실시된 입법위원 선거에서 민진당은 기존 61석에서 10석이나 줄어든 51석을 확보하는 데 그쳤다. 반면 국민당은 의석수를 기존 38석에서 52석까지 확대하며 원내 1당을 꿰찼다. 2석을 가져간 무소속 후보들이 친국민당 성향인 점을 고려하면 사실상 54석을 확보한 셈이다. 원내 어떤 당도 과반 의석수(총 113석 중 57석)을 차지하지 못한 상황에서 다수당인 국민당과 8석을 확보한 제2야당 민중당이 합심해 제동을 걸 경우 정부의 정책은 동력을 잃게 된다. 실제로 이번 입법원장 2차 표결 때 민중당 입법위원 8명이 모두 기권 결정을 내리며 국민당에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주자 대만 연합보는 “양당이 협력을 위한 ‘당 대 당’ 차원의 협상에 나설 것”이라고 분석했다.
한 입법원장이 국민당 내에서도 친중 성향이 강한 인물로 꼽히는 점도 반중 독립 성향이 강한 라이 차기 정부에 부담이다. 2020년 총통 선거에서 민진당 소속의 차이잉원 총통과 맞붙었던 한 입법원장은 경제 협력을 명분으로 중국과 홍콩을 방문해 중롄판(중앙인민정부 홍콩 주재 연락판공실) 및 국무원대만사무판공실(중국의 대만 통일 기구) 주임과 회동하며 논란을 빚었다. 또 홍콩 시위에 대한 견해를 묻자 “모르는 일”이라고 실언해 비난을 받았다. 중국 관영 CCTV는 입법원장 표결을 앞두고 “한궈위는 ‘92공식’(하나의 중국을 인정하되 각자 명칭을 사용하기로 한 양안 간 합의)을 확고히 지지한다”며 “입법원은 올바른 선택을 해야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반중 독립 지지세를 업고 집권에 성공한 라이 차기 총통의 외교 역시 시험대에 오를 것으로 전망된다. 중국이 고수하는 ‘하나의 중국’ 원칙은 중국만을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하기 때문에 양안(중국과 대만)과 동시에 수교할 수 없다. 지난달 13일 대만 총통 선거에서 민진당이 승리한 지 이틀이 채 지나지 않아 남태평양 섬나라인 나우루는 대만과 단교와 중국 국교 회복을 선언했다. 나우루 정부는 성명을 내고 “하나의 중국 원칙과 유엔 총회 결의 제2758호를 준수해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전체 중국을 대표하는 유일 합법 정부로 승인한다”고 밝혔다. 이 과정에서 나우루가 대만과 중국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경제 원조 규모를 저울질한 결과 중국과의 수교를 택했다는 관측도 나왔다.
라이 차기 정부에서 양안 관계가 악화할 경우 대만과 단교하는 국가가 더 늘어날 수 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중국은 세계 2위 경제대국으로서 대규모 투자를 전면에 내세워 주변국의 환심을 사는 전력을 구사해왔다. 2016년부터 민진당 정부가 이어지는 동안 대만 수교국은 22개국에서 현재 12개국으로 절반 가까이 줄었다. 지난해 3월 중미 국가 온두라스 역시 대만과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끊고 중국과 정식 수교를 맺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만 수교국 가운데 인구가 가장 많은 과테말라와 태평양 섬나라 투발루 역시 단교 가능성이 제기됐다. 과테말라의 경우 8일 로이터통신과 인터뷰에서 “과테말라는 대만과 수교 관계를 맺고 있다”며 “(대만 단교로) 방향을 바꾸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지난달 취임한 벨르나르도 아레발로 대통령이 친중 성향인 점은 단교 불확실성을 높이고 있다.
국민당은 여당이 국제 사회에서 대만의 입지를 좁히고 있다며 비난 목소리를 키우고 있다. 국민당 소속의 장치천(江啓臣) 신임 부입법원장(국회부의장)은 소셜미디어(SNS)에 “대만의 외교 상황이 악화일로”라며 “수교국 상실로 대만이 국제 고아 신세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대만이) 소말릴란드와 같은 처지에 처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소말리아 북쪽에 위치한 소말릴란드는 1991년 독립을 선언했지만 국제사회로부터 국가 승인을 받지 못한 상태다.
라이 차기 총통은 5월 20일 공식 취임 후 구체적인 정책 방향을 내놓겠지만 기본적으로는 미국 등 서방과 관계를 강화하는 동시에 중국을 견제하는 차이 현 정부의 기조를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특히 라이 차기 총통이 후보 시절 꾸준히 강조했던 것처럼 대만해협 안보를 위한 국방력 증진에 방점을 둘 것으로 전망된다. 대만 중앙통신사(CNA)에 따르면 미 국방부는 최근 미 방위업체들과 향후 4년간 대만에 공급할 첨단 공대지 미사일 50기를 제작하는 6840만 달러(약 912억 원) 규모 계약을 체결했다. 미사일은 대군의 F-16 전투기의 장거리 타격 능력을 강화하는 데 활용될 예정이다. 대만은 지난해 미국으로부터 신형 F-16V 전투기 66대를 추가 주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기업인 TSMC를 앞세운 투자를 통해 서방과 경제 협력 관계를 공고히하고 첨단 산업 경쟁력을 제고하겠다는 입장 역시 강화할 가능성이 크다. 라이 차기 총통은 당선 직후 “반도체 산업을 더욱 발전시킬 것”이라며 “완전한 산업 공급망을 형성하기 위해 장비 연구개발(R&D), 직접회로(IC) 설계·제조·패키징·테스트 분야에서 칩 육성 산업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TSMC의 대(對)서방 투자도 지속되고 있다. TSMC는 연내 일본 구마모토현에 반도체 제2공장 착공에 나선다고 발표했다. 2공장에서는 2027년 말까지 6나노(나노미터·10억분의 1m) 칩을 생산할 계획이다. 이미 구마모토에서 건설 중인 1공장과 합한 월간 생산 능력은 10만 장 이상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TSMC는 월 10만 장 이상을 생산하는 기지를 ‘기가 팹’으로 부르며 주요 거점으로 인식해왔다. TSMC는 미국 애리조나주와 독일에서도 각각 공장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TSMC의 해외 거점 생산능력은 2028년 기준 30만 장 정도로 이는 전체의 20% 이상 비중”이라며 “대만의 경영 자원을 첨단 개발에 쏟기 위해서라도 해외 거점을 계속 늘려나갈 것”이라고 전했다.
정혜진 기자 sunset@sedaily.comCopyright © 서울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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