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손대범 칼럼 : 모든 것의 1쿼터 ② KBL 최초의 인 게임 덩커는?
※본 기사는 농구전문 매거진 점프볼 2월호에 게재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국내에서 찾을 수 있는 덩크슛 관련 가장 오래된 보도는 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2년 「경향신문」의 NBA 기사에 언급되었다. 하지만 70년대 훨씬 전에도 친선경기를 위해 방한한 해외 팀들이 웜업 중 덩크슛을 꽂는 영상이 있는 것을 봐서는 아마도 공식 보도는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을 것이다. 단지 온라인에 현존하는 신문 아카이브에서는 이때가 처음이었다.
요즘에는 경기 중 이뤄지는 상황을 ‘인 게임’으로 표현하곤 한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편의를 위해 ‘인 게임’으로 통일시켜 쓰도록 하겠다. 국내 선수 최초로 인 게임 덩크가 보도된 것은 언제였을까. 1978년 11월 25일, 「동아일보」는 ‘연세대 조동우, 경기 중 덩크슛 첫선 보여’라는 기사를 8면에 냈다.
조동우는 197cm의 장신에 긴 팔, 긴 다리의 소유자였다. 그는 11월 24일 제15회 가을철 대학연맹전 결승에서 덩크를 성공시켰다. 동아일보는 조동우가 성공시킨 그 원 핸드 덩크가 국내 최초의 인 게임 덩크라 설명했다. 상대는 국민대였고, 스코어는 52-32로 연세대가 크게 앞서던 상황이었기에 부담이 덜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 시절 연세대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박종천 전 감독에게 물어보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나보다 두 학년 위 선배였습니다. 농구를 늦게 시작해 구력이 좀 짧았지만, 센터 포지션에서 리바운드를 비롯해 신장을 이용한 플레이는 독보적이었죠. 등을 지고 하는 플레이나, 피딩능력 등 당시 한국농구가 센터에게 필요로 했던 플레이는 부족했지만 인사이드 장악 능력이 있었죠. 탄력도 좋았어요. 그 당시 고려대와 만나면 임정명, 이충희 때문에 고전했는데 그 형이 있으면 든든했던 기억이 납니다.”
다만, 조동우가 첫 인 게임 덩커였던 것을 정확히 회고하는 농구인이 많지 않았다. 아마도 지금 같았다면 중계 화면도 남았을 것이고, 팬들이 관중석에서 휴대폰으로 찍은 영상들이 백번도 넘게 공유되지 않았을까. 조동우는 졸업도 전인 1979년, 일찌감치 삼성 입단이 결정될 정도로 기대를 모았지만 부상 탓인지 국가대표로는 이렇다 할 자취를 남기진 못했다.
“박한(191cm), 최종규(188cm) 같이 큰 선수들은 연습 중에 종종 덩크를 했었어요. 저는 1972년에 한국은행과 할 때 덩크를 했었습니다. 인터셉트해서 노마크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죠. 하하.”
지금이야 농구전문지가 있기에 경기가 열리는 곳이라면 어디든 기자가 파견되지만, 그 시절은 그렇지 않았기에 이 덩크는 아는 사람만 아는 덩크로 남았다. 어쩌면 그 이전에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유희형 위원은 그 말에 동의를 하면서도 쉽지는 않았을 거라 덧붙였다.
“신장도 정말 작았지만 우리는 러닝 점프에 익숙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덩크슛은 높이 뛰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공을 쥘 수 있어야 하거든요. 일본과 경기를 하면 웜 업 때 일본 선수들은 12명 중 절반이 덩크를 했어요. 탄력이나 러닝점프가 좋았거든요. 반면 우리는 그게 안 됐습니다.”
흥미롭게도 유희형은 1972년의 그 덩크가 본인의 몇 안 되는 성공이라고 말했다. “저는 연습 때 오히려 덩크가 안 되더라고요. 팔도 짧고 손도 작았거든요. 그래서 송도고 졸업하자마자 산을 1년 뛰었어요. 새벽 5시 30분에 일어나서 매일 달렸죠. 그렇게 1년 하니까 서전트가 늘더군요. 점프를 하면 손목이 림 위쪽으로 15cm 정도 더 올라가는 것 같았습니다. 한국은행 전에서는 신이 나서인지 점프를 뛰었는데 그게(덩크슛이) 되더군요. 자료가 안 남은 게 너무 아쉽습니다.”
그러나 운동능력이 좋아서 19살에 일찌감치 국가대표가 됐던 유희형 위원은 덩크보다는 블록슛을 한 것이 더 기억에 남는다고 돌아봤다. “상대가 노마크라 생각하고 편하게 레이업 슛을 올려놓을 때 열심히 쫓아가서 그걸 블록할 때가 좋았습니다. 신동파 씨를 블록한 것은 잊을 수가 없네요. 하하.” 유희형은 본인의 다음 세대부터는 덩크슛이 잘 나왔다고 말했다. 그때 언급된 이름 중 하나가 앞서 소개한 조동우였다.
1990년대 들어 국내에는 NBA를 즐길 방법이 다양해졌다. 지금이야 NBA 리그 패스로 모든 경기를 다 볼 수 있고, 유튜브로도 하이라이트나 분석 영상을 쉽게 접근할 수 있지만 이 시기에는 TV 중계가 전부였다. 「SBS」가 매주 수요일 밤 방영하던 편집 영상이 기폭제 역할을 했다.
또, 주한미군을 위한 「AFKN」, 일본 「NHK」, 중화권의 「STAR TV」 등 운이 좋으면 주 4, 5회까지 NBA를 볼 수 있었다. 필자 자녀들에게는 말하기 부끄러운, 평생 ‘착한 아들’이라며 대견해하셨던 어머니께는 죄송한 이야기지만 ‘몸이 너무 아프다’라고 아침부터 앓는 소리를 하고선 합법적(?) 지각 및 조퇴를 일삼던 시기가 있었다. 이제야 고백하지만 나는 NBA를 시청했다. 그 당시는 만화 ‘슬램덩크’를 비롯해 여러 매체에서 농구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는데, 덩크슛은 대중에게도 낯선 단어가 아니었다.
다만 이때만 해도 ‘동경의 대상’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한기범을 시작으로 정재근, 서장훈, 현주엽, 전희철, 문경은까지. 경기 중 덩크슛이 나올 때면 체육관은 떠나갈 듯했다. 야외 코트에서 림을 잡는 형들은 너무나 위대하게 보였다. 오죽하면 ‘덩크슛, 한번 할 수 있다면 내 평생 단 한 번만이라도’라는 가사가 나왔을까. (TMI지만 이 곡은 '마법의 성'으로 잘 알려진 가수 김광진이 작사, 작곡을 했다. 김광진은 뮤지션 중 농구를 가장 깊게 봤던 인물 중 하나로 유명한 농구 마니아였다. 1993년에 가수 이승환이 불러 인기를 끌었던 이 곡은 2017년, NCT DREAM이 리메이크해 한동안 농구장에 울려 퍼졌다.)
KBL의 출범, 그리고 외국 선수들의 등장은 인 게임 덩크를 흔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국내 선수 중 KBL 경기에서 가장 먼저 인 게임 덩크를 꽂은 선수는 누구일까. 아마 대다수가 이 선수의 이름은 낯설 것이다. 바로 송인호다. 1997년 2월 8일 대우증권과의 경기 3쿼터에 원핸드 덩크를 성공시켰다.
그 당시만 해도 통계 프로그램에 덩크슛이 기록되지 않았기에 남아있지 않지만, 경기 영상(KBS 중계)과 신문 기사 등을 통해 그가 최초의 인 게임 덩커라는 ‘공식 사실’을 확인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토드 버나드가 리바운드를 잡자 곧바로 속공이 발생했고 그의 베이스볼패스를 받은 송인호가 러닝 스텝을 잡고 올라갔다.
그가 가볍게 원핸드 덩크를 꽂는 순간, 캐스터는 수차례 ‘송인호’의 이름을 반복해 불렀고, 유희형 해설위원 역시 감탄을 금치 못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나온 덩크슛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송인호는 겨우 20살의 막내였다.
키가 187cm인 송인호는 그 시기 흔치 않은 고졸 선수였다. 강원사대부고 출신으로 대학을 거치지 않고 바로 현대전자에 입단했다. 현대전자는 KCC의 전신이다. 그러나 송교창처럼 처음부터 프로 직행을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
“중앙대학교에 가고 싶었어요. 하지만 생각보다 수능 점수가 낮게 나와서 잘 안 풀렸죠. 진로를 고민하던 차에 현대전자 측에서 집에 찾아오셨죠. 농구를 계속하게 해주셨습니다.” 송인호의 회고다. 송인호는 탄력이 좋은 선수였다. 중학교 3학년 때 처음 덩크를 꽂았다는 그는 연습 때는 정말 쉽게 덩크를 했다고 돌아봤다.
다만 대졸 선수들도 적응이 쉽지 않은 게 바로 ‘사회’다. 1995년 현대전자에 입단했지만 기회가 쉽게 오지 않았다. 경기를 뛰어도 오랫동안 구력을 쌓은 선배들을 제치고 득점을 올리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프로 출범 이후에 오히려 출전 기회가 더 늘어났다. KBL 원년은 현대에게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이상민과 조성원, 추승균, 김재훈 등 주력 멤버들이 모두 군입대를 하면서 전력이 크게 약화됐던 탓이다. 뛸 선수가 없었다.
결국, 당시 지휘봉을 잡고 있던 신선우 전 감독은 가용인원을 모두 쓸 수밖에 없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송인호였다. “그때 송인호 선수가 대학을 안 가고 바로 실업팀에 왔던 기억이 납니다. 탄력이 좋고 패기도 있었던 친구였죠. 개인적으로는 미완의 선수였다고 생각해요. 지시를 내리면 죽기 살기로 뛰었어요. 마치 제주도에서 끌고 온 망아지 같다고나 할까요? 의욕도 강했고요. 그래서 코칭스태프도 마침 선수도 부족하니 키워보자고 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KBL 초창기, ‘코치’로 신선우를 보좌했던 박종천 전 감독의 말이다.
프로에서 함께 선수 생활을 했던 구본근 현대모비스 사무국장도 “운동능력 하나는 대단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운동도 열심히 했고요. 아쉽게 상무에는 가지 못했는데, 제가 나중에 듣기로는 양구에서 군 생활을 하면서 군화를 신고도 덩크를 했을 정도로 탄력이 좋았다고 합니다. 다만 기술적으로 더 성장할 기회가 없었던 것 같아요”라고 돌아봤다.
첫 시즌 송인호는 16경기에 출전해 4.7점을 기록했다. 평균 12분 26초를 뛰며 3점슛 32.6% 1.1리바운드도 기록했는데 그중에서 인상적인 것은 0.4블록슛록이었다. 워낙 탄력이 좋다 보니 블록슛에서도 인상적인 장면을 남긴 것이다.
그러나 이는 송인호가 프로에서 남긴 마지막 하이라이트였다. 원년 시즌을 마치고 군 입대를 했는데, 제대 후에는 자리가 없었다. 이미 이상민-조성원-추승균 트리오를 중심으로 견고하게 ‘왕조’의 라인업이 갖춰진 뒤였기 때문이다. 현대는 1997-1998시즌부터 3시즌 연속 정규리그 정상을 차지했고 1998년과 1999년에 챔피언결정전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스타급 주전 라인업부터 벤치까지 탄탄한 전력을 갖췄다는 것이 팀의 장점이었다. 반대로 송인호가 끼어들 자리가 없었다.
“그때는 프로선수가 상무에 지원할 자격이 없었습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해결될 것이니, 우선은 일반병으로 복무하다가 전환을 시도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이마저도 잘 안 풀렸습니다. 제대 후에 저는 원주 삼보로 이적(2000-2001시즌)했어요. 처음에 저는 ‘임대’ 형식이라 생각했죠. 그런데 그게 아니었더군요. 당연히 저는 현대로 돌아가는 줄 알고 삼보와 연락을 안 했고, 현대 쪽에서 훈련하러 오라고 연락을 줄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더군요. 뭔가 중간에 꼬여버린 것 같았습니다. 뒤늦게 저를 SK로 보내주겠다고 했지만 어린 마음에 거절을 해버렸죠. 나름대로 마음이 상했거든요.”
2001년 3월 4일. 송인호가 ‘프로농구선수’로 뛴 마지막 경기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상대팀이 친정팀이자 자신을 끌어준 현대였다. 13분 32초. 그 시즌 들어 가장 긴 시간을 소화한 그는 5득점(3점슛 1개) 5리바운드 1어시스트 1스틸을 남기고 마침표를 찍었다.
현대에서 함께 뛰었던 이환우 벌말초 코치는 “러닝스텝으로 덩크를 가볍게 올라가던 게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오래 커리어를 유지하지 못한 게 아쉬웠던 친구입니다. 그 당시 상무가 아니라 일반 현역병으로 가게 된 게 안타까웠죠. 지금은 군 공백이 있어도 다들 잘 돌아오지만, 그때는 운동량이 부족해 복귀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인호도 군대는 빨리 다녀왔고 나이도 젊었지만, 공백기가 길다 보니 자신을 더 보일 기회를 못 얻었던 것 같습니다”라고 돌아봤다.
은퇴 후 그는 대성고를 거쳐 강원사대부고의 코치로 활동했다. 지금은 개인사업을 하며 저녁에는 정병호 코치를 도와 후배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렇다면 송인호는 자신이 최초의 인 게임 덩커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그 시기에는 농구에 대한 미디어 관심이 높을 때라 송인호도 그 기록을 잘 알고 있었다.
“연습 경기를 할 때도 찬스가 나면 돌파를 적극적으로 했습니다. 아마 그때도 레이업 할 바에는 덩크를 하자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하하. 그래도 지금 후배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죠. 그 당시만 해도 저나 이상민 형(KCC 코치) 정도 제외하면 그 키에 덩크하는 선수가 적었는데, 지금 선수들은 같은 키라도 우리보다 훨씬 더 잘하는 것 같습니다.”
1997년 출범한 프로농구는 2월 1일이 되면 27살이 된다. 송인호 이후 국내선수들도 수없이 덩크를 꽂아 팬들을 열광시켰다. 공식 집계가 안 된 1997년을 제외하더라도 인 게임 덩크를 최소 1개라도 기록한 선수는 총 93명이다.
덩크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시기는 2010년 이후다. 이승준·이동준 형제에 221cm 최장신 하승진, 여기에 ‘득점왕’ 문태영과 김민수 등 이 가세하면서 볼거리가 다양해졌다. 2013년 데뷔한 김종규(207cm)는 1월 17일 기준, 누적 덩크 375개로 국내 프로농구선수 사상 가장 많은 덩크를 기록했다. 힘과 탄력을 겸비한 이승준(은퇴)은 239개로 2위, 하승진(은퇴)도 198개를 기록했다.
가드 중에서는 김효범(189cm)이 총 44회 덩크로 역대 1위다. 대부분의 덩크 장면은 현대모비스 시절에 만들어졌는데, 특히 2008-2009시즌에 12개를 기록했다. 김효범은 올스타 슬램덩크 콘테스트에서도 우승(2007, 2009년)한 바 있다.
그 계보는 187cm의 김선형이 이어가고 있다. 정규리그 기준 총 40개로 가드 중 역대 2위, 통산 16위다. 김선형은 강병현을 앞에 두고 ‘인 유어 페이스’를 꽂는가 하면, 국가대표로도 중국전에서 이지엔리엔을 상대로 덩크를 터트리며 ‘판타지 스타’의 면모를 확고히 했다.
다만 감독도, 선수도 조심스러워하는 부분이 있다. 국내 핸들러 자원들은 ‘이륙’과 ‘착륙’에 있어 체력적인 면을 비롯, 부상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이대성도 현대모비스 시절 덩크를 종종 실패했는데 끝난 뒤 “다리에 힘이 풀려서 그런 것 같다”라며 멋쩍어한 기억이 있다. 이대성은 718경기를 뛰는 동안 4번의 덩크를 시도했는데 2017-2018시즌에 단 1개 성공했다.
변준형처럼 대학 시절부터 덩크를 종종 해왔던 선수들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에너지 소비를 피해왔다. ‘와이어 투 와이어’ 우승을 차지했던 2022-2023시즌에도 “몸 풀 때도 덩크슛을 안 하려고 한다”라고 농담 섞인 멘트를 던지기도 했다.
6월 NBA 드래프트, 7월 NBA 서머리그 취재차 미국을 방문하면 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열리는 WNBA 경기를 보고 왔다. 힘들게 미국까지 갔는데 행사 하나만 보고 오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그런데 정말 정말 ‘보러 오길 잘했다’라고 생각이 든 장면이 있다. 바로 여자농구선수의 덩크슛이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기자의 본분도 잊은 채 기자석에서 “우와아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일어섰다. 브리트니 그라이너가 덩크슛을 꽂은 것이다.
WNBA는 NBA와 달리 취재 기자가 적어 어느 구단이든 플로어 근처의 취재석을 내주곤 한다. 그러니 나는 그 누구보다도 가까이서 그라이너의 덩크슛을 본 셈이다. 소리를 지르고 나니 조금 무안해지긴 했지만 벌떡 일어선 건 나만이 아니었다. 현장의 관중들조차 그라이너의 그 덩크슛에 ‘입틀막’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1996년 4월 출범한 WNBA에서는 ‘전설’ 리사 레슬리(2002년, 196cm)를 시작으로 캔디스 파커(193cm), 실비아 포울스(198cm), 리즈 캠베이지(206cm) 등이 인 게임 덩크를 성공시켜왔다.
그러나 206cm의 그라이너만큼 파워풀하고 여유 있지는 않았다. 팬데믹 기간에 러시아에 억류되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그라이너는 뛰어난 탄력과 기동력, 농구 감각을 앞세워 WNBA와 세계무대를 평정한 스타다. 2014년 우승을 비롯, 득점왕 2회, 블록슛 1위 8회 등 숱한 영예를 품었다. 대학(2012년)은 물론이고 유로리그에서조차 우승을 거머쥐었고, 올림픽과 FIBA 월드컵에서도 2번씩 정상에 섰다. 미국 국가대표팀 유니폼을 입고서는 한 번도 져본 일이 없다. 2022년에는 댈러스 윙스의 아왁 쿠이어(196cm)가 홈경기 중 스틸에 이어 원 핸드 덩크를 꽂아 관중들을 기립하게 했다.
한국 여자농구는 어떨까. WKBL 기록 프로그램에서 덩크슛 시도를 검색하면 2명이 나온다. 마리아 스테파노바(전 KB스타즈)와 존쿠엘 존스(전 우리은행)다. 그러나 성공한 선수는 스테파노바가 유일하다.
203cm, 러시아 태생의 스테파노바는 2006년 6월 24일 당시 KB의 홈 경기장이었던 천안유관순체육관에서 치른 신세계 전 3쿼터에서 투핸드 덩크를 성공시켰다. 종료 5초 전, 스틸 이후 속공을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나온 여자농구 역사상 유일한 인 게임 덩크였다. 여자농구의 일대 사건. 스테파노바의 덩크슛에 대해 팀 동료였던 정선민은 어떻게 기억하고 있었을까. 정선민은 “놀랐다기보다는 ‘와~해냈네’ 정도의 느낌이었죠”라고 돌아봤다.
아니, 여자농구 최초의 덩크슛이었는데 겨우 그 정도 반응이었다고? 사연은 이렇다. 연습 때도 종종 봤기 때문에 놀랄 정도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키가 좋고 리치가 길어서 훈련 중에도 마무리할 때 종종 덩크를 하곤 했어요. 하지만 한국에 왔을 때 이미 나이가 있었기 때문에 경기 중에는 시도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남자선수들이야 타고난 탄력이 있지만 여자농구는 아니니까요. 스테파노바도 덩크슛 이후에 힘들어하는 게 보였습니다.”
정선민은 매서운 눈매와 달리 성격도 나긋나긋하고 생활도 잘했다고 회고했다. “터프하기는 삼성생명의 얀 바우터스가 더 터프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바우터스가 마지막까지 힘을 내면서 우리가 그 시즌 챔피언결정전에서 패했으니까요.”
정선민의 기억대로 KB스타즈는 챔피언결정전 시리즈를 5차전까지 끌고 가며 분투했지만 풀타임을 완벽히 소화한 바우터스를 당해내지 못했다. 결국 KB스타즈는 2승 3패로 패배, 플레이오프 우승의 기회를 훗날로 미뤄야 했다.
바우터스는 3차전 50초를 쉰 것을 제외하면 5경기를 모두 풀 타임 소화하며 활약했다. 그의 곁에는 박정은과 변연하, 이종애도 있었다. KB스타즈도 스테파노바가 많은 시간을 소화했다. 3차전에는 24득점 21리바운드로 대활약하기도 했다. 그러나 체력과 힘에서 밀리며 왕좌를 차지하진 못했다. 전체적인 선수 구성도 삼성생명이 더 두껍고 노련했다는 점도 이유였을 것이다.
경기를 뛰진 않았지만, 당시 우리은행 소속이었던 김은혜 KBSN 해설위원도 덩크슛 경기를 기억했다. 김은혜 위원은 “다들 덩크인지 몰랐어요”라고 첫 마디를 꺼냈다. “그냥 팍 꽂은 게 아니라, 림에 걸친 정도였으니까요. 하고난 뒤에야 ‘했네?’ 정도 반응이었죠.”
물론 이것도 충분히 대단한 시도다. 존쿠엘 존스도 우리은행 시절 덩크를 시도했지만 ‘덩크 시도’의 느낌을 확실히 주진 못했다. 박지수는 올스타게임에서 팬들을 위해 준비했지만 몸이 확실히 풀리지 않았고 덩크 훈련도 덜 된 탓에 미수에 그쳤다.
따라서 당장 정규리그에서는 인 게임 덩크를 보기 쉽지 않을 것이다. 무턱대고 뛰어올랐다 착지 과정에서 부상이 있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언제 한국 여자농구 무대에서 덩크슛을 다시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올스타게임에서라도 팬들을 위해 이런 작은 시도가 이뤄졌다는 것은 고마운 부분이 아닐까 싶다.
#사진_점프볼DB(문복주, 유용우 기자), WKBL 제공, KBL미디어가이드북
#신문 기사 출처_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Copyright © 점프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