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술과 과학]② 쌀 단백질 ‘1% 차이’, 술맛을 바꾼다

이종현 기자 2024. 2. 10.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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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진청과 국순당이 함께 만든 양조용 쌀 ‘설갱미’
밥쌀용 쌀보다 단백질 함량 적어 우리 술 빚기에 최적
술에 어울리는 쌀 품종 찾기 위해 토종쌀 복원하기도
쌀 깎는 도정은 입국 이용하는 일본 술에 적합한 방식
국순당은 대표 제품인 백세주를 양조용 쌀인 '설갱미'를 이용해 만든다. 설갱미는 농촌진흥청과 국순당연구소가 함께 오랜 시간을 투자해 만든 양조용 쌀이다./횡성=이종현 기자

지난달 24일 강원도 횡성 둔내면에 있는 국순당 양조장을 찾았다. 일주일에 한 번, 국순당의 대표 술인 백세주를 만드는 날이다. 국순당 양조장은 해발 500m에 자리를 잡은 탓에 주차장에는 미처 녹지 않은 눈이 가득했다. 차가운 바람을 피해 양조장 안으로 들어가자 은은한 약주 내음이 코를 찔렀다. 점심 때가 막 지난 시간이었지만 양조장은 쉴 틈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양조장 안내를 맡은 박민서 국순당 기업마케팅팀장은 “분당 600병씩 하루에 15만병의 백세주를 생산한다”고 말했다.

포장 라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자 양조장의 심장부가 나타났다. 발효실과 숙성실이었다. 한 병의 백세주가 소비자의 식탁에 오르기까지는 담금부터 발효, 숙성, 제성, 주입, 품질검사까지 모두 합쳐 18일이 넘는 시간이 필요하다. 25도의 온도에서 일주일을 발효한 뒤, 다시 저온 숙성을 거치면서 맛을 안정시키는 등 여러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발효실에 들어서자 막걸리와 약주의 진득한 내음이 섞여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취기가 오르는 기분이었다.

강원도 횡성군 둔내면에 있는 국순당 양조장. 일주일에 한 번, 하루에 15만병의 백세주를 생산하고 있다./횡성=이종현 기자

발효실 옆에는 술을 만드는 데 사용하는 쌀을 저장해둔 공간이 있었다. 거대한 쌀 포대 마다 새하얀 쌀이 가득한 가운데, 유독 포대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다른 쌀과는 확연히 다른 생김새와 색감이었다. 뽀얗고 불투명한 모습이 마치 하늘에서 내려오는 싸리눈처럼 보이기도 했다. 박 팀장은 “그게 바로 설갱미(雪粳米)입니다”라고 말했다. 눈길을 뚫고 횡성을 찾은 이유였다.

◇눈처럼 하얀 ‘설갱미’로 만드는 우리 술

우리 술의 주 재료는 쌀과 누룩, 물이다. 이 세 가지만 있어도 술을 빚을 수 있다. 이 중에서도 우리 술을 빚는 이들이 주로 신경을 쓴 건 누룩이었다. 누룩을 통해 술의 맛과 향을 좌우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쌀이나 물은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했다.

특히 쌀은 수입쌀이나 공공비축미를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가격이 싸기 때문이다. 2024년도 정부관리양곡 판매가격을 보면 수입쌀(단립종)은 1㎏에 1423.5원이지만, 국산 쌀인 햅쌀은 1㎏에 2679.7원이다. 수입쌀 가격이 절반 수준이다. 가격이 저렴한 쌀을 이용해 술을 빚다보니 쌀을 통해 술의 맛을 차별화하려는 시도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술을 빚는 용도로 생산하는 양조용 쌀 품종만 100여 개에 달하는 일본과는 차이가 크다.

하지만 우리 술에서도 다양한 맛과 향을 찾는 소비자가 늘면서 변화가 생겼다. 설갱미의 등장이 그 신호탄이었다. 설갱미는 농촌진흥청 작물시험장에서 1991년부터 육성을 시작해 2001년 품종을 등록한 쌀이다. ‘탁·약주 개론’은 설갱미의 특징을 ‘멥쌀인데도 일반 쌀 품종과 달리 전체적으로 전분립이 조밀하게 채워져 있지 않아 쌀알이 심백과 같이 희고 불투명한 상태로 관찰된다. 이러한 구조적 특성으로 흡수속도가 빠르고, 분쇄가 용이하다’고 적고 있다.

국순당이 백세주를 만들 때 사용하는 설갱미는 일반 쌀보다 쌀알이 희고 불투명한 게 특징이다. 구조적인 특징 덕분에 흡수속도가 빠르고 분쇄가 용이해 백세주 제조에 적합하다는 게 국순당의 설명이다./국순당

설갱미의 이런 특성에 주목한 농촌진흥청 작물과학원과 국순당 연구소는 함께 손을 잡고 설갱미를 양조용 쌀로 활용하기 위한 추가 연구를 진행했다. 2002년부터 시작된 연구가 결실을 맺은 건 2007년이었다. 국순당은 원래 찹쌀로 빚던 백세주를 이 때부터 설갱미로 빚기 시작했다.

설갱미의 어떤 특성이 국순당의 마음을 사로잡은 걸까. 설갱미 개발 과정에 직접 참여한 류수진 국순당연구소 부장은 “1992년 처음 백세주를 출시할 때는 찹쌀로 빚었고 약재의 향이 강한, 굉장히 진한 맛을 냈다”며 “하지만 우리 술에 대한 기호가 달라지고 소비자 입맛이 바뀌면서 지금은 가볍고 과실향이 나는 맛을 추구한다”고 말했다. 이런 변화에 걸맞는 쌀이 바로 설갱미였다.

설갱미의 특징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연구 결과가 있다. 농촌진흥청 국립식량과학원 연구진과 국순당 연구소 연구진이 함께 설갱미와 ‘추청’을 비교해 성분을 분석한 연구다. 추청은 일반적으로 밥을 해 먹는 쌀로, 양조용 쌀로 분류하지는 않는다. 연구 결과를 보면 쌀의 성분 중에 술의 맛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단백질 함량이 설갱미는 5%, 추청은 6%로 나왔다. 백설찰벼, 동진찰벼, 눈보라벼 등 다른 쌀에서는 단백질 함량이 7% 안팎으로 나오는 게 보통이다. 설갱미의 단백질 함량이 다른 품종보다 확연히 낮은 것이다.

류 부장은 “단백질의 고분자 펩타이드가 쓴맛을 만드는데 실제로 술을 담그면 이 ‘1%P’의 차이가 술 맛을 결정짓는다”며 “우리 술은 누룩을 사용하기 때문에 어차피 단백질이 첨가된다는 지적도 있지만, 술의 재료 비중에서 쌀이 차지하는 비중이 누룩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쌀의 단백질 함량이 중요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른 성분도 설갱미가 양조용으로 보다 적합하다는 결론을 보여준다. 아밀로스는 밥쌀용 쌀에서는 함량이 높지 않은 게 좋지만 술을 담글 때는 오히려 함량이 높아야 발효가 용이하고 알코올이 잘 생성된다. 설갱미의 아밀로스 함량은 19.8%로 추청벼(19.3%)보다 높다.

그래픽=손민균

한국식품연구원 우리술연구센터가 2010년 농림수산식품부의 의뢰를 받아 우리 쌀 20개 품종에 대한 막걸리 양조적성을 조사한 결과도 같은 결론을 보여준다. 우리술연구센터는 20개 품종 가운데 ‘신동진’과 ‘주남’ 두 가지 품종이 막걸리 양조에 우수하다고 평가했는데, 모두 단백질 함량이 5%대로 낮았다. 연구진은 “양조미로 적합하려면 발효가 용이하고 알코올이 잘 생성되도록 아밀로스 함량이 높으면서도 잡맛 내지 산패(酸敗) 원인이 되는 단백질과 지방 비율이 낮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토종쌀 막걸리 프로젝트…제2의 설갱미를 찾아라

우리 술에 적합한 쌀을 찾기 위해 농가와 양조장이 힘을 합친 사례도 있다. 경기도 양평군의 막걸리 양조장인 ‘C막걸리’와 토종쌀 복원을 하고 있는 우보농장이다.

지금은 쌀의 품종이 다양하지 않지만,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수천 가지 품종이 있었다. 지역마다, 동네마다 자신들만의 벼를 심고 키운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집필된 ‘조선도품종일람’에는 토종쌀 품종 1899가지가 기록돼 있다. 우보농장은 이런 토종쌀을 복원하고 보급하는 사업을 하고 있다.

C막걸리는 우보농장이 복원한 토종쌀을 이용해 막걸리를 만들었다. 그중에서도 작년 말에 진행한 첫번째 ‘토종쌀 프로젝트’가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다. C막걸리는 우보농장이 복원한 토종쌀 가운데 귀도, 한양조, 백팔미, 북흑조, 멧돼지찰 등 다섯 가지 품종을 이용해 막걸리를 만들었다. 최영은 C막걸리 대표는 “다섯 종류의 막걸리를 출시했지만 쌀의 품종만 다르고 제조방법과 다른 부재료는 동일하게 통일했다”며 “쌀의 개성에 따라 술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보여주기 위한 프로젝트였다”고 말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다섯 종류의 막걸리는 제조법과 레시피가 동일하지만 확연히 다른 맛과 향을 보여줬다. 쌀의 차이가 우리 술의 맛과 향의 차이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셈이다. 최 대표는 “쌀이 달라지면 술이 달라진다는 걸 사람들이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논리적으로 증명하는 시도가 그동안 없었다”며 “다음 단계는 쌀의 품종마다 어울리는 레시피를 찾고, 매년 작황에 따라 달라지는 쌀의 특성에 맞는 블렌딩까지도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경기도 양평의 C막걸리는 복원된 토종쌀을 이용해 막걸리를 빚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쌀의 특징이 잘 드러날 수 있게 레시피와 부재료는 통일했다./C막걸리
최영은 C막걸리 대표는 토종쌀을 이용해 막걸리를 빚으면서 쌀의 특성이 살아나게끔 레시피와 부재료는 통일했다. 왼쪽은 귀도와 멧돼지찰을 이용해 막걸리를 빚는 모습, 오른쪽은 북흑조와 한양조를 이용해 막걸리를 빚는 모습이다. 레시피와 부재료가 같지만 쌀의 품종에 따라 맛과 향이 확연하게 달라지는 걸 알 수 있다./C막걸리

국내에도 양조용 쌀 품종을 만들기 위한 연구와 노력은 계속 진행 중이다. 하지만 실질적인 성과로 이어진 건 국순당의 설갱미 정도다. 국순당도 제2의 설갱미를 찾고 있지만 10년 넘게 뚜렷한 결과물은 나오지 않았다. 류수진 부장은 “지금도 한국농업기술진흥원에서 개발 중인 특수미를 받아서 양조용으로 쓰기 위한 실험을 진행하고 있지만, 확실한 목적이나 테마를 잡는 게 쉽지 않다”며 “우리 술에 쌀을 쓰지 못했던 기간이 워낙 길었던 탓에 연구 결과가 많이 쌓여있지 않다”고 말했다.

우리 술 전문가인 이대형 경기도농업기술원 지방농업연구사는 우리 술에 맞는 양조용 쌀에 대한 기준을 먼저 확립하고, 그 이후에 양조용 쌀을 더 많은 농민들이 재배할 수 있도록 행정적·제도적 지원을 하는 게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이 연구사는 “양조용 쌀을 농민이 심었을 때 일반 밥쌀용 쌀을 심었을 때보다 소득이 약간이라도 높게 유지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양조장과 농민이 계약재배를 했을 때 정부에서 지원금을 준다거나 양조장에는 저리의 금액을 융자해주는 식의 당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연구사는 우리 술에 맞는 양조용 쌀에 대해 ‘단백질 적고, 다수확이며 밥쌀과 유사해야 한다’는 기준을 제시했다.

국순당은 횡성 지역 농민들과 약속재배(계약재배)를 통해 안정적으로 원료인 설갱미를 확보하고 있다. 횡성 지역 농민들이 다른 벼 대신 설갱벼를 심는 건 국순당이 그만큼 수익을 보장해주기 때문이다. 10년 넘게 설갱벼를 재배하고 있는 장영수(61) 횡성특수미영농조합법인 대표는 “국순당이 수매가를 최고가로 쳐서 수매해주기 때문에 농가 소득에 큰 도움이 된다”며 “설갱벼는 10월이 넘어야 수확이 가능한 만생종이어서 처음에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지금은 노하우가 쌓여서 최고 품질의 설갱벼를 생산하는 데 어려움은 없다”고 말했다.

류수진 부장은 “2002년에 처음 농촌진흥청에서 받은 설갱벼 종자가 5㎏에 불과했는데, 매년 재배 면적을 늘리면서 작년에는 200t의 설갱미를 받았다”고 설명했다.

경기도농업기술원도 양조용 쌀은 아니지만 우리 술에 어울리는 쌀 품종인 ‘보람찬’을 농가에 보급하는 사업을 진행했다. 이 연구사는 “양조장들은 기존의 쌀로 술을 만드는 데 어려움을 느껴본 적이 없고, 농민들은 새로운 품종을 재배하는 어려움과 부담을 느끼기 때문에 양조용 쌀이 잘 쓰이지 않는 것 같다”며 “이런 어려움을 해결해줄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쌀을 깎으면 술 맛이 더 살아날까

쌀의 성분은 단순히 품종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술을 만드는 과정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쌀에 담겨 있는 성분을 줄이거나 강화할 수 있다. 대표적인 방법이 ‘도정’이다.

도정률은 술의 원재료로서 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도정률은 벼의 낱알을 깎아낸 정도를 말한다. 일본의 사케를 빚는 데 쓰는 양조용 쌀은 밥쌀용 쌀보다 알갱이가 큰데, 지방이나 단백질이 많은 겉을 많이 깎아내기 때문에 알갱이 자체를 키운 것이다. 이대형 연구사는 “일본 술은 기본적으로 쌀에 곰팡이를 키우는 입국방식으로 효모를 중심으로 향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잡미나 잡향을 만들지 않기 위해 쌀을 깎는 쪽으로 연구를 많이 했다”고 설명했다.

국순당과 약속재배를 통해 설갱미를 키우고 있는 강원도 횡성의 한 들판. 국순당은 설갱미를 키우는 농가에게 높은 수매가를 보장해 안정적인 양조용 쌀을 얻고 있다./국순당

우리 술은 입국 방식의 일본 술과 달리 효모에 의한 향보다는 누룩과 쌀에 의한 향이 주가 되기 때문에 도정률에 따른 술의 맛과 향에는 큰 차이가 없다는 게 이 연구사의 설명이다. 다만 국내에서도 도정률에 따른 쌀의 성분 차이가 어떻게 술 맛으로 구현되는지 알아보기 위한 연구가 몇몇 있었다.

서울대 식품영양학과·생활과학연구소,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 배상면주가 공동 연구팀은 2012년 발표한 논문에서 쌀의 품종과 도정도, 누룩에 따른 막걸리의 품질 특성을 분석했다. 쌀의 도정률을 10%, 30%, 50%로 각각 달리한 뒤 막걸리의 품질을 비교했는데, pH와 총산 등은 별 차이가 없었지만 지방이나 단백질 함량은 도정도가 높아질수록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진은 “도정도가 높은 쌀을 원료로 하고 개량누룩을 사용해 막걸리를 담그면 품질이 우수한 막걸리를 제조할 수 있다”고 결론냈다.

서울벤처대학원대학교와 비앤에프솔루션 공동 연구진이 2021년 발표한 논문은 도정률을 8%, 20%, 50%로 나눠서 막걸리의 성분과 맛을 분석했다. 연구진은 “도정률이 높아질 수록 총산도와 유기산 함량이 낮아졌고, 관능검사에서는 도정률이 높아질 수록 색과 향미의 기호도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참고자료

한국산학기술학회, DOI : https://doi.org/10.5762/KAIS.2021.22.7.281

한국식품과학회지, DOI : https://doi.org/10.9721/KJFST.2013.45.6.714

한국식품영양과학회지, DOI : http://dx.doi.org/10.3746/jkfn.2011.40.8.1189

한국식품영양과학회지, DOI : http://dx.doi.org/10.3746/jkfn.2012.41.12.1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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