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경성]양력설? 음력설? 100년 끈 ‘二重過歲' 논쟁

김기철 학술전문기자 2024. 2. 1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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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라이브러리 속의 모던 경성]광복후에도 40년간 양력설 고수…1985년 ‘민속의 날’로 음력설 부활
100년 전 조선은 양력설을 지낼 것인지, 음력설을 지킬 것인지 혼돈상태였다. 1895년 양력 채택 후, 공식적으로는 양력설을 지켰으나 민간에선 음력설을 지키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총독부 권력으로도 바꿀 수없을 정도였다.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이연주

‘♦양력설을 치르고 나니까 또 얼마 안 있어 음력설을 맞이하게 되었다 ♦있는 사람은 일년에 몇백번의 설을 맞이하여도 조금도 고통이 없겠지만은 ♦없는 사람은 일년에 한 번 설을 치르는 것도 여간 큰 고통이 아닌데 ♦일년에 두 번씩은 참 못 견딜 일이야 ♦이러나 저러나 양력 그믐에는 모든 것을 음력 그믐에 다 미뤘으나 ♦얼마 안 남은 음력 그믐에는 또 언제로 미룬단 말인가? 오 이중생활의 고통이여.’(‘자명종’, 조선일보 1928년1월16일)

100년 전 신문을 들춰보면, 1년에 두번 새해를 맞는 혼란과 고통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끊임없이 나온다. 공식적으로는 양력설을 지키지만, 음력설이 여전히 대세였기 때문이다. 이른바 ‘이중과세’(二重過歲)문제였다.

◇음력설 맞아 생활고…음독, 할복 줄이어

두 번의 설날은 없는 사람들에겐 더 치명적이었다. 음력설 무렵이면 이런 기사가 실렸다. ‘여자는 음독, 남자는 할복-구력 설이 낳은 此 참극’(조선일보 1926년2월16일). 황해도 신천의 빈민 가정 참극을 다뤘다.

‘음력으로 마지막날인 2월12일 오후4시 황해도 신천읍내 훈련리 곽진규의 처 김씨(34)는 본시 넉넉지 못한 살림을 하던 중 음력설은 당하고 다른 사람은 설 준비 하노라고 떡을 준비하느니 무엇을 하느니 야단법석이나 자기 가정에서는 아무 준비도 못할 뿐만 아니라 집까지 없어서 남의 곁방을 빌어있던 바 이것을 비관하야 염산약 삼십구람을 먹고 죽으려 하였으나 가족에게 발견되어 즉시 읍내 해성의원 의사 최두현씨를 청하야 치료를 받은 결과 생명에는 별로 관계가 없다 하며 동일 오후 5시경에는 읍내 박촌 사는 장(莊)모가 자식들도 있고 가정의 불화도 없었건만 돌연히 자기 집에서 칼로 배를 가르고 죽었는데 이것도 역시 설날은 닥치고 생활난으로 말미암아 그와 같이 죽은 듯 하다더라.’

◇'치마 전당잡혀 애들 입에 떡국물’

‘치마를 전당잡혀 애들 입에 떡국물’(동아일보 1927년2월3일)같은 기사도 심심찮게 나왔다. 섣달 그믐날 오후6시 종로 서린동의 전당포를 취재하던 중, 열살짜리 꼬마가 동생을 데리고 나타났다. 전당포 주인에게 신문지에 싼 옥색 서양목치마 하나를 내밀며 ‘하다못해 20전이라도 달라’고 애원했다. 주인은 하찮은 치마를 잡고 돈을 내주기 민망했던 모양이다. ‘20전짜리 전당이 어디있나? 이것은 여기 두고 30전만 갔다드려라’하고 선심썼다. 자초지종은 이랬다. 아이들 어머니가 떡국이라도 끓여주려고 푼돈이라도 얻을 생각에 입던 치마를 들려 전당포에 보냈다는 얘기다.

설빔을 입고 세배다니는 아이들을 촬영한 조선일보 1926년2월14일자 사진. 음력설마다 설빔 입은 아이들 사진이 신문에 종종 실렸다.

◇혼란의 설날

‘조선 사람은 그러지 않아도 살 수가 없어서 걱정인데, 근년에 와서는 과세를 두 번 하기 때문에 더욱이 곤란하단 말이지. 양력설에는 상여금이니 무엇이니 받았으니 남과 같이 망년회한다고 두 번 세 번 요리집에를 가지 또는 신년을 만났다고 신년 연회이니 무엇이니 하여서 이럭저럭하면 쥐꼬리만큼 받았던 돈은 어디로 갔는지 없어지고 전에 저축하여 두었던 것까지 없어지니그것이 지나자마자 음력설이 또 닥쳐오니 어린 아이들과 부인들은 설빔해달라고 야단이지 습관에 의지하여 새해를 만났으니 떡도 좀 만들어야 하고 움파도 좀 사와야 할 터이지 그러니 돈은 자꾸 들어가고 생활은 곤란하여진단 말이야. 그런즉 우리도 하루바삐 어떤 설이든 지정하여 가지고 구력을 지내랴거든 신력을 보지 말고 신력을 지내랴거든 구력은 관계도 말아야 우리의 생활도 어떠한 기초를 세울 터이란 말이야. 이것은 신년에 만날 때마다 일어나는 걱정이란 말이야.’(’잔소리’, 조선일보 1923년1월4일)

양력설과 음력설 사이에 끼여 어려움을 호소하는 의견이 끊이지 않았다.

◇'양력설과 음력설 중 어느 것?’ 공개 질의

신문사에 ‘양력설과 음력설 중 어느 것을 지켜야하느냐’며 공개 질의하는 독자도 있었다. 기자의 답은 이랬다. ‘세계가 한 집안같이 지내는 이상 대세에 벗어나는 것은 결국 자기에게 손실을 끌어오는 것이나 다를 것이 없으니 물론 세계가 공통적으로 시행하는 양력과세를 하는 것이 당연 이상으로 당연할 것이올시다. 그러나 다만 오랫동안 구력을 지키던 습관상 아직도 양력설을 남의 설같이 여기는 것이니 하루바삐 옛 습관을 깨치고 새 길로 나서서 세계의 진운에 뒤떨어지지 않을 것이올시다(일기자)’(‘어느 설을 지켜야 옳습니까’, 조선일보 1926년1월2일)

‘계몽’과 ‘이성’을 앞세우던 시대다운 답변이었다.

◇양력 채택한 갑오개혁

양력설은 1895년 11월 갑오개혁때 양력을 채택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양력은 외국 관련 업무나 정부 업무에 한정됐을 뿐 농업 사회에 살던 대다수 사람에겐 농사절기와 맞는 음력을 따랐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도시 근로자, 학생, 공무원들이 늘어나면서 양력의 지배를 받는 계층이 늘어났다. 관공서나 학교, 회사는 양력에 맞춰 새해를 시작하고 양력설을 지키기 시작했다. 하지만 수천년 지켜온 음력설의 전통과 민속을 하루아침에 바꾸기란 쉽지 않았다. 음력설에 결근하는 직장인과 결석하는 학생들이 속출했다.

음력설을 맞아 때때옷을 입고 거리에 나온 아이들이 울긋불긋한 풍선에 눈길을 빼앗겼다. 음력설은 세뱃돈 넉넉한 아이들을 상대하는 풍선장수에게도 대목이었다. 조선일보 1929년2월11일자 만화

◇양력 설이 倭 설이라고?

‘이중과세’ 반대의 가장 큰 명분은 낭비였다. 양력설은 일본 풍습이란 반발도 있었던 모양이다. ‘북촌 일대의 과세(過歲) 기분이 농후하다. 경성보다 지방에서는 더욱이 음력설이 참설이라는 견해로 음력이 실행되고 있다. 그 반면에 양력설은 왜(倭)설이라는 생각, 즉 일종의 감정이 삽입하야 그를 배척하는 현상이다. 그러나 태양력에 의하라는 명령은 한국 정부에서 칙령으로 발포된 바인즉, 결코 왜설이라는 견해는 당치 못하다.’(‘이중의 과세’, 동아일보 1927년2월3일)

민족운동가 민세 안재홍도 양력설이 일본 풍습이라는 속설을 반박했다. ‘일본도 서양제도를 본받아 온 것이오, 조선도 이것을 고치자할 뿐’이라면서 ‘이런 세계적 제도를 채용하는 데는 그러한 명분론 같은 것은 너무 묵은 내나는 소리’라고 비판했다. 그는 ‘양력은 전(前)한국(구한말)시대부터 칙령으로써 발포하고 새로 시행하기로 한 것이니 그러한 의론이 더욱 이유가 안된다'며 양력설을 지킬 것을 주장했다.(’새해를 맞이하여서’3, 조선일보 1926년1월6일)

◇총독부의 이중과세 반대 캠페인

조선총독부는 1937년 12월 이중과세를 폐지하기 위해 대대적인 계몽운동을 펼쳤다.하지만 모래위에 물붓는 격이었다. 양력설을 지키는 사람이 늘어나긴 했지만 음력 설날은 여전히 대세였다. 총독부 권력으로도 음력 설날은 마음대로 할 수없었다.

광복 이후도 양력설날이 법정 휴일이었다. 정부는 1950년부터 양력 설만 인정, 1월1일~3일 사흘간 설 공휴일로 정했다. 1985년 음력설날 하루를 '민속의 날' 공휴일로 지정했고, 1989년부터 음력설 연휴가 3일로 확대됐다. 반대로 양력 설 연휴는 1991년 3일에서 2일로 줄었고, 1999년부터는 양력설 하루만 공휴일이 됐다. 광복후 30여년 양력설만 공휴일로 사흘간 쉬었고, 음력설은 휴일도 아니었다는 사실이 까마득한 옛일같다. 지금은 음력설 연휴 가장 붐비는 곳중 하나가 공항일 정도로 해외 휴가떠나는 시즌처럼 여기는 분위기도 있다. 격세지감이다.

◇참고자료

박수환, 근대 시기 양력 도입의 수용 양상과 갈등-이중과세 문제를 중심으로, 생활문물연구 27, 국립민속박물관,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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