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벌과 단죄가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젠더살롱]

2024. 2. 10.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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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참교육’ ‘사이다’가 시대정신인 세상에서 회복적 정의 말하기
학교폭력 피해자의 복수를 그린 드라마 '더글로리'는 지난해 한국 사회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넷플릭스 제공

강사 업계 최고 포상은 무엇일까. 높은 강의 만족도 평가? 고액의 강의료? 빠른 입금? 물론 모두 두 팔 벌려 환영이지만 지금까지 내가 경험한 최고의 포상은 강의가 끝난 후 참여자가 강사에게 다가와 질문을 하거나 따뜻한 응원을 남기는 것이었다. 착한 척, 순수한 척하는 게 아니다. 강사에게는 모든 강의 주제가 중요하지만 의무교육은 대부분 참여자가 바쁜 일정을 쪼개서 듣다 보니 한 귀로 흘리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더더욱 작은 반응과 질문마저 강사에게는 귀하다.

그런데 지난달 이 진귀한 경험을 두 번이나 했다. 해당 강의 수강생들은 모두 법원에서 교육 수강명령을 받아 그 자리에 오게 된 성범죄 가해 청소년이었다. 이들을 만난 건 지난해부터다. 한 기관을 통해 가해자 재범방지 교육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남성성과 남성문화에 대해 교육할 기회가 생겼다. 이번으로 벌써 여섯 번째인데 이상하리만큼 이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에서는 꼭 그런 소감을 듣곤 했다. 지난해에는 ‘자신이 여기 오기 전에 이런 교육을 들었으면 다르지 않았을까’라는 소감을 남긴 학생이 있었고, 올해는 다른 학생들이 밥을 먹으러 우르르 나가는 동안 묵묵히 기다렸다가 슬쩍 다가와 진심을 담아 "정말 인상 깊은 시간이었다"고 말해준 학생이 있었다.


‘단죄’가 시대정신인 시대, 이대로 괜찮을까?

참교육과 사이다, 정의구현이라 이야기되는 ‘단죄’가 시대정신인 세상이다. 잘못하면 죗값을 치러야 하며 그것이 충분하지 않다고 여겨질 때는 사적 제재마저도 용인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온라인에는 ‘논란’을 빙자한 마녀사냥과 조리돌림이 즐비하고 너 나 할 것 없이 재판관이 돼서 ‘악행’을 응징하기 바쁘다.

이런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인과응보는 오랜 세월 수많은 문명권에서 법의 근간이 됐고 세상 각종 서사의 핵심이었다. 성폭력에 유난히 관대하고 처벌 기준조차 까다로운 우리 사회에서 현실과 괴리된 처벌 수준에 변화는 필요하다. 그러나 지난 시간 눈을 반짝이며 소감을 남겼던 그 학생을 떠올리면 누군가를 재기불능의 존재로 만드는 말이 무겁게 다가온다.

다시 말하지만 처벌이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행동에 따른 응당한 책임은 필요하다. 하지만 그 책임의 범위는 어디까지이며 수위는 어떻게 정할 수 있을까? 게다가 우리 일상에서는 사법적 처리로 해결하기 어려운 일들이 더 많은데 그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과연 이런 방식이 실질적으로 문제를 예방하거나 해결할 수 있을까?

한국일보 자료사진

사람 셋이 모이면 갈등은 생긴다

세상에 문제없는 조직은 없다고, 크고 작은 조직을 거치며 다양한 문제 상황을 접했다. 대개 갈등이 그렇듯 피해자와 가해자를 명확히 나눌 수 없는 경우가 많았고 사법적 조치도 어려웠기에 비상대책위원회 같은 것을 열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하지만 많은 경우 복잡한 이해관계와 관점의 차이로 인해 가해자가 누구인지 시시비비만 가리다 엎어지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특히 작은 조직에서는 기껏 처벌을 결정해도 가해자로 지목된 이가 조직을 떠나버리면 그만이었다. 피해 입은 사람은 두 번 세 번 자신의 피해를 증명하는 과정에서 소진되기 일쑤였고 상대가 진정 어린 사과 없이 떠나버릴 때 한 번 더 좌절을 경험했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무기력하다고 느껴질 때쯤 ‘회복적 정의’를 알게 됐다. 회복적 정의는 단지 처벌만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응보주의의 한계에서 벗어나 공동체 구성원의 참여로 치유와 피해 회복을 도모하는 철이다. 회복적 정의의 선구자 하워드 제어는 그저 가해자를 찾아 처벌하는 데에만 급급했던 사회 풍토를 지적하며 ‘단순히 세상에 존재하는 해악과 고통의 양을 증가시키는 것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돌이켜 보면 우리는 대부분 사건 해결 과정에서 가해자 처벌만 이야기했지 피해 입은 사람은 관심 밖이었다. 아니 피해 돌봄은커녕 도리어 가해자의 처벌과 가해 행위 증명을 위해 피해자의 태도와 행실을 물어뜯으며 상처를 키우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그로 인해 어떤 이들은 문제를 인식하더라도 사회적으로 자신의 피해가 충분하지 않다고 여겨질까 염려해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결국 문제는 봉합할 수 없을 만큼 커진 이후에나 터져 나왔다. 예방과는 거리가 먼 방법이었다. 정말 다행히 가해 행위가 인정돼 가해자가 처벌받아도 그게 꼭 피해자의 일상 회복과 연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도리어 가해자는 처벌받았으니 됐지 않았냐고 큰소리치고 다니며 피해자를 불안에 떨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그렇게 개개인의 잘잘못을 따지는 것으로 문제가 이야기될수록 조직의 문화, 공동체 구성원의 책임은 옅어져 2차 가해가 자라기 쉬운 토양이 되곤 했다. 피해 회복과도 거리가 멀어 보였다.

게다가 가해 행위자가 악마의 탈을 쓰고 의도적으로 악행을 저지르고 다닌다면 차라리 속 시원하게 영원히 격리해서 처벌하자고 하겠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그보다 자신의 위치성을 망각하거나 소통에 서툴러서, 행동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해서 등 다른 연유로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사람들을 다 배제, 격리하는 게 능사일까?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기도 하거니와 결국 그렇게 한 조직에서 배제된 사람이 다른 조직에서 똑같은 문제를 저지르게 된다면, 사회 전체적으로 봤을 때는 결국 폭탄 돌리기가 될 뿐이다. 예방도, 피해 회복도, 가해자 반성도 요원한 처벌 중심의 사고와 담론에 변화가 필요하다.


폭력예방교육, 처벌에서 회복적 정의로

어떤 이들은 가해자에 관심 갖는 것 자체에 거부감을 느낀다. 그러나 가해자에게 괜한 서사를 부여해 책임을 회피하는 것은 문제지만 다시 문제가 발생하지 않기 위해서 가해가 일어난 배경과 맥락을 살피는 것은 꼭 필요하다.

그런 차원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처음 해야 할 일은 공동체의 문화나 시스템을 점검하는 것이다. 평소 성차별적인 말이나 성별 고정관념에 기인한 의사결정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는지, 수직적이고 권위적인 위계질서로 인해 사전에 문제를 이야기할 기회를 잃어버리지는 않았는지 살필 수 있어야 한다. 일례로 내가 처음 경험한 조직이 그랬다. 그곳에서는 갓 입사해 뭘 잘 알지도 못하는 나에게 ‘이한님’이라는 호칭으로 존중해 불러줬고 회의에서도 기꺼이 의견을 물어봐줬다. 대개 “야! 넌 저기 가서 따라다니면서 일 배워!” 정도의 이야기만 듣고 살아오던 내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 덕분에 불편하거나 고민되는 일이 있을 때 불만이 쌓이기 전에 더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문제는 발생할 수 있다. 많은 경우 조직은 그 책임을 누군가에게 떠넘기고 손절한 뒤 다시는 언급하지 않고서 문제를 해결했다고 말했다. 그러다 보니 실무진들은 문제를 예방하는 실질적인 방법을 찾기보다 책임을 전가하는 데 더 공을 들였다. 우리는 문제를 예방하는 것만큼이나 사후 대처 능력 역시 키워야 한다. 이를테면 ‘사후 보고서’를 작성하는 방법이 있다.

2022년 카카오 서비스가 며칠간 먹통이 됐다. 우리나라 국민들 대다수가 이용하는 서비스였기에 그 피해는 어마무시했고, 나 역시도 대부분 강의 소통을 카카오 메일로 했기에 당혹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당시에는 투덜거리며 욕하기는 했으나 이후 카카오에서 발행한 ‘다짐 보고서’는 흥미로웠다. 문제 원인 분석부터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까지 문과인 내가 봐도 어느 정도 알 수 있게 쉽게 전했다. 문제 해결에서도 이런 과정이 필요하다. 왜 그런 갈등이나 문제가 발생했는지, 피해 당사자가 일상을 회복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공동체 구성원이 함께 이야기 나눠야 한다. 이 기록은 느리고 아플 테지만 문제 원인을 파악해 재발을 방지하고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 이런 기록들이 쌓여 공동체를 더 건강하고 안전하게 만들 수 있다.

그 외에도 틈틈이 교육을 진행하고 함께 약속문을 만들어볼 수 있다. 소통창구가 원활히 작용하게끔 주기적인 만남의 자리를 열어봐도 좋다. 회복적 정의 교육에서는 서로 둥글게 앉아 안전하고 수평적으로 소통하는 서클을 활용하기도 했다. 무엇이든 좋다. 지금까지 처벌만 이야기하느라 방치된 피해를 회복하기 위해서도, 자신의 과오를 딛고 더 나아지기 위해 노력하는 그 소년들을 위해서도 이제는 변화가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마지막 한 명까지 포기하지 않는 용기가 필요하다.

편집자주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문화를 읽습니다.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 활동가인 이한 작가와 김신현경 서울여대 교양대학 교수가 번갈아 글을 씁니다.

이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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