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시민'의 모순, 한동훈은 정치를 개혁할 수 있을까?
"이건 포퓰리즘이 아니다. 이런 포퓰리즘이라면 나는 기꺼이 포퓰리스트가 되겠다."
지난 7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본인이 제시한 '국민의힘 정치개혁 시리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본인의 개혁안과 관련 "(일부 여론조사에선) 60%에 이르는 압도적 지지가 확인될 정도로 진영을 초월한 국민적 요구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지난달 25일 정치개혁 긴급좌담회에서도, 그 전날 숭실대 현장간담회에서도 같은 말을 남겼다. "대다수 국민이 수십 년간 바라온 것을 하는 게 포퓰리즘이라면, 기꺼이 포퓰리스트가 될 것"이라고.
앞서 한 위원장은 △재판지연 국회의원의 금고 이상 형 확정 시 세비반납 △국회의원 불체포특권 포기 △국회의원 정수 50인 축소 △당 귀책으로 인한 재보궐 선거구 무공천 원칙 △출판기념회를 통한 정치자금 확보 금지 등 5가지 정치개혁안을 국민의힘 정치개혁 시리즈로 공약했다. 세비반납 등 항목에 대해서도 법적인 논란이 있었지만 논란이 단연 극심했던 개혁안은 역시 의원정수 축소안이다. 더불어민주당을 포함 야권은 해당 안이 '정치혐오 심리에 기댄 포퓰리즘'이라는 반박을 내놨다.
국회의원의 특권을 줄이기 위해 국회의원 수 자체를 줄이자는 이야기가 개혁보단 모순에 가깝다는 것을 굳이 새롭게 논증할 필요는 없다. 의원정수 축소안은 한 위원장 본인이 "새로운 것은 아니"라 말할 만큼 고루한 이야기다. 10년도 더 전 안철수 의원이 해당 이야기를 꺼냈을 때도, 바로 지난해 김기현 전 국민의힘 대표가 해당 이야기를 꺼냈을 때도 비판의 결은 비슷했다. 한국의 인구 대비 국회의원 수는 OECD 평균에도 미치지 못하며, 정수 축소 시 외려 비례대표의 비율만 축소시킬 수 있다는 현실적인 문제도 있다.
고(故) 노회찬 의원은 2012년 당시 안철수 의원이 국회의원 정수 100명 축소를 주장하자 "마치 학교폭력을 줄이기 위해 학생을 줄이겠다는 얘기와 같다"는 비유를 내놓기도 했다. 학생 수 축소가 학교폭력의 대안이 될 수 없듯, 국회의원 정수를 줄이는 것이 '친윤 초선'이나 '개딸 정치'의 대안이 될 수 없다. 한 위원장이 "정식 안건이 아니라 개인적 생각"이라 밝힌 국회의원 세비 축소가 오히려 현실적으로 개혁에 도움이 될 만 하다. 그마저도 국회의 생산성을 실효적으로 올릴 수 있는 보완안이 필요하다.
문제는 방향성이다. "여의도 사투리"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본인의 정치초보 이미지를 혁신으로 전유해온 한 위원장은 혁신의 의지만을 피력할 뿐 개별적인 정치 이슈와 관련해서는 그 의지의 일관성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당장 민주당이 '국민의 지지'를 명분으로 정부여당을 압박하고 있는 '김건희 리스크'가 떠오를 수밖에 없다. 본인 공약과 관련 "국민적 요구"를 강조해온 한 위원장은 김건희 리스크와 직결된 대통령 지지율에 대해서는 "저는 국민을 평가하는 사람이 아니고 국민의 평가를 받는 사람"이라며 답을 피했다.
선거제에 대한 입장도 마찬가지다. '국민의 지지'를 들어 의원정수 축소안을 가지고 민주당을 압박하지만, 오랜 국민정서로 자리해온 거대양당에 대한 환멸과 관련해선 말을 아낀다. 병립형과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사이에서 갈팡질팡한 민주당을 비판하면서도 준연동형제의 본 취지인 양당제 타파에는 침묵한다. 애초 "국민의 민의를 더 정확하게 반영"하기 위해 병립형을 주장한다는 말은 민의의 창구인 의원 정수를 줄이겠다는 발상과도 충돌한다.
이 같은 의제들에 대해선 같은 당 윤재옥 원내대표의 답변이 오히려 눈길을 끈다. 윤 원내대표는 김건희 특검법과 관련 "여론이 그렇게 나오면 저희들이 이 법의 문제를 상세히 알려드릴 것"이라고, 선거제와 관련해선 '다당제는 지금의 정치체제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직격했다. 특검과 다당제에 대한 동의 여부를 떠나, 정치의 전제는 다수주의가 아닌 설득에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으로 더 적합한 대답이다.
정치가 행해야 할 설득엔 당연히 다양한 요소가 고려되어야 하고 "국민적 요구"도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문제는 개별 사례에 따라 그 요소들을 입맛에 맞게만 활용한다는 점이다. 한 위원장이 취임 이후 가장 강조하는 키워드 중 하나인 "격차 해소"는 어떤가. 한 위원장은 중대재해처벌법유예안과 관련해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격차"를 고려해야 한다고 역설했지만, 애초 중대재해법의 취지인 '기업과 노동자 간 격차'에는 침묵했다. 전자보다 후자의 격차가 압도적으로 큰데도 말이다. 국민의힘이 제시한 '2년 유예, 2년 뒤 산안청 설치' 최종 협상안엔 유예 2년간의 대안이 부재한다.
다시 정치개혁으로 돌아오자. 의원정수 축소에 비해 큰 관심을 받진 못했지만, 한동훈표 1호 정치개혁 공약인 '재판지연 의원의 형 확정 시 세비반납'과 그가 개인적인 제언이라 언급한 '국회의원 세비 국민 중위소득 수준으로 축소'에는 한 위원장의 정치적 모순을 설명할 만한 실마리가 담겨 있다. "이런 포퓰리즘이라면 나는 기꺼이 포퓰리스트가 될 것"이라며 '국민 눈높이'를 강조한 것과는 상반되게도, 해당 안들에 대한 한 위원장의 설명에는 짙은 엘리트주의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의원 세비반납과 세비축소 모두 논의의 여지가 있는 주제들인 것은 맞다. 상술했듯 보완책에 따라 실효적인 개혁을 불러올 여지 또한 있다. 다만 한 위원장은 세비축소에 대한 주장을 펼치며 "단순한 직업이 아니라 국민에 대한 봉사, 헌신을 위해 (국회의원으로) 나서는 것이기 때문에" 그 세비가 과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일견 맞는 말이지만 노동이 빠졌다. 의원의 노동에 어느 정도의 가치가 매겨져야 하느냐, 그것을 누가 어떻게 결정하느냐가 아닌 '신성한 직업의식'을 강조한 셈이다.
재판지연 의원의 형 확정 시 세비반납안과 관련해서도 노동에 대한 보수 측면에서 법적인 논란이 있다. 재판이 지연된 기간 동안 의원이 노동을 했다면 법적으로 그 노동에 대한 보수(세비)는 지급될 수밖에 없다. 이는 형 확정 시의 세비지급 중단, 혹은 국회의원의 특권처럼 활용되는 재판지연을 미리부터 방지하자는 것과는 다른 얘기다. 국민에게 헌신하고 봉사하고 모범을 보이는 것은 분명 정치인의 미덕이 돼야 하겠지만, 그 미덕을 갖추기 위해 규칙을 강화하자는 것과 법적으로 특정 직군의 노동을 특별 시하는 것도 다른 얘기다.
의원정수를 축소하고 국회의원의 세비를 조정하자는 안은 모두 국회의원에 대한 세간의 불만에 소구하는 포퓰리즘적 성격을 품고 있다. 다만 이를 연결할 때 나타나는 것은 역설적으로 '소수 정예의 엘리트가 정치를 올바르게 끌고 가겠다'는 엘리트주의적 포부다. 위험한 발상이지만 '누가 봐도 엘리트'인 한 위원장의 이미지가 여기에 겹치니 대중의 호응도는 어쩌면 높을 수밖에 없다. 다만 그것이 민주당에 대한 비호감도와 관계없이 국민의힘 또한 정치적 구태에 해당한다는 보는 여론까지 뒤집을 순 없다.
한 위원장과 국민의힘 사이의 '지지율 디커플링'은 한 위원장의 이 '엘리트 포퓰리즘'이 기존 국민의힘의 이미지와는 끝내 연결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당보다도 진보적"이라 자평하는 한 위원장 체제 국민의힘이 시민사회의 호응을 받지 못하는 이유도 이와 같다. 진보적이지도 개혁적이지도 못했던 정부·여당의 과오엔 침묵하는 선택적 포퓰리즘은, 그 과오에 동의하지 못하는 수많은 '동료시민'들에게까지 소구력을 갖추진 못한다. 이를 인정하지 않는 이상 한 위원장이 강조하는 '진심'도 결국은 반쪽짜리 동료의식이다.
이 '한동훈표 개혁'의 답보 상태에서 한 위원장은 가장 쉬운 길을 택한 듯 보인다. 상대 당인 민주당, 이재명 대표와 "86세력"을 공격하는 길이다. 취임하며 내세운 ‘운동권 특권 정치 청산’은 취임 한 달여가 지난 현재 한 위원장이 말이 막히는 순간마다 꺼내드는 마법의 단어가 됐다. "유능하고 준비된 분들이 대한민국에 많이 계시다. 그분들이 사회를 이끌어 나가는 것을 운동권 특권 세력이 막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엔 '유능하고 준비된 국민의힘'과 '운동권 특권 세력 민주당'으로 구분되는 관념정치다.
김건희 리스크에 대한 방어적인 태도도, 위성정당을 비판하면서도 위성정당을 창당하는 모순도 모두 운동권 특권 세력인 민주당을 이기기 위해서라는 말로 정당화된다. "혐오의 언행을 하는 분은 우리 당에 설 자리가 없을 것"이라면서도 1호 영입인재 박상수 변호사에 대한 여성혐오 논란이 제기되자 "거기(민주당)는 '피해 호소인' 이런 말을 하는 분들이 아닌가"라는 반응이 튀어나온다. 같은 논리라면 '여성가족부 폐지' 일곱 글자를 페이스북 1호 공약으로 내세워 혐오정치를 담금질한 정부·여당에게는 설 자리가 있을까.
많은 경우 포퓰리즘은 그 정치의 대상을 선택하고 반대급부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2016년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는 특정 계급 백인 남성들의 지지 속에 이민자 등 사회적 소수자를 배제했다. 지난 대선 국면에서 윤 대통령은 청년세대를 남성의 이름으로 호명, 선거 막판 민주당으로 몰린 여성결집 현상에 서늘한 한방을 먹으며 최소승리를 달성했다. 한 위원장의 "개혁"은 다르길 바란다. 국민 눈높이라는 명분 뒤에서 지지층 결집에 손을 내미는 모순적 방식으론 정치를 개혁할 순 없다.
[한예섭 기자(ghin2800@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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