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엔튜닝] 텍스트형 인간의 기타 코드 외우기
[도도서가 = 북에디터 정선영] 콜린 파렐 주연 2012년 영화 <토탈리콜>에는 주인공이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템페스트’를 연주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곡은 거짓 주입된 기억으로 살던 주인공이 삭제된 과거 기억을 찾기 위해 애쓰다가 포기하려던 그때 찾아온다.
주인공 더그 퀘이드는 자신을 쫓는 보안요원을 피해 과거에 살았던 아파트를 찾는다. 온 집 안을 샅샅이 뒤져도 자신의 과거에 대한 단서를 찾지 못해 괴로워한다. 우연히 피아노 앞에 앉았다가 건반 하나를 누르는데 마치 무언가에 씐 듯 손가락이 연주를 한다. 스스로도 놀라 입을 벌린 채 너털웃음을 짓다가 이내 다시 ‘템페스트’를 연주한다. 더그가 비로소 자신의 기억, 나아가 정체성을 되찾는 트리거가 된다.
최근 우연히 이 장면을 다시 보곤, 더그처럼 기억을 잃는다면 지금 내가 연습하고 있는 곡을 기타로 연주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단언컨대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영화처럼 누가 내 기억을 지운 것도 아닌데, 나는 한창 연습 중인 곡의 코드도 틀릴 때가 많다.
몇 주 전에는 “D코드 잡아보세요”라는 기타 선생님 말에 우왕좌왕한 일도 있었다. 한동안 왬!의 <라스트 크리스마스> G-Em-Am7-D7 코드만 연습했더니 다른 코드를 까먹었다.
전문가에 따르면 인간 기억(메모리)이란 여러 신경회로가 같이 작동하는 복잡한 기능이다. 기억은 등록-저장-회상(리콜)의 과정을 거치는데, 이 중 한 부분이라도 불완전하면 기억장애가 나타난다. 기억은 단기기억과 장기기억으로 나눌 수 있는데, 단기기억이 장기기억이 되기 위해서는 반복 수행, 연습 등을 통한 장기간 강화에 의한 저장 과정이 필요하다.
지금의 나는 하루만 기타 연습을 건너뛰어도 코드를 잡은 왼손이 어색하다. 처음 코드를 잡았을 때 내 손가락이 이런 모양을 만들어낼 수도 있구나 싶었다. 1년이 넘은 지금도 코드를 잡은 손은 쉽게 어색함을 털어내지 못한다.
메이저 코드 7개를 외우는 데는 두 달 가까이 걸렸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머리가 나쁜 건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 의심은 새로운 코드를 하나 배울 때마다 짙어진다. 하나를 배우면 하나를 까먹는 일이 예사다. 단박에 코드를 잡아내는 일은 정말 가뭄에 콩 나듯 있다. 딴에는 매일같이 기타 연습을 해도 아직 단기기억이 장기기억으로 전환되지 않은 게다.
기타 줄 위에서 반복적으로 손가락을 움직여봐도 코드를 외우지 못하니 아무래도 학습 방법에 변화가 필요한 게 아닐까. 하여 종이에 줄 6개를 긋고, 각 코드 손가락 포지션을 온점으로 그려보았다. 기타 줄 위에 반복적으로 손을 올려놓아도 몸에 잘 각인되지 않으니 이렇게라도 해보는 수밖에.
종이에 펜으로 반복해서 그리다 보니 왼손 코드가 머릿속에도 조금씩 따라 그려지는 것 같다. 진작 이렇게 해볼걸. 누가 보면 참 멍청해 보이는 방법일지 몰라도, 코드 하나하나가 머릿속에 조금 더 강하게 기억되는 듯하다. 역시 나는 텍스트형 인간이다. 어려서부터 몸 쓰는 일엔 꽝이었단 걸 잊고 있었다.
그 옛날 학창 시절처럼 나는 내게 맞는 학습 방법을 찾아가는 중이겠다. <토탈리콜>의 더그처럼 내 안의 저 심연 깊은 곳에 음악이 각인될 때까지 얼마나 걸릴까. 그게 언제가 되든 오래 걸린 만큼 오래 기억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정선영 북에디터. 마흔이 넘은 어느 날 취미로 기타를 시작했다. 환갑에 버스킹을 하는 게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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