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심서 뒤집힌 SK·애경·이마트 가습기 살균제 판결, 1심과 '이것'이 달랐다

이근아 2024. 2. 9.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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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소심, 13년 만 SK·애경·이마트에 첫 유죄
①인과관계 ②공동정범 ③업무상 과실 인정 
기업 측 상고… 피해 회복은 즉각 안 이뤄져
지난달 11일 서울 서초구 서울고법 앞에서 열린 가습기 살균제 선고공판 기자회견에서 한 참석자가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의 발언을 들으며 눈물을 훔치고 있다. 뉴시스

가습기 살균제 제조·판매 기업인 SK·애경·이마트 임직원에게 마침내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 2011년 가습기 살균제 피해가 세상에 알려진 지 13년 만에 SK·애경·이마트에 처음으로 내려진 유죄 판결이다. 2019년 검찰이 기소한 지 5년 만의 결론인데, 해당 제품들은 2016년 첫 수사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가 2018년 재수사가 이뤄졌다.

문제는 이들이 제조한 '가습기 메이트'와 '이마트 가습기 살균제'에 포함된 클로로메틸이소치아졸리논(CMIT) 및 메틸이소치아졸리논(MIT) 성분이다. 이 성분들은 앞서 유죄를 선고 받아 이른바 '가습기 살균제 사망 사건'의 대명사로 여겨지는 옥시 제품에 포함된 성분과는 다르다. 옥시 제품에는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염화에톡시에틸구아니딘(PGH) 성분이 포함됐다.

서울고법 형사5부(부장 서승렬 안승훈 최문수)는 지난달 11일 업무상 과실치사 등 혐의로 기소된 홍지호 전 SK케미칼 대표와 안용찬 전 애경산업 대표에게 각각 금고 4년형을 선고했다. 1심 무죄를 뒤집은 판결. 그 뒤엔 과학적 실험에 대한 재판부의 서로 다른 판단이 있었다. 한국일보는 278쪽에 달하는 2심 판결문을 통해 유무죄를 가른 결정적 차이들을 짚어 봤다.


①"실험 편향" 의심한 1심 뒤집은 2심

클로로메칠이소치아졸리논(CMIT)·메칠이소치아졸리논(MIT)이라는 성분으로 만든 제품 '가습기메이트'. 뉴스1

항소심이 1심과 결정적으로 달랐던 건 관련 연구들에 대한 판단이었다. 1심 재판부는 당시 20여 건의 연구를 근거로 CMIT/MIT와 폐질환·천식 간 인과관계 입증에 성공한 과학실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봤다.

특히 동물실험을 바라보는 시각이 눈에 띈다. 1심 재판부는 쥐를 이용한 초창기 급성 또는 아만성 흡입독성시험결과 등에서 PHMG 또는 PGH와 유사한 실험결과가 나타나지 않은 것을 근거로 CMIT/MIT 성분이 사람에게 폐질환이나 천식을 일으키거나 악화시키기에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동물실험에서 인과관계가 나오지 않았다고 해서 사람에게도 상해 또는 사망의 결과가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단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재판부는 연구자의 편향성이 개입될 여지를 지적한다. "가설에 부합하지 않는 결론이 나오면 농도를 비현실적 수준까지 높이는 등 시험을 계속해 왔다"는 것이 근거가 됐다.

2심 재판부는 1심에 대해 "사람과 쥐 간 종간 차이를 종합적으로 고려하지 않은 평가"라고 지적하며 판단을 뒤집었다. 동물실험 결과는 간접적이고 보충적인 성격일 뿐인데, 이를 해석하는 데에 있어서 전문가들이 제시한 과학적 의미를 간과했다고 봤다. 종간 차이는 물론 실험실 환경과 실제 사용환경 간 차이마저도 반영하지 못한 판단이었다는 의미다. 1심 판단 이후 나온 실험 결과도 반영해 CMIT/MIT와 폐질환 사이 인과관계를 인정했다.


②"옥시와 공동정범" 판시한 2심

지난달 11일 안용찬 전 애경산업 대표가 서울 서초구 서울고법에서 열린 '가습기살균제' 관련 항소심 선고공판이 끝난 후 법원을 나서고 있다. 뉴시스

1심은 무죄 근거 중 하나로 대부분의 피해자가 PHMG 성분 가습기살균제를 함께 사용했다는 점을 들었다. 그래서 피해의 원인이 CMIT/MIT 성분에서 비롯된 것인지 확실하게 규명이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옥시 등 제품과 SK·애경·이마트가 공동정범 관계에 있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제조업자들이 영업비밀이라는 이유로 성분을 공개하지 않아 소비자들이 성분상 차이를 알고 구매하는 것이 어렵다"고 꼬집었다. 더구나 여러 종류의 제품을 사용한 피해자들에게 피해가 발생했을 때 그 결과 발생에 대한 기여 정도를 일일이 가려낼 수 없단 점도 강조했다. 재판부는 "그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행위자(기업)들에게 공동의 주의의무를 부과시키는 게 형사정책적 목적에도 타당하다"고 강조했다.


③업무상 과실 꼬집은 2심

재판부는 유공(SK이노베이션의 전신)이 1994년 독성 시험을 해야 한다는 내부 의견을 무시하고 CMIT/MIT 성분 제품을 처음으로 출시한 점도 주목했다. 그해 10월 서울대 수의학과에 실험을 의뢰했지만 그 최종보고서가 나오기 전 가습기 살균제를 출시했는데, 당시 수의과대 실험보고서에는 "마우스를 상대로 6개월간 흡입노출시킨 결과 백혈구 수치 감소 등 변화가 나타났는데 표본 수가 적어 더 많은 동물 실험을 실시해 정확히 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적혀 있었다. 그럼에도 그 이후 어떠한 실험도 진행되지 않았다. 재판부는 "제품을 제조·판매하는 회사의 임직원들로서 출시 전 요구되는 안전성 검사를 이행하지 않았고 제품출시 후 요구되는 관찰의무를 이행하지 않아 피해를 확대시켰다"고 질타했다.


가까스로 유죄… 피해 회복은 '먼 길'

"사실상 장기간에 걸쳐 전 국민을 상대로 만성 흡입독성시험이 행하여진 사건"
2심 판결문 중에서
가습기 살균제 피해 유족 및 폐암환자 등 피해자, 그리고 환경시민단체 회원들이 지난달 16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가습기 살균제 가해기업 형사재판 2심 판결 관련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시스

법원은 이번 항소심 판결이 "만일 그때로 다시 돌아갔더라도 달리 행동할 수 있었을까?"라는 의문에 대한 답변이라고 설명했다. 법리적으로 피고인 측이 주장하는 업무상 과실 또는 인과관계를 부정하는 논거가 되는 예견가능성에 관한 문제가 이 판결의 핵심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정부에서 공식 인정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는 5,667명, 이중 사망자만 1,258명에 달한다. 항소심 재판부는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은 신체적 피해뿐만 아니라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거듭 호소하고 있다"면서 "피해 원인 규명 과정에서 국가·사회적 비용이 소요되었을 뿐 아니라 현재까지도 피해의 완전한 회복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다만, 1심 판결을 단순히 재판부의 '잘못'으로 보긴 어렵다. 피해 입증 책임이 오롯이 피해자에게 있는 상황에서 국가의 외면 또는 묵인, 대기업의 책임 회피 등이 버무려진 결과이기 때문이다. 송기호 변호사는 "1심 판결은 검찰의 미진한 수사와 기업 책임을 뒷받침할 (인과관계를 밝히기 위한) 국가적인 연구가 부족해 나온 결과였다"면서 "무려 11년간 대기업, 검찰, 국가가 함께 가습기 살균제 문제를 왜곡해 온 것"이라고 꼬집었다.

법원은 6일 처음으로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에 대한 국가 배상책임을 인정하면서 국가가 가습기 살균제의 독성에 대해 더 검토할 책임이 있었다는 점을 짚었다. 피해자들의 피해가 온전히 회복될 수 있을까. 최근 가까스로 유죄를 선고받은 SK·애경·이마트 측은 상고했다. 피해자들의 피해 회복이 또 한 차례 지연된 셈이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라고 했다.

이근아 기자 ga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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