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추는 영혼, 숨쉬는 영원…시공 너머에서 반짝이다[정우성의 일상과 호사]
남자가 밤마다 호텔을 빠져나오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방에는 결혼을 앞둔 아내가 있었지만 미처 거절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프랑스 파리의 어떤 골목, 20세기 초에서 지금 막 뛰쳐나온 것 같은 디자인의 자동차에 동승하는 순간 펼쳐지는 마법 같은 밤을 이미 몇 번이나 경험했기 때문이다.
F 스콧 피츠제럴드 부부와 인사를 나누고 헤밍웨이와 술을 마시며 거트루드 스타인에게 작품을 평가받을 수 있는 시간. 우디 앨런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가 그리는 그 시절의 파리는 20세기 초, 그 풍만하고 자유로우면서도 예술적인 영감으로 충만했던 시대를 향한 판타지였다.
그날 서울 성수동에서 보낸 오후도 비슷한 느낌이었을까? 반클리프 아펠이 밀라노와 상하이, 사우디아라비아를 거쳐 서울에 건축해놓은 전시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 일상에 미세한 균열 혹은 왜곡이 생긴 것 같았다. (몸은) 서울이었지만 (감각적으로는) 서울이 아니었다. 2024년 2월이었지만 20세기 유럽의 어떤 도시를 유영하는 것 같았다. 프랑스 어느 도시일까, 파리의 어느 공방일까 상상하다 문득 이 전시장에는 또 다른 시간의 축 하나가 더 있는 것 아닐까 생각하게 되는 순간과도 여러 번 맞닥뜨렸다. 반클리프 아펠의 유구한 역사와 미감이 그 공간을 벅차게 채우고 있었다. 장소는 서울 성수동 대림미술관. 전시의 이름은 ‘시간, 자연, 사랑’이었다.
반클리프 아펠은 시대를 대표하는 하이주얼리 메종이다. ‘메종(maison)’은 프랑스어로 ‘집’이라는 뜻. 패션브랜드에서는 오트 쿠튀르, 즉 맞춤복을 제작하는 브랜드 하우스의 공방을 지칭할 때 주로 쓴다.
반클리프 아펠의 경우는 1906년 파리 방돔 광장 22번지에 설립한 반클리프 아펠의 공방 혹은 브랜드 자체를 의미할 때 ‘메종’이라는 말을 쓴다. 서울 청담동에 있는 반클리프 아펠 매장의 정식 명칭도 반클리프 아펠 서울메종이다. 물리적으로는 공간 그 자체, 형이상학적으로는 해당 브랜드를 둘러싼 다양한 의미를 포괄하는 단어인 셈이다.
빛과 시선까지 고려한 세심한 작업
고정된 ‘작품’과 단순한 ‘전시’ 넘어
100여년 전 파리 거리로 날아온 듯
장인의 삶과 그들의 현장까지 재현
성수동 대림미술관서 4월까지 진행
스태프의 안내를 따라 곡면으로 부드럽게 처리된 벽면을 따라 들어가면 반클리프 아펠이 고르고 고른 컬렉션들의 향연이 그야말로 황홀하게 펼쳐진다. 참 많은 말이 필요하기도 하고, 아무 말도 필요 없기도 한 그런 공간이라고 하면 좀 무성의하게 여겨질까. 하지만 이 분위기와 아름다움을 말로 설명하는 게 또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학자이자 작가, 밀라노 폴리테크닉 대학의 주얼리 및 패션 액세서리 학과장인 알바 카펠리에리가 큐레이팅한 의도와 흐름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까? “주얼리의 예술은 영원과 덧없이 사라지는 찰나 그리고 전통과 패션 사이에서 균형을 갖추고, 시간과의 복잡성을 이루고 있는 관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라는 보도자료 문장을 파고들어야 할까?
보석이라는 말로 이 작품들의 가치를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역시 좀 너무하다 싶다. 런던에서 대를 이어 양복을 짓는 장인의 옷을 그냥 ‘직물’이라고 부르는 것과 다르지 않은 느낌이라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문화적으로 섭섭하다는 뜻이다. ‘하이 주얼리’라는 말로 반클리프 아펠의 위상과 상징을 드러낼 수 있겠지만 그 역시 성에 차는 설명은 아니다. 이 역시 사실인데도, ‘하이’라는 말이 담고 있는 계급적인 느낌으로 이 멋진 세계와의 거리감을 다시금 확인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예술’이라는 단어 역시 무성의하긴 마찬가지다. 세상에는 예술이라는 우산을 쓰고도 형편없는 경우 또한 흔히 존재하기 때문에.
따라서 지금 이 칼럼을 읽는 당신을 납득시키기 위해서는 다른 접근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하나는 사람, 또 하나는 현장이다.
일단 이 아름다움의 이면에 있는 사람들의 존재를 먼저 인식하기를 권하고 싶다. 파리 방돔 광장 22번지에 있는 메종 어딘가에서 30년이 넘은 도구를 손에 들고 그들만의 방식으로 보석을 세공해 작품으로 완성하는 사람들. 반클리프 아펠에서만 만들 수 있는 비법으로 어떤 댄서의 움직임, 어떤 꽃의 아름다움 혹은 동물의 뉘앙스를 살려내는 데 일생을 건 장인들을 상상해보라는 뜻이다.
실제로 반클리프 아펠은 온전한 전시 공간 하나를 할애해 장인들의 인터뷰를 영상으로 감상할 수 있도록 권하고 있다. 그 영상을 통해 하나의 광물이었던 조각들이 마침내 보석이 되어 다시 작품으로 승화하는 마법 같은 순간의 이면을 감상할 수 있다. 자연으로부터 발견된 광물들이 숙련된 인간의 손을 거쳐 마침내 예술로 비약하는 것이다.
이제 현장이다. 반클리프 아펠의 작품들은 시선을 고정한 채 발걸음을 옮기며 다양한 각도로 감상해야 더 깊은 황홀경을 체험할 수 있다. 아울러 전시 포스터 전면을 장식하고 있는 지프(Zip) 네크리스야말로 그 아름다운 비약을 상징하는 오브제일 것이다. 지프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 ‘지퍼’를 의미하는 단어. 이 목걸이는 정말 지퍼처럼 움직인다. 손으로 잡고 올리면 견고하게 잠기고, 내리면 사진 같은 모습이 된다. 끝까지 잠그면 팔찌로 쓸 수도 있다.
하이 주얼리는 어쩐지 그림처럼 아름다운 채 고정돼 있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일단 박살냈다는 점에서, 가장 실용적이면서도 견고했기 때문에 군복에 쓰기 시작했던 지퍼를 하이 주얼리에 적용했다는 점에서도 혁신적인 작품이었다. 반클리프 아펠 역사상 가장 전위적인 작품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전체적으로는 옐로 골드. 다이아몬드와 루비를 번갈아 세팅한 하트가 가장자리를 장식하고 있다. 이 부분을 현장에서 보면 섬세한 레이스처럼 보인다.
반클리프 아펠이 1942년에 만든 버드 오브 파라다이스 클립도 마주하게 되면 모골이 송연해지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반 클리프 아펠은 동물과 식물, 그야말로 자연을 소재로 하는 다양한 작품들을 만들었는데, 그중 단연 화려하고 아름답다. 몸은 옐로 골드 소재의 조각, 펼친 날개의 깃털은 사파이어의 파랑과 루비의 빨강이 어우러져 있다. 이 새의 부리 부분이 유난히 반짝이는 데에도 이유가 있다. 반클리프 아펠은 이 부분이 플래티넘 소재에 브릴리언트 컷 다이아몬드 세팅을 더해 전체적인 소재들과의 대비를 극대화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인터넷이나 출판물의 그 모든 페이지에서 이 극락조 클립의 사진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부분은 투명하고 다른 부분은 불투명하게, 관람객의 시선이 움직이며 닿는 그 모든 각도에서 이 새는 날아오르는 듯 빛난다. 그 빛들이 너무나 다채로워서 이미 하늘 위에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저 빨간 눈빛에서는 초점마저 느껴지기도 한다. 뭣보다 깃털 하나하나의 섬세함을 가득 채우고 있는 사파이어와 루비의 강렬함 앞에서는 마냥 시간을 잊게 되는 것이다.
귀엽고 아름다운 댄서들의 움직임도 놓치면 안 된다. 전체적으로는 옐로 골드와 화이트 골드, 스커트의 장식에는 루비, 댄서의 얼굴에는 다이아몬드를 쓴 작품도 있다. 최초의 댄서 클립은 1941년이었다. 팔찌와 귀고리, 커프 링크스와 블라우스 버튼 등을 위한 다채로운 작품들이 있고, 전시 현장에서는 정말 춤을 추는 것처럼 세팅한 댄서 클립들이 눈앞에서 조용히 돌고 있는 부스도 있다.
관람에 앞서 스태프에게 “관람에 걸리는 시간은 대략 얼마나 될까요?” 물었더니 “40분 남짓, 경우에 따라서는 1시간 정도 걸릴 것”이라는 답을 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무슨 소용일까. 전시장을 나서는 길에는 알바 카펠리에리의 말에 대해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찰나이면서 영원하고 역사이면서 혁신인 세계가 지금 서울 성수동에 열려 있다. 전시는 지난해 11월18일에 시작됐지만 오는 4월까지 넉넉하게 이어진다. 안내 문구에는 ‘마지막 입장은 전시종료 1시간 전’이라고 적혀있지만 조금 더 여유 있는 마음으로 찾기를 권하고 싶다.
■정우성
유튜브 라이프스타일 매거진 ‘더파크’ 대표, 작가, 요가 수련자. 에세이집 <내가 아는 모든 계절은 당신이 알려주었다> <단정한 실패> <산책처럼 가볍게>를 썼다.
정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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