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지 몰린 '전기차 전도사' 매리 바라 GM 회장···그래도 기댈 곳은 K-배터리
전기차 판매 부진에 美 연비규정 못지켜
수천억 벌금 부과···PHEV 모델 재출시
바라 회장 리더십도 일부 타격 불가피
일시적 수요부진, 전기차 전환은 대세
K-배터리사 만나 대내외 건재 과시 포석
메리 바라 제너럴모터스(GM) 회장이 1박2일의 방한 일정을 소화하고 지난 7일 미국 디트로이트로 돌아갔다. 2016년 회장 취임 후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지만 그의 방한 목적과 동선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국내 업계를 통해 바라 회장이 삼성과 LG그룹의 배터리·전장 부문 경영진을 잇따라 만나 사업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는 소식 정도만 알려졌을 뿐이다. LG화학(051910)이 GM과 25조원 규모의 양극재 공급계약을 체결했다는 보도자료를 배포했지만 두 회사는 이미 2022년 7월 양극재 공급을 위한 포괄적 협의를 맺은 바 있다. 시장이 놀랄 만한 깜작 뉴스는 아니었다는 얘기다.
바라 GM 회장은 왜 한국을 찾았을까. 한국 배터리·전장 기업들과의 동맹 강화가 목적이었다면 식상하다. GM이 LG에너지솔루션(373220)과 미국 오하이오주·테네시주·미시간주 등 3곳에서 배터리 합작 공장을 가동하거나 건설 중인 건 다 알려진 얘기다. 삼성SDI(006400)와도 미국 인디애나주에서 2026년 가동을 목표로 배터리 합작 공장을 짓고 있다.
GM이 배터리 동맹을 발판 삼아 삼성·LG의 전장부품 계열사들과 차량용 반도체·카메라·디스플레이 등으로 협력 범위를 넓혀나가는 것도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다. 이 정도 주제는 바라 회장이 굳이 한국을 찾지 않아도 얼마든지 논의할 수 있다.
업계의 한 고위 관계자는 “궁지에 몰린 바라 회장이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한국을 방문한 것”이라는 흥미로운 분석을 내놨다. 그의 방한 목적을 이해하려면 현재 미국 GM 본사와 바라 회장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취지다.
바라 회장은 대내외적으로 거센 도전에 직면했다. 회장 취임 후 GM의 전기차 전환에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어왔는데, 최근 전기차 수요가 꺾이면서 스텝이 꼬였버렸다.
바라 회장은 지난달 30일 실적발표 컨퍼런스콜에서 “전기차 도입이 지연되고 있다”고 인정한 뒤 “북미 지역에서 플러그인 하이브리드(PHEV)를 재출시하겠다”고 말했다. 2035년까지 모든 신차를 전기차로 출시하고 하이브리드엔 투자하지 않기로 한 기존 계획을 수정한 것이다. 올해 전기차 생산 목표량도 40만대에서 20~30만대 수준으로 낮췄다.
‘전기차 전도사’였던 바라 회장이 PHEV를 선택한 건 어쩔수 없는 측면도 있다.우선 내부 반발이 컸다. 최근 전기차 수요 둔화로 GM 내부에서 전기차보다 하이브리드차를 선호하는 고객들을 경쟁사에 빼앗길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GM 자문위원회에 소속된 딜러들은 최근 몇 차례의 회의에서 경영진에게 GM 라인업에 하이브리드차를 추가할 것을 촉구했다. 더 비싼 데다 정기적인 충전이 필요한 전기차와 기존의 내연기관 차량 사이에서 ‘중간 지대’를 찾는 고객들이 점점 더 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연비규정 강화도 영향을 미쳤다. 미국 도로교통안전국(NHTSA)은 ‘기업평균연비규제(CAFE)’를 운영하고 있다. 자동차 제조사가 해당 연도에 생산하는 자동차의 평균 연비를 규제하는 정책으로 차종별 연비와 판매대수를 집계해 산출한다.
지난해 기준 미국에서 자동차를 판매하는 완성차 제조사는 평균 리터당 21km의 연비를 충족해야 한다. 이를 달성하지 못한 제조사엔 벌금이 부과된다. CAFE 미준수에 따른 벌금을 피하려려면 미국 내에서 전기차 판매 비중을 늘려 기준 이상의 평균 연비를 달성하거나 테슬라처럼 배기가스 배출권이 풍부한 기업으로부터 배출권을 사와야 한다.
GM은 전기차 전환이 늦어지는 데다 경쟁사와 달리 하이브리드 모델이 없다. 지난해 이 기준을 충족하지 못해 NHTSA로부터 1억 2820만 달러(약 1700억원)의 벌금을 부과받은 이유다. 업계 관계자는 “GM은 현재와 같은 라인업으론 매년 연비 규정 미준수로 수천억원의 벌금을 내거나 배출권을 사와야 한다”면서 “전기차 올인 전략을 편 바라 회장에게도 일부 책임이 있기 때문에 PHEV 모델 출시를 하루라도 앞당기고 싶을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GM이 PHEV 모델에 집중할수록 국내 배터리 기업들에게 불편한 상황이 초래될 수 있다는 점이다. LG엔솔과 삼성SDI는 GM의 전기차 전환 계획에 맞춰 북미 지역에 대규모 배터리 합작공장을 가동 중이거나 짓고 있다. 하나 같이 수조원이 소요되는 대규모 투자다.
바라 회장은 전기차 수요 둔화와 연비 규정 때문에 한시적으로 PHEV 모델을 재출시하겠다는 입장이지만 향후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장담할 수 없다. 강화된 연비 규정이 그대로 있고 전기차 수요가 계속 부진하면 벌금 폭탄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GM은 PHEV 차종 확대에 나설 수밖에 없다.
PHEV 모델에도 배터리가 탑재돼지만 순수 전기차 배터리 용량의 10~20%에 그친다. GM이 향후 생산할 PHEV 모델에 한국산 배터리를 탑재한다고 해도 순수 전기차 배터리가 주력인 국내 배처리 업계엔 ‘언발에 오줌 누기’ 수준이다.
판매 지역도 지금은 북미에 한정됐지만 시장 수요에 따라 확장될 수도 있다. 그만큼 GM의 전기차 전환 속도는 늦춰지고국내 배터리 업계에 피해가 누적될 수 있다.
업계에선 바라 회장이 이런 복잡한 사정 탓에 한국을 방문했을 것으로 본다. GM이 PHEV 모델을 출시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을 설명하고, 2035년 완전한 전기차 전환에 대한 의지를 재확인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새로운 계약 체결보단 기존에 약속한 것들을 차질 없이 추진해 나가겠다는 메시지를 파트너사들과 공유했을 수 있다.
LG화학과의 양극재 공급계약이 대표적인 사례다. 두 회사는 최근의 전기차 수요 둔화를 일시적인 것으로 보고 앞으로 전기차 판매가 다시 늘어날 때를 대비해 원활한 배터리 공급을 위해 이번 계약을 맺은 것으로 알려졌다. LG화학은 2035년까지 50만톤 이상의 양극재를 GM에 공급할 예정이다. 고성능 순수 전기차(주행거리 500km 이상) 500만대를 만들 수 있는 물량이다. 공교롭게도 GM의 2035년 글로벌 전기차 생산 목표와 일치한다.
업계 고위 관계자는 “전기차 수요 둔화와 연비 규정 벌금 때문에 그동안 전기차 전환을 강력하게 주장해왔던 바라 회장의 리더십에도 타격이 일부 있었다”면서 “글로벌 배터리 기업들의 본사가 있는 한국을 찾은 건 2035년 완전한 전기차 전환이라는 기존 목표를 흔들림 없이 추진하겠다는 메시지를 대내외에 알리기 위한 포석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서민우 기자 ingaghi@sedaily.comCopyright © 서울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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