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주인공이라고 29번 고쳐진 시나리오···‘시대와 시대착오’[책과 삶]
29번 시나리오 고쳐진 영화감독
“아들이라면” 가부장제 억눌린 딸
·
“좌절과 좌절 거듭한 나의 30대”
볕들지 않는 공간의 청춘들 그린
전하영 등단 후 첫 자전적 소설집
시차와 시대착오
전하영 지음 | 문학동네 | 372쪽 | 1만7000원
미국 유학 후 귀국한 지 6년이 지났다. 돈을 한 푼도 못 벌었다. 거의 포기할 무렵 난희는 영화제 초청을 받고 파티에 참석한다. 난희보다 두 살 많은 ‘자부심’이 가득한 남자 프로그래머는 여러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다. 그에게 한마디 건네고자 다들 경쟁한다. 겨우 기회를 얻는다. 난희는 동료를 원했다. 남자는 의례적 인사 뒤에 난희가 서른이 넘은 비혼 여자이고, 미국 유학도 다녀왔다는 사실을 파악한다. 남자는 “그럼 이제 더 팔 게 없겠네요”라며 웃는다. 난희는 되묻지 못한다. ‘뭘 팔아요?’
단편소설 ‘영향’으로 2019년 문학동네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한 소설가 전하영이 첫번째 소설집 <시차와 시대착오>를 내놨다. 2021년 12회 젊은작가상 대상도 수상했다. 그는 한국영화아카데미와 시카고예술대학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여러 단편영화와 영상 설치 작품을 만들며 활동하기도 했다. 그의 이력을 닮은 듯 닮지 않은 듯, 여덟 개 이야기가 담긴 첫 소설집은 ‘여성’과 ‘예술가’라는 키워드로 요약된다. 소설은 여기에 ‘청년’까지 더해 낭만과 젊음, 패기와 같은 팔딱거리는 상상을 일거에 걷어찬다. 작가는 우리를 해가 잘 들지 않는 북향과 같은 공간으로 데려간다.
감독 지망생 난희는 엄마가 재혼한 남편에게서 상속받은 건물의 월세로 미국 유학도 가고 생활비도 받는다. 작업실은 중국인 거리에 있다. 그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며 뭔가 찍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완성이 되지는 않는다. 유학 시절 친하게 지낸 동생 정희는 ‘어른 타령’을 한다. 총명했던 이들이 영화 현장에서 젊은 시절을 보내고 제때 어른의 삶으로 옮겨가지 못해 망했다는 것. 난희를 비난하는 세상의 목소리와 다름없다. 난희는 유학 시절 만난 남자친구 제이미가 한국에 온다는 소식에 매트리스 토퍼도 사고 커피머신도 산다. 그러나 그는 기혼자였고 결국 오지 못한다. 난희는 중국인 거리를 내려다보면서 포기하듯이 아무 말이나 중얼거린다. 그동안 찍은 테이프들을 바닥에 다 떨어뜨린다. 엉망이 됐지만 “내게도 뭔가 팔 게 있을지 생각해봐야지”라고 되뇌어본다. 피곤함이 몰려온 난희는 일단 자기로 한다. 그리고 그래도 내일은 카메라를 들고 산책하러 나가겠다며 소설은 끝맺는다.
난희의 마지막 장면은 전하영의 소설이 여성 예술가를 두고 파괴적 면모만을 그리는 여타 소설과는 다른 지점이다. 난희는 미치거나 절망에 빠지지도 않고 반대로 갑자기 대책 없이 희망적이지도 않다. 그에게 노동이면서 삶의 현장이자, 일상인 중국인 거리를 카메라를 들고 걷는 30대 여성 예술가를 상상하게 할 뿐이다. 소설 속 난희는 남들이 규정해놓은 ‘팔 것’을 벗어나 ‘새로운 무언가를 파는’ 사람이 될 수 있으리라.
작가는 소설집 첫머리에 기묘한 저택에 사는 30대 남성 소설가의 이야기 ‘검은 일기’를 배치했다. 소설집의 주된 인물이 여성 예술가인데 첫번째 소설에선 남성 소설가가 등장한다. 고액의 원고를 청탁받은 30대 남성 소설가는 작업 일지에 “나는 엘리슨이고, 엘리슨은 나였다. 우리는 한 사람이 두 사람으로 쪼개진 것 같았다”는 문장을 적는다. 소설 속 인물과 작가를 구분해달라는 메시지다. 작가의 의도를 알고서 출발해보지만 여러 소설 속 서사들은 작가의 이력을 떠올리게 만든다. 전하영은 영화 현장에서 연출도 하고 시나리오를 쓰다 소설도 쓰게 됐다. 그는 전화 인터뷰에서 “생각이 많은 사람이라 영화 시나리오보다 소설이 더 잘 써졌다”고 했다.
‘남쪽에서’는 여성 시나리오 작가가 등장한다. ‘29고’는 29번이나 고쳤다는 뜻이다. 연이어 거절당했다. “처음에는 여자가 주인공이라는 점이 ‘치명적인 문제’로 지적되었다. 여성 캐릭터가 메인인 영화를 가져왔다고 아마추어 취급을 받기도 했다. 독립영화로 찍을 것이지 왜 순진하게 여기서 기웃거리냐는 식이었다.” 요즘은 여배우 한 명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상업영화가 잇따라 나오지만 불과 10년 전만 해도 그렇지 않았던 영화계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표제작 ‘시차와 시대착오’는 대립하는 듯한 단어의 조합으로 젠더와 세대 차이를 그려낸다. 이명식은 배 속에서 유산된 아이가 태어났다면 아들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구시대 가부장적 아버지다. 이명식은 ‘딸 미루가 아들이었다면’이라는 말을 반복한다. 딸 미루는 예술을 전공한 유학파지만 시급으로 최저임금 절반 정도 받는 갤러리에서 일한다. “미루가 예술계 주변부에서 고군분투하는 사이 같은 시기에 예술학교를 다녔던, 그녀가 별 볼 일 없는 인간들이라고 무시했던 소수의 남자 동기들은 무슨 연줄인지 경력도 없이 대학에 출강하고 기관에 정규직으로 취직하며 위로, 더 위로 올라갔다. 그들에게는 모든 게 더 쉬워 보였다.” 딸 역시 어린 시절 ‘내가 아들이었다면’을 생각하며 자란다. 소설 끝에 딸은 사기당할 뻔한 아버지를 구하고, 계약서를 새로 작성하는 데도 함께한다. 9개월간 공실이었다가 드디어 세입자를 구하고 계약서를 작성하는 순간 이명식은 임차인 서명란에서 ‘죽은’ 첫째 아들 이름을 발견한다.
‘시차와 시대착오’에서는 쉽게 매칭되지 않는 두 단어가 등장한다. ‘예술과 주식’. 미루는 주식을 한다. 주식을 한다고 하면 어쩐지 품위가 떨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만 수중의 돈을 야금야금 주식에 넣는다. 시류가 바뀌었으니까. 이제 미술계에서도 가상자산 투자, NFT라는 단어가 나온다. 작가는 인터뷰집에서 “무엇이 시대착오일까 하는 의문도 계속 들었어요. 신자유주의 시대에 예술을 꿈꾸는 게 시대착오일지, 즉각적으로 요구되는 자기 계발과 투자에 저항 없이 호응하는 것이 시대착오일지. 결국 양쪽 사이에 애매하게 서 있으면서 갈팡질팡할 뿐이지만요.”
전하영 소설은 여러모로 독특하다. 소설의 끝에는 논문의 주석처럼 소설과 연관된 글, 영화 등이 적혀 있다. 소설 내용과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시차와 시대착오’라는 제목은 조르조 아감벤의 <장치란 무엇인가? 장치학을 위한 서론>에서 빌려온 것. 아직 만 49세, 이제 막 ‘아줌마’라는 단어가 익숙해진 숙희에게 ‘할머니’라고 부르며 선 넘는 우리 사회를 드러내는 ‘숙희가 만드는 실험영화’ 제목은 1979년 동아일보에 실린 유현목 감독의 소설 속 대사에서 가져왔다. 단순 차용이지만 여러 콘텐츠를 함께 읽는 듯한 기분을 안겨준다. 곧 문을 닫을 오래된 호텔에서 묵은 기록을 담은 ‘JHY를 위한 짧은 기록’은 50장의 사진으로 구성되어 있다. 작가가 서울 힐튼호텔이 문 닫는다는 소식을 듣고 가서 직접 찍어온 사진들이다. 사진과 글을 보여줬을 뿐인데 영화가 되는 소설이다. 작가는 “단편소설 한 편을 완성하기까지 이야기에 살을 붙이기 위해 자료조사를 많이 하는 편”이라고 했다.
소설은 “시간의 흐름에서 탈락한 듯한 쇠락한 기운”을 내뿜으며 우리 사회의 암묵적으로 고정된 ‘경로를 이탈’한 이들의 삶을 더하지도 않고 덜어내지도 않고, 담백하게 보여준다. 전하영은 전화 인터뷰에서 “이 책은 좌절에 좌절을 거듭했던 나의 30대”라고 말했다. 작가는 “여성 예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함께 읽어주셨으면 좋겠다”고 했다.
임지선 기자 visi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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