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양 100인조 오케스트라’와 ‘버들 북 꾀꼬리’
미술로 보는 자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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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이란 무엇이고 ‘우리 것’이란 무엇일까? 조선시대 음악을 공연하고 당시의 뛰어난 서화를 전시하는 것은 우리의 귀와 눈을 그때 그곳의 기준에 맞춰 감상할 것을 전제하고 요구한다. 그러나 이미 완전히 서구화된 사고와 생활습관에 익숙해진 동시대 음악과 미술에서 우리 것과 전통이 무엇인지 얘기하는 것은 간단치 않다. 마침 2023년 말 이런 질문에 답을 주는 공연과 전시가 있었다.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김수철과 동서양 100인조 오케스트라’ 공연과 리움미술관에서 열린 강서경의 ‘버들 북 꾀꼬리’ 전시가 그것이다.
김수철은 <못다 핀 꽃 한 송이>를 비롯한 다수의 곡을 히트시키면서 조용필이 가요계를 평정했던 1980년대 초반에 그를 누르고 가수왕이 되는 이변을 연출했다. 게다가 안성기, 이미숙과 함께 배창호 감독의 영화 <고래사냥>에 주연으로 출연해 만능 예능인으로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정상에 올랐을 때 그의 관심은 이미 인기나 돈에 있지 않고 세계에 내놓을 우리 음악을 만들기 위해 국악을 현대화하는 데 있었다. 국악 음반을 내느라 빚더미에 오르면서도 그의 영화 <서편제> 오에스티(OST)는 국악 음반으로는 최초로 100만 장이 넘게 팔렸다. 그는 86아시안게임, 88올림픽, 2002월드컵 등 굵직한 국제행사의 음악감독을 맡으면서 우리 가락을 기타로 연주하는 기타산조를 개발해 세계에 선보였다. 그리고 2023년, 자신이 그렇게 염원했던 동서양 100인조 오케스트라 공연을 했다.
김수철의 기타산조
영락없는 국악 음반이라고 해야 할 <서편제> OST는 어떻게 대중의 사랑을 받았을까? 아마도 영화의 인기가 서구 음악에는 없는 우리 고유의 서늘한 가락과 대금이 지닌 구슬픈 음색에 집중할 수 있게 해줬을 것이다. 반면 김수철이 개발한 기타산조는 우리 고유의 가락과 리듬을 대중의 귀에 익숙한 전기기타로 연주해, 국악에 관한 대중의 이질감과 거부감을 최소화하고 온전히 음정과 리듬에 집중하게 했다. 말하자면 국악이라는 비서구를 향한 대중의 편견과 선입견을 벗겨내기 위해 영화의 성공과 기타의 사용이 요구된 것이다.
김수철의 대표적인 국악 음반이라 할, 4악장으로 구성된 《팔만대장경》은 어떨까? 이 음반은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이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을 기념해 의뢰받아 작곡했다. 이 비장하면서도 감미로운 음악은 엔니오 모리코네의 <미션>이나 사카모토 류이치의 <레버넌트> 같은 음악을 연상시키며 자연스럽게 김수철을 두 거장의 반열에 위치시킨다. 실제 <황야의 무법자>부터 정통 클래식 스타일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와 <미션>에 이르는 걸작들을 작곡했던 엔니오 모리코네나, 전자음악 밴드에서 출발해 팝과 클래식을 넘나들었던 사카모토 류이치처럼 김수철도 팝과 클래식의 경계를 넘나든다.
그러나 두 거장이 음악대학에서 클래식을 공부한 것과 달리, 김수철은 정규 음악교육을 받은 적 없이 모두 독학했다. 또한 주로 국제무대에서 활동했던 두 사람과 달리, 김수철은 우리 것을 세계에 알린다는 또 하나의 선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미션>에서의 감미로운 오보에 선율은 말하자면 태평소나 대금, 피리 등으로 대신하고, <레버넌트>의 현악 편성이 자아내는 웅장함은 전통 북소리로 긴장감을 배가한다. 이를 위해서는 팝과 클래식을 망라할 뿐 아니라 동양, 그리고 우리의 악기를 함께 수용해야 했다.
100명이나 되는 거대 악단의 뒷줄 양 끝에 우리의 큰북이 각각 서 있고 대금, 태평소 등이 독주하는 오케스트라는 기괴한 조합이다. 그러나 이 오케스트라는 우리 악기가 가진 소리의 색과 우리 가락의 장점을 적재적소에 활용하면서 이질적이지 않게 녹아낸다. 생각해보면 서양 악기가 표현할 수 없는 음색을 우리 악기가 보완하면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는 소리의 폭은 훨씬 다채롭고 넓어지게 마련이다. 가보지 않은 길은 익숙지 않아 낯설고 이질감이 들지만 그래서 새로움과 놀라움으로 가득하다.
김수철의 동서양 100인조 오케스트라가 들려준 음악은 강서경의 개인전 ‘버들 북 꾀꼬리’가 보여준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동양화를 전공한 작가는 동시대 서구 미술이 구사하는 조형적 장치와 유사한 것을 우리 전통에서 찾아 슬며시 치환한다. 이런 전유와 재해석을 통해 표현되는 그의 작업은 동시대적이면서도 어딘가 ‘우리 냄새’가 나서 관객에게 전혀 다른 감응을 전달한다. 예를 들어 그의 전시는 제목처럼 버드나무 사이를 꾀꼬리들이 날아다니는 풍경을 연상시킨다. 버드나무는 2차원 평면에 표현하면 빈틈이 없는 색면으로 묘사되지만, 3차원 공간에서는 새가 날아다닐 수 있는 수많은 공간을 안에 품고 있다. 그의 작업은 전통 회화에서처럼 면보다는 선으로 이뤄지고, 그래서 텅 빈 여백을 넉넉하게 가진다.
격자구조와 화문석 사각형
강서경은 서구 모더니즘의 상징과도 같은 격자구조를 조선시대 악보인 정간보의 우물 정(井)자 모양의 사각틀 이미지와 춘앵무를 출 때 아래에 까는 전통 화문석 자리의 사각형 등 전통의 모티브로 전유한다. 그래서 서구와 같은 사각형이면서도 그의 화문석 자리나 나무틀이 표현하는 형태와 느낌은 서구 모더니즘과는 전혀 다르다. 게다가 그는 한편에 화문석 자리를 변형한 격자무늬의 평면작업을 설치하고 그 주변에는 다시 화문석 자리의 역할을 하는 서양식 카펫을 우리식 문양으로 꾸며 깔아놓는다. 그래서 그의 치환과 전유는 서구에서 우리 것으로 미끄러지는 데 머물지 않고 다시 우리 것에서 서구로 미끄러진다.
전시장 전체를 넓게 바라보면 여백이 많고 마른 붓질로 칠해진 한 폭의 문인화를 바라보는 기분이 든다. 화문석과 한지, 나무와 같은 전통적 재료를 사용하는가 하면 카펫과 알루미늄, 철판 등의 금속재료를 쓰기도 해서 자연과 인공,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가 자연스럽게 공존한다. 언뜻 어울리지 않을 듯한 이 조합이 조화를 이루는 것은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접목하는 작가의 솜씨에 달려 있다. 그래서 김수철의 동서양 100인조 오케스트라 공연과 강서경의 ‘버들 북 꾀꼬리’ 전시는 전통이란 항상 새롭게 해석되면서 다시 태어나는 것임을 새삼 되새기게 한다.
이승현 미술사학자 shl21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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