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먼 시대정신 대신 헌법 정신부터 [세상읽기]

한겨레 2024. 2. 9.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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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29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국민의힘 지도부와의 오찬 회동에 앞서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과 창밖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홍원식│동덕여대 ARETE 교양대학 교수

나라마다 헌법 1조는 그 국가공동체의 존립 목적과 운영에 관한 최우선 원칙을 담고 있다. 헌법 자체가 임의적 상황을 뛰어넘어 한 시대를 관통해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보편적인 규칙이라는 점을 이해하면, 헌법 1조가 우리가 시대정신이라고 부르는 것에 가장 가까운 원칙이라는 사실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독일 헌법 1조는 훼손할 수 없는 인간의 존엄성을 보호하는 것을 국가의 책무로 규정하고 있는데, 이는 2차 세계대전 나치에 대한 반성 속에서 인간의 존엄을 시대정신으로 삼고 국가에 이를 보호할 책임이 있음을 명시한 것이다. 1791년 제정된 미국의 수정헌법 1조는 의회가 표현, 출판, 집회 등의 자유를 제약하는 어떠한 법률도 제정할 수 없음을 규정하고 있다. 이는 당시 신생 근대국가로서 민주주의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에서부터 비로소 시작될 수 있음을 확인하고, 이를 국가가 반드시 지켜야 하는 최우선 원칙으로 삼고자 한 것이다.

우리는 헌법 1조를 통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사실 공화제에 대한 열망은 일찍이 임시정부에서부터 시작한 바 있는데, 임시정부는 대한제국의 군주제로 돌아가자는 일부의 복벽주의 주장을 뿌리치고 왕이 세습되는 군주제와 차별되는 의미로서 공화제를 임시헌장을 통해 표방했다. 우리 제헌헌법의 입법자들은 이러한 임시정부의 정신을 이어받아 헌법 1조를 통해 민주공화국을 선포한 것인데, 이는 군주제에 대한 부정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주권의 소재와 행사 방법에 관한 원칙을 명시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민주’를 통해서 국가 주권이 국민에게 있음을 확인하고 ‘공화’를 통해서 주권의 행사가 전제주의나 독재적 방식이 아닌 헌법적 권력분립의 구조원리에 의해 조직된 국가체계를 통해 이뤄져야 함을 선언한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대통령선거 후보 시절 내세웠던 공정, 정의, 상식은 국가권력의 행사 방법에 관한 헌법적 원칙을 재천명하였다는 점에서 공화주의의 정신에 가장 부합하는 정치 슬로건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현재 방송통신위원회와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서 벌어지는 모습들을 보면, 과연 작금의 행정권력이 정상적인 민주공화국에서 행사되고 있는 것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방송의 독립성을 책임져야 하는 두 위원회에서는 공히 야당 추천 위원들이 모두 임명되지 않고 있어 사실상 장차관으로 구성된 독임제 부처처럼 정부·여당에 의해 일방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특히, 방심위에서는 김만배 녹취록 관련 징계를 일방적으로 결정하였고 이어서 ‘바이든-날리면’ 보도 징계에 착수하며 하루가 멀다 하고 언론의 독립성을 압박하고 있다. 민원사주 의혹이 있는 류희림 위원장은 전체 직원이 200명 남짓인 방심위에서 절대다수인 149명에 의해 권익위에 신고당했지만, 오히려 제보자를 찾겠다며 내부 감사와 수사기관 고발을 지시하고 팀장들을 무더기로 교체하는 독단적 모습을 보인다.

의심할 여지 없이 표현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는 민주공화국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필요조건이다. 이를 보호하고 구현할 책임이 있는 방통위와 방심위 운영에서 법률이 규정하는 제도적 견제와 균형을 보장하지 않고 독단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언론을 대하는 현 정부의 모습은 윤 대통령이 대선 당시 내세웠던 공정, 정의, 상식에 대한 부정이자 우리 헌법의 최우선 원칙인 공화주의에 대한 모욕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여당은 다가오는 총선의 시대정신을 ‘운동권 특권 청산’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는 현재의 총선에서 야권의 정권 심판 프레임에 대한 일종의 대항 프레임으로 선거구도를 어떻게든 대등하게 이끌어가기 위한 슬로건으로 보이지만, 우리 사회가 이를 곧이곧대로 시대정신이라고 받아들일 것 같지는 않다. 운동권 특권이 실제 어디에 얼마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눈 안의 들보가 급하기에 거기까지 들여다볼 여력이 있을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현 정부가 보이는 언론에 대한 일방적인 모습이 우리 헌법에 담긴 공화주의의 시대정신을 다시금 일깨울지도 모르겠다.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가 신당을 창당하며, 첫번째 정강·정책으로 공영방송의 독립성을 들고나온 것은 바로 그 지점이 현 정부의 가장 약한 고리라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총선 앞두고 애먼 시대정신 찾아 헤매지 말고, 헌법 정신부터 챙겨 보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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