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iN]웹툰 '마법사랑해' 명랑 작가 "다작 연재는 생존 본능"
영화·애니·광고만화 경험 입체적 웹툰 연출 돋보여
웹툰 작가 협업단 '명작크루' 작가·작품 상생 모델
영화광이었던 명랑 작가(본명 이시명)는 어느날 비디오 대여점에서 빌린 여러 편의 영화 중 고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40)를 보고 문득 미국으로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특수효과나 영화미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 영화의 배경을 거대한 캔버스에 직접 그려넣었다는 사실에 놀라 영화미술에 대해 커다란 호기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만화·애니메이션을 좋아했다. 중학교 때부터 미술학원에 다니고 01학번으로 입학한 대학교 전공도 애니메이션학과를 선택했다. 하지만 당시 제작비 126억원을 들인 극장 SF 애니메이션 대작 '원더풀데이즈'(2003)의 흥행 참패로 투자자들이 국내 애니메이션 제작을 꺼리는 바람에 애니메이터의 길을 접어야 했다. 여차저차해 미국 유학도 떠나지 못했다.
"애니메이션학과에서 자연스레 영상 연출을 접하면서 한국영화아카데미 제작연구과정 1기로 들어가 영화 연출·촬영·프로듀싱(PD)·애니메이션 과정을 공부했는데, 여러 제작 현장 작업에 참여하게 되면서 유학을 떠나기 어려워졌죠. 늦깎이 졸업에 30대 초반 가정도 있는데 벌이는 시원치 않았어요. 그림 삽화나 2D 그래픽 작업으로 부업을 넓히다 홍보만화 제작이 생각보다 잘 됐어요. 돈도 어지간하게 벌 정도가 됐는데, 함께 일하던 대학동기들과 더 늦기 전에 그만두자고 했죠."
이상은 현실과 달랐다. 돈을 벌어야 했지만 자신들만의 오리지널 작품을 만들겠다는 꿈과도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작품을 만들자고 의기투합했던 동료들이 꿈을 찾아 하나둘 떠나자 남은 대학동기 둘과 명랑 작가는 돈 되던 홍보만화 제작을 과감하게 접고 웹툰계에 신인으로 뛰어든다. 2013년이었다.
2010년대 네이버, 카카오를 중심으로 웹툰 시장이 성장하면서 웹툰 에이전시와 중소 플랫폼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웹툰 작가의 등용문은 넓어졌지만 처우는 여전히 열악했다. 대학동기와 작품을 만들던 명랑 작가는 그림체나 작품이 너무 좋은데 기회를 얻지 못해 대중적 인지도가 낮거나 인기 장르 특성을 따라가지 못해서 장점이 충분히 드러나지 못한 작가들을 찾아 협업을 모색했다. 그 팀이 '명작크루'다.
학원 일진물을 빼면 안 해본 장르가 없을 정도라는 명랑 작가는 이렇게 모인 작가들과 의기투합해 다양한 작품들을 내놨다. 10년 동안 '그녀는 무사다'(명랑/부겸) '라면 대통령'(명랑/신얼) '금붕어'(명랑/애풍) '악역의 구원자'(명랑/잿슨) '배달의 신'(명랑/신얼) 등 10여 편에 이르는 특색 있는 작품을 연재하는 등 '명작크루' 브랜드로 메이저 플랫폼에 작품을 공급할 수 있는 기회도 주어졌다. 에이전시는 아니지만 장르의 다양성과 깊이 있는 세계관을 담아내 작품성을 인정 받은 결과였다.
첫 데뷔작 '신들린 방망이'(명랑 글·그림)를 제외하면 현재까지 모든 작품을 스토리 작가로만 참여했다. 그림은 그릴 줄 알았지만 자신보다 그림을 더 잘 그리는 작가는 그림에만 집중하고, 영화·애니메이션 연출과 시나리오 작업 등 제작 경험이 풍부한 자신은 스토리 구상을 튼실하게 할 수 있어 수준 높은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매년 쉬지 않고 3편 이상의 동시 다작 연재로 유명한 웹툰 작가 협업단 '명작크루'의 리더이자 현재 연재중인 '마법사랑해', '김 부장 이야기'의 스토리 작가인 명랑 작가를 노컷뉴스 [만화인]이 만났다.
영화·애니·광고만화·웹툰 다양한 이색 경력…스토리 작가 명랑
- 처음 영화쪽에서 일했다고 들었다. 웹툰 작가로 데뷔하게 된 계기는?
= 어릴 때부터 만화·애니메이션을 좋아했다. 중학교 때 미술학원에 다니며 일찌감치 애니메이션 영화 쪽으로 진로를 정했는데, 당시 국산 극장 애니메이션 대작 '원더풀데이즈'가 흥행에 실패하면서 애니메이션에 대한 투자가 완전히 얼어붙었다. 영상 연출을 자연스럽게 접하면서 한국영화아카데미 제작연구과정 1기로 들어가 공부한 계기로 다양한 영화와 애니메이션 제작에 참여했다. 대학 동기들과 조그만 회사를 차려 원화 작가들의 작품 영상화 제작, 영상 시나리오 작업 등을 하면서 한 달에 70만원을 벌었는데 동료들 차비 좀 챙겨주고 하면 별로 남는 게 없었다.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걸려 있다 보니 그림 삽화나 2D 그래픽 작업, 영상 하청 제작까지 뛰던 중 웹툰 붐이 일며 광고시장에서도 홍보만화가 인기를 끌었다. 수요가 제법 있어서 어느 순간 홍보만화 제작이 회사의 주력사업이 되어버렸다. 영상과 애니메이션을 하고 싶었던 동료들이 떠나고 대학동기 두 명과 나 셋만 남았다. 홍보만화 제작으로 돈을 제법 벌 때쯤 그만두자고 했다. 우리의 정체성 문제를 인식했던 것 같다. 남은 동기들과 그동안 기획했던 아이템으로 지금이라도 만화 작가로 데뷔하자고 하면서 대표적 등용문인 네이버 도전 만화에 뛰어들었다. 작품이 눈에 띄어 플랫폼 케이툰 제의를 받아 2013년 '신들린 방망이'와 '그녀는 무사다'를 동시 연재해 데뷔했다.
- 당시 이미 결혼해서 아이도 있던 30대 초반의 나이였다고 했는데, 잘 되던 사업을 접고 전직을 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 홍보만화 제작이 어느 정도 먹고 살 만큼 돈이 된 것은 맞다. 우리 전공이었던 애니메이션은 제작 시장이 얼어붙어 있어 할 분위기가 아니었고, 만화로 할 수 있었던 것이 웹툰이었다. 2013년 당시 웹툰 플랫폼 설립 붐이 일면서 작가 등용문도 넓어지던 때였다. 동기들과 작가 데뷔를 하기로 하고 아내에게 "다음달부터 월급이 없다"고 선언했다. 6개월 만 해보겠다고 했다. 당시 신인작가 연재료가 한 달에 120만원 안팎이었다. 연재료만 있었지 RS(수익배분) 등 부가적인 수입 프로그램도 아직 없었다.
데뷔작 '신들린 방망이'는 글과 그림을 직접했지만 수입이 적어 동시 연재를 한 '그녀는 무사다'는 동기가 그림을, 내가 스토리를 맡았다. 글과 그림으로 수익을 나누면 70만원 안팎이 됐다. 스토리 작가와 글·그림 작가를 동시에 하면서 3일에 한 편씩 만들어 연재했는데 그나마 월수입이 200만원 정도 됐다.
- 2013년 첫 데뷔작 '신들린 방망이' 이후 스토리 작가로 전향한 이유는?
= 네이버, 카카오 메이저 플랫폼을 축으로 중소 단위 연재 플랫폼이 늘어나고 있던 때였다. '그녀는 무사다'를 부겸 작가와 동시에 연재했는데, 30대 나이에 결혼해서 가족까지 있으니 한 작품 수입으로는 정상적으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쉽지 않았다. 그때부터 다작 습관이 이어져 데뷔 이후 지금까지 쉬지 않고 매년 2~3개 이상 작품을 연재하고 있다.
그림 작가는 온전히 한 작품에만 집중할 시간도 부족하지만 스토리 작가는 할 수 있다면 동시 다작 연재를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부족한 수입을 늘리기 위해 매년 2~3편 다작을 동시 연재하게 된 계기다. 지인들이 얼마나 돈을 벌려고 그렇게까지 하느냐고 묻는다. 대박이 난 작품이 없으니 여러 작품을 계속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여러 작품을 제작하면서 나는 스토리에만 신경쓰면 된다. 어찌 보면 다품종 소량생산 전략이다. 주말도 휴일도 없이 일주일 내내 일해야 하는 부담이 크지만 무엇보다 아내의 배려가 컸다.
- 아무리 글을 잘 써도 동시에 여러 편의 스토리를 제작하는 것이 쉽지는 않을 텐데?
= 아무래도 영상 연출을 했다 보니 스토리보드에 익숙하다. 웹툰에 적용하면서 시행착오도 있었지만 만화 연출 플롯을 구성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제가 미술을 공부했지만 저보다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은 많다. 다만 제가 오랫동안 그림을 그렸으니 직접 콘티를 상세하게 짠다. 상황 연출을 스케치 수준까지 만들어 그림 작가에게 전달한다. 최종 결과물에 그림 작가의 그림체가 담겨 완성되는 것이다.
단순히 그릴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과 스토리를 이미지화 시켜 놓을 수 있는 훈련이 되어 있다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학창시절부터 쌓아 온 다양한 경험이 스토리 작가로서 빠르게 다작하는 데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스토리 작가의 글이 추상적이어서는 안 된다. 콘티와 상황 스케치까지 그려낸 스토리를 그림 작가가 보는 대로 직관적으로 표현 할 수 있도록 해야 설명 시간이 줄어든다. 여러 로스(loss)가 줄어야 불필요한 시간 낭비를 막고 그림 작가도 작품을 온전히 그리는 데만 집중할 수 있다. 일반적이지는 않지만 나의 작업 방식은 그렇다.
- 작업 방식이 독특하다. 작가 협업 시스템 '명작크루'는 어떤 조직인가?
= 오래 전 구상했던 것이다. 명작크루가 회사나 법인 조직은 아니다. 브랜드라고 할 수 있다. 각 작가 개인들이 공동작업을 위해 모여 있는 협업 단체라고 할 수 있다. 플랫폼과 에이전시가 거대화 되면서 개인 작가로서는 자신의 오리지널 작품을 가지고 플랫폼과 컨택하기 어렵다. 에이전시나 웹툰 스튜디오가 커지면서 개인 작가의 오리지널 작품보다 회사 기획 작품에 참여하는 방식이 많아지고 있다. 개별 독립 작가들끼리 몸집을 결속해 함께 키워내는 조직이 없다면 거대 시장 시스템과의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힘들어질 것이다.
필요에 따라서는 외부 에이전시나 플랫폼으로부터 작품 공급을 의뢰 받기도 하지만 서로 강점이 있는 작가와 그림체를 발굴해 서로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방법으로 공동의 오리지널 작품을 만들어 성장하는 상승효과를 기대한다. 에이전시는 아니지만 다행히 메이저 플랫폼에 작품을 공급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다양하고 특색있는 작품들을 만들고 있다. 수수료나 부대 비용 공제 없이 연재료나 RS 등은 철저하게 배분한다. 사업체를 운영해본 경험으로 여러 계약 문제나 요소들을 자문해주기도 한다. 서로가 필요해서 함께 협업하고 상생하는 모델이다.
- 명작크루 멤버들과는 어떻게 작업하나?
= 현재까지 10명 정도가 멤버로 활동하고 있다. 꼭 명작크루 멤버로서 작품 활동만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림체나 작품이 너무 좋은데 기회를 얻지 못해 대중적 인지도가 낮거나 인기 장르 특성을 따라가지 못해서 작화의 장점이 드러나지 못한 작가들도 많다. 성격이 소심해서 자기 작품을 적극적으로 홍보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아 도와주고 싶거나 좋은 작품을 함께 만들고 싶은 작가들을 섭외해 공동 작업 제의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제 스토리에 그림 그려줄 작가를 찾지는 않는다. 보통의 에이전시는 기획 작품에 가장 최상의 스토리 작가와 그림 작가를 붙여 제작을 하지만 갈등이 생기는 경우가 다반사다. 중간에 PD가 조율을 하지만 서로의 영역이 침범 당하는 걸 싫어하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는 그림 작가의 작품을 연구하고 작풍이나 표현 등의 장점을 살려서 그에 맞는 스토리를 쓰려고 한다. 그렇다 보니 특정 장르에 쏠리지 않고 그림 작가의 특성에 맞는 다양한 장르를 하게 된 것 같다.
- 쉼 없이 동시 다작을 하는 명랑 작가에게 성공이란?
= 성공해서 빨리 은퇴하는 것이 목표다. 반대로 오래 하기를 원하는 사람도 있더라. 데뷔 초기에 연재 플랫폼 대표님과 작가의 면담이 쉬웠던 시절이었다. 사실은 제가 되게 B급 감성이어서 어둡고 추상적인 시나리오를 하고 싶어 했다. 그 대표님과 주변 PD들이 "너가 하고 싶은 것은 꼭 성공하고 해라. 유명해지고 나서. 그럼 (막 그려도) 이름값 믿고 볼 테니까"라고 하시더라.
그런데 스토리 작가가 돼서는 웹툰 작가는 자기 그림이 얼굴이어서 유명세를 달기 쉬운데 스토리 작가는 아무래도 드러나기가 어렵다. 제 작품이 플랫폼 인기 순위에 있든 없든 제 이름을 기억해주시는 분들이 있고 믿어주면서 볼 수 있는 때가 되면 그걸 성공의 척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너무 추상적인가? OTT 드라마나 영화화가 되면 성공했다고 하는 게 쉬울 것 같기도 하다. '라면 대통령' 등 몇 작품에 대한 판권 계약이 있었는데, 아직 기획 단계이거나 제작준비 단계로 알고 있다. 영상화가 안 될 수도 있어서 언제쯤 성공했다고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 현재 연재 중인 판타지 웹툰 '마법사랑해', 오피스 장르 '김 부장 이야기'가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 많은 분들이 사랑해주셔서 감사하다. 청설모 작가의 동화 같은 그림체가 마법 판타지에 잘 어울린다는 평가도 있고, 스토리와 연출, 세계관, 서사, 플롯 등에서 좋은 평가를 해주시는 걸로 안다. '김 부장 이야기'는 원작 소설을 각색한 작품이다. 워낙 인기가 있었던 데다 '재벌집 막내아들' 웹툰을 그린 김병관 작가와 함께 작업을 하고 있다. 많은 사랑 부탁드린다.
- 올해 신작 계획은?
= 작년 12월 연재를 시작한 신작 '김 부장 이야기'는 오리지널 작품은 아니고 다른 회사 통해 각색으로 참여한 작품이다. 올해 중 오리지널 신작을 론칭하는 것이 목표다. 외부 에이전시 참여 작품은 주로 각색인데, 명작크루 멤버들 원고료 보충하는데 필요한 부분이라 꾸준히 이어가려고 한다. 2~3개 동시 연재 작품 중 1개는 오리지널 작품을 만든다는 목표로 준비하고 있다. 올해 오리지널 작품은 '금붕어'보다 좀 더 어둡고 밀도 있는 액션물을 선보이지 않을까 싶다.
- 치열한 경쟁 시장에서 명작크루가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있나?
= 작가의 가치는 자신의 오리지널 작품을 통해 독자들의 좋은 평가를 받는 데 있다고 본다. 명작크루는 에이전시나 플랫폼의 힘이 커지고 쏟아지는 기획 작품들의 홍수 속에서 웹툰·만화 작가들의 독창성을 드러낼 수 있는 작품을 지속적으로 발굴하고 함께 성장해가는 것이 목표다. 더불어 개인적으로 콘텐츠 제작 시장에서 직접 기업 비즈니스를 해본 경험으로 동료, 크루 작가들의 미숙한 계약 문제나 여건 개선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조언이나 상담도 계속하려고 한다. 웹툰 작가들이 상생하는 생태계를 만드는 데 명작크루가 미력하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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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노컷뉴스 김민수 기자 maxpress@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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