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한 판?" 속삭이는 유혹에 넘어간 중학생…그 후 가정이 무너졌다
자금 빌리고 못 갚아 고교 선배·친구들에 협박 당해 사실상 '방치'
[편집자주] 10대 청소년이 마약에만 중독되는 것이 아니다. 도박판도 전전하고 있다. 돈을 날려 돈을 빌리고 그것을 갚지 못해 보복 위협을 당하는 것은 온라인 도박판에 매달린 10대들의 흔한 사례이다. 지난해 서울 지역에서 도박 문제로 검거된 청소년 수는 전년 대비 3배 이상 급증했다. <뉴스1>은 이번 설 연휴 '도박판의 10대' 실태를 세 꼭지에 걸쳐 보도한다.
(서울=뉴스1) 임윤지 기자 = 2019년 4월, 열네 살 중학생 김재영군(가명)은 밤 10시 학원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곁에 있던 친구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게임 한판 해볼래? 운 좋으면 돈도 벌 수 있어." 재영군은 무엇에 홀렸을까. 흔쾌히 "좋다"고 답했다.
친구가 '한 판'하자고 제안한 게임은 온라인 도박 '바카라'였다. 바카라는 일명 '트럼프'라 불리는 52장의 놀이용 카드(플레잉 카드)를 이용해 베팅해서 어느 쪽이 9에 가까운 점수인지 대결하는 게임이다.
이후 4년간 재영군은 도박에 중독됐다. 이 기간 제시간에 밥을 먹거나 씻은 기억이 없다고 한다. '베팅의 맛'에 빠져든 후 축구도 하지 않았다. 원래 재영군은 일주일에 세 번은 학교 점심시간마다 공을 찼다.
"가족과는 어떤 대화를 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재영군은 잠시 말을 멈추고 곰곰이 생각했다. "일상 얘기를 나눈 기억이 없네요. 오늘 하루는 어땠는지, 뭐, 이런 얘기도 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폭풍우'에 속절없이 휩쓸리는 배와 같은 처지
"그 순간에 딱 베팅을 멈췄으면 하루 만에 700만원 버는 건데"
도박 사이트를 켜면 하루에도 수백만원에서 수천만원이 왔다 갔다 했다. 작은 방 안에 웅크린 재영군의 눈앞엔 '대박의 꿈'이 아른거렸다. 멈추고 싶어도 자신의 의지로 어떻게 할 수 없었다. 폭풍우에 속절없이 휩쓸리는 배와 같은 처지였다.
원래 화목했던 가정이었다. 재영군이 도박에 빠진 후 부모님도 표류했다. 어머니는 회사를 휴직했다. 재영군의 일상이 무너졌고 한 가정의 억장이 무너졌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재영군을 붙들고 몸부림치듯 말했다.
"이러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왜 대출까지 해서 이렇게 무책임한 행동을 하냐"고, "부모인 우리의 아픔은 생각하지 않느냐"고.
재영군은 다만 한 가지를 기억해 냈다. 야심한 새벽 방에서 도박하다가 잠시 나온 그는 숨죽여 눈물을 흘리는 부모의 모습을 잊지 않았다. 그날 이후 재영군은 부모에게 "도와달라"고 애원했다.
"도박을 어떻게든 끊어보겠다고 신경정신과 약을 먹었어요. 스마트폰도 멀리했고요. 현실적으로 그때만 효과가 있을 뿐이에요. 평생 약 먹고 스마트폰 없이 살 수가 없는 세상인데……"
재영군은 대체 무엇을 얻고자 그랬는지 후회하고 있으며 자신으로 인해 가족이 망가졌다는 자괴감도 느끼고 있다. 차라리 수술로 중독 증세를 치료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도박을 끊은 지 석 달이 지났으나 재영군은 자신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도박을 끊고서도 또 못 참아 한두 번 더 했어요. 큰 자괴감이 들었고 매일 울었어요. 나 때문에 주변이 불행해지는데 내가 죽어야만 도박을 멈출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 듭니다."
◇단 '10초면' 청소년 도박 채팅방 찾는다…2차 범죄 우려
온라인 도박은 우리 일상에서 만연해 재영군 같은 중학생도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최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는 '가바보방(가위바위보로 돈 내기를 하는 오픈채팅방)'이 유행하고 있다. 어느 가바보방에서는 청소년 수백명이 1000원부터 수십만원 금액의 돈 내기를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9일 뉴스1 취재 결과, 해당 대화방은 차단됐으나 다른 가바보방들은 검색 결과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청소년들이 도박판을 전전하면 돈만 잃는 게 아니다. 걷잡을 수 없이 커진 도박 빚에 경제적 능력이 부족한 아이들은 2차 범죄를 저지르고 범죄에 노출되기도 한다.
이들이 절도 등 강력범죄를 저지르는 사례도 적지 않다. 지난해 6월 경기도 김포에서는 청소년들이 도박 빚을 갚기 위해 금은방 강화유리를 부수고 들어가 귀금속 3000여만원을 훔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박정민군(가명·19)은 불법 사이트에서 합법적인 '파워볼' 게임을 모방한 도박에 모든 것을 걸었다. 처음 시작한 지 6개월쯤 지났을 때 학교 선배로부터 100여만원을 빌렸다. 처음에는 돈 빌리는 것이 무서웠다. 시간이 지나니 무서움보다 조바심이 더 컸다. 나중에는 대담하게 여러 친구에게서 금방 갚겠다며 수십만원씩 빌렸다.
그러나 온라인 도박 사이트에서 그렇게 빌렸던 돈이 허무하게 사라졌다. 문제는 갚을 길이 없었다는 점이다. 선배와 친구들은 정민군의 휴대전화를 빼앗고 부모에게 알리겠다며 윽박질렀다. 정민군은 결국 부모에게 도박 사실을 고백하고 겨우 돈을 갚았다.
◇"오늘 이벤트 하는데"…번호 200개 이상 차단해도 걸려오는 전화
도박의 유혹은 음지와 양지를 넘나들며 집요하게 따라붙는다. 재영군은 계속 걸려오는 도박업체의 연락에 얼마 전 휴대전화 번호를 바꿨으나 여전히 유혹에 시달리고 있다.
전화와 문자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SNS 앱과 인터넷 사이트 광고 배너에는 '꽁머니 만 원 지급' '게임 머니 충전 시 10% 보너스 지급' 같은 도박 유도성 문구가 가득하다.
재영군은 "지금도 적게는 10통, 많게는 30통까지 도박 업체로부터 연락이 온다"며 "번호 200개 이상을 차단했는데도 대포폰으로 또 전화와 '오늘 이벤트 하는데 충전한 거 있으시냐' 물어본다"고 말했다.
뉴스1이 만난 '도박 중독' 청소년 모두는 학교 혹은 학원에서 도박을 처음 접했다. 주변 지인을 따라 온라인 도박판에 발을 들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10대 특성상 또래 집단 내 전파 속도가 빨라 한 명이 빠져들면 주변으로 확산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일부 교육 현장에서 '도박판의 10대들'은 사실상 방치돼 있다.
정민군은 "한달 넘게 학교에서 7교시까지만 출석 찍고 바로 집으로 돌아와 도박했다"며 "학교를 가지 않아도 선생님은 제가 사춘기라 공부하기 싫어해 방황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고 했다. 정민군은 "'왜 요즘 학교를 안 나오냐'고 먼저 물은 선생님은 아무도 없었다"고 떠올렸다.
immune@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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