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2시까지 돌아갔던 재봉틀…베이징의 동대문시장 '저장촌'
(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중국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 남쪽으로 5㎞를 지나는 지점. 자동차와 인력거, 가끔 보이는 베이징의 오래된 당나귀 수레까지 뒤엉킨 도로는 엉망진창이다. 크고 작은 가방을 든 행인들이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고, 다급하게 통화하는 사람들이 스쳐 간다. 어깨가 부딪히고 발뒤꿈치가 차이는 골목에는 표준어인 푸퉁화가 아닌 어우어(원저우 지방 방언)만 들린다. 마주 오는 사람은 얼굴과 몸매가 깡마른 남방 사람들뿐이다. 이곳은 베이징 의류 산업의 메카, 저장촌이다.
저장촌은 중국 동남부 저장성(浙江省) 원저우(溫州) 출신 농민들이 1980년대 후반부터 상경해 만든 이주민 촌락이다. 먹고 살길을 찾아 상경한 원저우 사람들은 베이징 외곽에 모여들어 마을을 형성했다. 그들은 호구지책으로 주로 옷을 만들어 팔았다.
원저우 사람들은 부지런하고 손재주가 좋았다. 새벽 2시까지 재봉틀을 돌리며 가죽 재킷, 양복, 유행복을 만들었다. 저장촌에서 만든 옷을 사기 위해 산둥성(山東省)뿐 아니라 러시아에서까지 구매자가 올 정도로 한때 성황을 이뤘다. 한국으로 치면 옛 동대문시장과 같은 역할을 한 셈이다. 이곳저곳의 매대에서 저장촌 사람들은 옷을 팔며 돈을 벌었고, 관계를 형성했다. 그리고 그들만의 문화를 만들어갔다.
사회학자인 샹바오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 사회인류학연구소장은 베이징대 학생이던 1992년부터 6년간 저장촌을 드나들며 그곳 사람들의 생활사를 기록했다. 3년은 공동체 내부에서 직접 관찰하며, 3년은 외부에서 조사하며 그들의 삶을 추적했다. 최근 번역 출간된 '경계를 넘는 공동체'(글항아리)는 샹바오 소장이 6년간 관찰한 저장촌 생활사를 담은 사회기록물이다. 석사 논문을 바탕으로 출간된 이 책은 중국뿐 아니라 서구권에서 극찬받았고, 샹바오라는 이름을 세계 사회학계에 널리 알리는 데 일조했다. 책은 이촌향도에 따라 베이징에 형성된 동향촌(同鄕村)이 수도에서 가장 큰 저가 의류 생산 판매 기지로 성장하는 과정을 조명한다.
저장촌 사람들은 1990년대 중반까지 노점에서 옷을 팔았다. 손님 눈에 잘 띄는 곳, 공중화장실에 가까운 곳에 매대를 설치했다. 순식간에 짐 싸는 법도 익혔다. 단속 나온 경찰을 피해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노점은 불법이었다. 저장촌 사람들은 생존하기 위해 국영상점 직원들과 친해졌고, 그들과 친구가 되기도 했다. 상점 직원들은 저장촌 사람들의 계(系)에 편입됐다.
저장촌 사람들은 모두 계(系)라는 관계망 사슬에 엮여 있었다. 계는 학연·지연 등을 골자로 한 친우권, 사업적 협력관계를 골자로 한 사업권 등으로 이뤄진 저장촌 공동체의 핵심 단위였다. 친우권과 사업권이 뒤섞이는 경우도 많았고, 한 사람이 여러 계에 속하기도 했다. 그런 알음알음 속에서 저장촌의 모든 사업과 관계가 형성됐다.
저자는 단추가 떨어져 지인의 집에 단추를 빌리러 가는 저우(朱)씨 이야기를 통해 단적으로 '계'의 모습을 보여준다.
"큰 매형과 나는 스진의 집에 갔다. '단추 좀 가져갈게'라고 하면서 한 움큼 잡았고, 옆에서 내가 세었다." 그러자 스진이 말했다. "세긴 뭘 세냐, 다 가져가, 내가 내일 아침에 사면 되는데!"
저장촌 사람들은 친구와 동향 사람을 중심으로 한 집단적 발전을 추구했다. 누구나 돈을 벌어야 하지만 동시에 좋은 친척, 친절한 고향 사람으로 남아 있어야 했다. 이와 함께 친족관계에 지나치게 깊이 연루되는 걸 경계하면서 다른 환경에 있는 새로운 사업 파트너를 끊임없이 찾았다. 이 같은 구심력과 원심력의 균형이 저장촌의 성장을 이끌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한때 10만명이 밀집했던 저장촌은 1995년부터 시작된 철거 작업으로 쇠락해갔다. 2000년대 중반이 지나면서 무허가 건물은 거의 사라졌다. 교통, 위생, 치안도 크게 개선됐다. 대형 백화점이 허술한 도매시장을 대체했다. 베이징에 남은 저장촌 사람들은 중상급 부동산을 구입했다. 그들의 삶은 도시주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형편은 나아졌지만, 저장촌 특유의 미덕도 점차 상실해 갔다. 저자는 "저장촌의 사회적 자율성, 아래로부터 스스로 조직하고 혁신하는 능력도 함께 사라졌다"고 말한다.
박우 옮김. 8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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