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 300] 예의 바르게 소름끼치는 디스토피

손정빈 기자 2024. 2. 9. 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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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손정빈 기자 = 2월 둘째주 신작과 최근 개봉작을 소개한다. 설 연휴에 소개할 영화는 모두 3편이다. 재작년 칸국제영화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된 일본영화 '플랜75'와 '킹스맨' 시리즈로 국내에도 많은 팬을 가진 매슈 본 감독의 신작 '아가일' 그리고 배우 윤여정의 4년만의 한국영화 복귀작 '도그데이즈'다.

◇이 정중한 디스토피아…플랜75


그렇게 보이지 않지만 '플랜75'는 디스토피아 영화다. 그리고 재난 영화다. 이 작품은 근 미래를 배경으로 75세 이상 노인에게 안락사를 권하는 사회를 그린다. 강요는 없다. 비유하자면, 정중한 얼굴로 최대한 예의 바르게 행동하면서 매일 찾아와 웃으면서 안락사의 장점에 관해 설명하는 관료들이 있다. "나라에 기여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겁니다." 이 고요한 영화는 어쩌면 우리에게 닥칠지 모르는 그럴싸한 미래를 제시해 관객을 고민하게 한다. 노인 문제에 국한한 얘기가 아니다. 혐오가 판치는 시대에 사회적 약자를 보는 방식에 관한 얘기다.

◇쿨하지 못해 미안해…아가일


더 이상 매슈 본 스타일은 쿨하지 않다. 이르면 '킹스맨:시크릿 에이전트'에서 늦어도 '킹스맨:골든 서클'에서 마무리를 지었어야 했다. 그러나 본 감독은 기어코 '킹스맨' 3편을 만들었고, 유사품 '아가일'을 내놨다. '아가일'은 최소한 한국 관객에겐 너무 익숙한 영화다. 한국 관객이 유독 '킹스맨'을 아꼈기 때문에 더 그럴 것이다. 특유의 B급 코미디, 화려하고 잔혹한 액션, 반전에 이은 반전까지. 이렇게 화려한 물량 공세를 퍼붓는데도 자꾸만 시계를 보게 된다. 본 감독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쿨하지 못해 미안해.'

◇착하기만 하면 매력이 없어요…도그데이즈

개 세 마리와 동네 주민들. 개를 키우며 혼자 사는 부유한 노인과 배달 일을 하며 꿈을 키우는 청년, 개를 싫어하는 건물주와 개를 너무 사랑하는 세입자 수의사, 여자친구가 맡기고 간 개 때문에 여자친구의 전 남자친구와 엮이게 된 기타리스트, 아이를 입양한 부부와 이들 앞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개. '도그데이즈'는 이 설정을 가지고 예상할 수 있는 일들만 펼쳐 놓는다. 물론 이 영화는 무해하다. 착하고, 따뜻하니까. 그런데 요즘 관객은 그런 걸 장점으로 봐주지 않는다. 오히려 단점으로 볼 것이다.

◇티모시 샬라메의 마법…웡카


이 영화를 싫어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사랑스럽다는 말이 이렇게 잘 어울리는 영화도 흔치 않다. 가족이 함께 보기에 손색 없고, 데이트 무비로도 나쁘지 않다. '패딩턴' 시리즈를 만든 폴 킹 감독의 터치가 인상적인 작품인데, 결국 얘기할 수밖에 없는 건 바로 이 배우의 매력이다. 티모시 샬라메. 천연덕스러우면서도 우수에 찬 윌리 웡카라는 이 몽상가를 관객에게 설득할 배우는 샬라메 외에 떠오르지 않는다. 그런 그가 노래하고 춤추며 관객을 홀린다.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웡카의 초콜릿을 직접 맛 본 기분이 든다.

◇진실은 스토리다…추락의 해부


지난해 칸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추락의 해부'는 한 남자가 3층 집 꼭대기에 추락해 숨진 채 발견된 사건을 네 차례 해부한다. 먼저 그가 죽은 이유를 추리하고, 다음엔 이 죽음에 얽힌 한 가족의 내밀한 관계를 파고 들어가며, 이번엔 진실이라는 게 과연 무엇인지에 관한 물음을 던진다. 이 영화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이번엔 스토리텔링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확장해 간다. 정말이지 야심으로 가득하고, 그 야심을 실현할 능력도 있다. 자주 만날 수 없는 뺴어난 작품이라고 확신한다.

◇진짜 어른의 진심 어린 충고…나의 올드 오크


'나의 올드 오크'는 연대에 관해 얘기한다. 물론 어떤 이들에겐 이 얘기가 새삼스러울지도 모른다. 영화에서 뿐만 아니라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라도 숱하게 언급되는 단어이니까. 켄 로치 감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방법 밖에 없지 않느냐고 호소한다. 고단한 삶을 버텨나가는 방법,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방법은 힘을 모으는 것 외엔 없다고. 연대 하면 모든 게 다 잘 될 거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혹시나 희망이라는 게 있다면 그것을 연대 밖에서 찾을 수 없다는 얘기다. 혐오가 대수롭지 않은 일이 된 시대에 노장의 직설은 유난히 절절해 보인다.

◇자기 연민도 희망도 없이…노 베어스


대가의 솜씨란 이런 게 아닐까. '노 베어스'는 자파르 파나히 감독 개인의 이야기이고, 이란 사회에 관한 이야기이며, 영화예술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작품은 각기 다른 세 가지 스토리가 유기적으로 맞물려 한 편의 영화가 된다. 게다가 이 냉철한 현실 인식은 또 무어란 말인가. 어떤 자기 연민도 어떤 희망도 없는 이 영화의 시각은 관객의 머리를 서늘하게 한다. 그렇다고 이 작품이 냉소로만 채워져 있는 건 아니다. 명확한 현실 인식이야말로 문제 해결의 첫 걸음. '노 베어스'를 충분히 즐기고 싶다면 자파르 파나히에 관해 알고 가야 한다.

☞공감언론 뉴시스 jb@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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