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브스夜] '과몰입인생사' 시기상조의 아이콘 이태영, 그의 유산은 "포기하지 말라"

김효정 2024. 2. 9. 0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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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연예뉴스 | 김효정 에디터] 이태영, 그가 시기상조의 아이콘이 된 이유는?

8일 방송된 SBS '과몰입 인생사'에서는 대한민국 1호 여성 법조인 이태영의 인생에 과몰입했다.

이날 방송에서는 이혼 전문 변호사 양나래가 인생텔러로 등장해 시기상조의 아이콘 이태영의 인생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오늘의 주인공에 대해 "구글이 선정한 세계 13인의 여성 중 한 명으로 꼽혔다. 무엇보다 지금 이혼해서 행복하신 분들은 이분한테 감사하다고 해야 할 거다"라며 "저도 이 분 덕에 먹고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말해 눈길을 끌었다.

과거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차관 부인 간통 사건 당시 아내 측의 변호를 맡아 재판을 승소로 이끌었던 이태영, 그는 대한민국 1호 여성 법조인으로서 당시 그를 모르는 이들이 없었다.

또한 그를 만난 사람들은 모두들 입을 모아 상여자 중 상여자, 절대 꺾이지 않는 여자라고 불렀다.

독립운동을 하던 남편이 쫓기는 생활을 하는 동안 그는 혼자 세 아이를 키우며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그리고 광복이 오자 마음 깊이 눌러뒀던 욕망을 끄집어내 대학 진학을 결정했다.

이화여전만이 여성에게 허락된 유일한 학교였으나 광복으로 법이 바뀌고 여성들도 대학 입학이 가능해졌던 것. 당시 32세에 세 아이의 엄마였던 이태영, 엎친데 덮친 격으로 남편은 정당을 창당해 정치인으로 입문했고, 넷째까지 임신하며 그의 꿈은 그저 멀리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남편은 그간 자신의 내조를 해준 아내 이태영을 위해 스스로 서포트할 것을 약속했고, 그는 남편의 적극적인 지지 속에서 공부를 시작해 1946년 여성 최초로 서울대 법대에 합격했다.

대학 생활을 하는 중에도 이태영은 자신의 본분도 잊지 않았다. 젖먹이 었던 막내에게 젖을 먹이기 위해 쉬는 시간마다 코스모스밭으로 달려갔던 것. 그의 쉬는 시간에 맞춰 남편과 시어머니는 막내를 데리고 학교로 왔고 이에 이태영은 그때마다 아이에게 젖을 먹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이태영은 단 한 번의 휴학도 없이 대학을 졸업했다. 그리고 한국 전쟁 발발로 피난 생활 중에도 수험 생활을 이어갔고 사법 고시에 당당하게 합격했다.

늘 남들이 말하는 시기상조의 꿈을 이루고자 했던 이태영. 그는 동성동본 폐지 운동을 시작했다. 수많은 유림들의 반대에도 그는 꺾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태영은 동성동본 금혼제의 생물학적 근거 부족과 모순점을 지적하며 비과학적인 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14번 국회가 바뀌는 동안 14번 개정안을 갖고 국회를 찾았지만 국회는 이를 모두 거절했다.

열네 번째 실패 후 이태영은 "우리는 아직 상처를 안 받았다. 내가 살아서 우리 여성들의 힘을 북돋아 주면서 같이 끌고 가서 법 개정하는 걸 봐야만 온전히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라며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싸워온 지 45년째 되던 1997년, 드디어 여든넷의 노인이 된 이태영에게 동성동본금혼법 위법 판결 소식이 전해졌다.

이태영은 뜻을 이뤘지만 마냥 기쁘지는 않았다. 그가 문제라고 생각한 사연들을 만든 뿌리 같은 법이 여전히 남아있었던 것이다. 이는 바로 집의 주인인 아버지가 모든 권한을 갖는 호주제. 호주제는 친권, 재산권, 성씨를 물려줄 권리 등 모든 권리를 남성에게 주었고 이로 인해 이유 없는 피해자들이 나왔던 것이다.

당시 호주제에 대해 민법 심의 위원회는 "남녀평등을 완전히 하자면 가족 제도는 파괴될 것이다. 민주주의 이념을 표방하는 국가여도 이 신분법에서는 같을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라는 이해할 수 없는 망언을 했고, 이태영 역시 이런 의견에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늙고 지친 몸을 이끌고 이태영은 서명 운동 등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관심이 없었고 결국 1998년 소원을 이루지 못한 채 85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태영이 떠난 빈자리는 컸고, 이에 호주제 폐지는 물거품이 된 것 같았다. 하지만 1년 뒤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이태영의 뜻을 같이하는 이들의 호주제폐지운동본부가 발족되고 2005년 결국 호주제의 위법 판결이 났다.

대한민국 역사에 기록적인 날로 남을 그날에 대해 여성 운동가들은 "이태영 선생님이 계셨으면 만세 부르시고 이제 인간 본연의 모습을 찾았다, 500년 묵은 남녀 차별의 벽이 허물어졌다 하셨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이태영이 남긴 진정한 유산은 포기하지 말라는 정신일 것이라며 "내가 살아있을 때 안 되는 게 무슨 소용이야 생각할 수 있지만 선생님의 삶을 보면 포기하지 않아야 하는구나, 포기하지 않으면 언젠가 변화는 오는구나 알게 된다"라며 그의 정신을 다시 새겼다.

변호사 이태영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길이 없는 데로 다녔다. 그 길을 만들어 걸었다. 그만큼 가시밭길이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도 가야만 했던 길이었다"라며 자신이 걸어온 길에 후회하지 않음을 밝혔다.

늘 시기상조라는 말을 들어온 이태영에 대해 해원은 "선생님은 맞는 때를 걸었고 시대가 늦었던 것이다. 이태영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난 정말 늦은 시대를 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라며 그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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