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칼럼] 대통령 특별대담이 남긴 더 큰 문제
참모들과 미리 머리 맞대고 사전토론·준비가 상식
대통령 없이 참모들이 준비하고 그나마 그것도 참고 안 했다니
그래서 투명·진솔한 대통령? 정말 그렇다고 생각하나
“국민께 걱정 끼치는 일이 없도록 분명히 하겠다”는 문장은 재발 방지 약속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아쉬운 점은 있다”는 문장은 어떤가? 사과는 아니다. ‘마음에 차지 아니하여 섭섭하거나 불만스럽게 남아 있는 느낌’을 의미하는 유감(遺憾) 보다도 낮은 느낌이다.
지난 7일 밤 KBS를 통해 방영된 특별대담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이른바 ‘명품 백’ 논란에 대해 처음으로 직접 이런 입장을 밝혔다. 윤 대통령은 시계에 장착한 몰카 촬영과 폭로 시점을 두고 ‘정치 공작’이라 규정하면서도 “정치 공작이라고 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앞으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게 조금 더 분명하게 선을 그어서 처신하는 게 중요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고 했다.
대통령의 말을 듣고 있노라니 그래서 그 가방은 도대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앞으로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도 궁금했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겠노라고 약속했는데 대통령 부인 개인 면담자에 대한 신원 확인과 보안 검색 절차는 어떻게 개선이 됐는지, 경호 담당자에 대한 문책은 진행이 됐는지도 궁금했다. 대통령이 제2부속실과 특별감찰관에 대해 “이런 일을 예방하는 데는 별로 도움이 안 되는 것 같다”고 심드렁한 인식을 내비쳤는데 그러면 그냥 대통령 부부의 ‘처신’을 믿고 있으면 되는 것인지도 궁금했다.
방송이 시작될 때부터 가방 이야기는 언제 나오나 싶었다. “일각에서 세상에서 가장 비싼 사과가 미국의 애플 사과고 그다음에 가장 비싼 사과가 한국산 사과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라고 기자가 운을 떼자 혹시 대통령의 사과 표명이 나오나 싶었다. 진짜 사과 가격 이야기로 흘러가니 김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이후 기자가 갑자기 ‘상당히 논쟁적인 대한민국의 사안’이라며 개고기 식용 금지법에 대해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김건희 여사’라는 말을 꺼내자 “아 이제는 나오겠구나” 싶어 귀를 쫑긋 세웠다.
생각해 보면 희한한 일이다. 국민들이 이 사건 자체에 대해선 모르는 것도 궁금한 것도 없다. 대통령실이 공식적으로 브리핑을 하거나 확인해준 것도 아닌데 다들 사실 관계를 속속들이 알고 있다. 지난 대선 기간에 김건희 여사와 통화를 몰래 녹음해 내보낸 인터넷 매체가 김 여사 선친과 교분이 있다는 친북 성향 재미 목사를 섭외해 함정을 판 것을 다 안다. 경호처가 위해 요소를 걸러내지 못했다는 것도, 문제의 가방 브랜드와 가격도 다 안다. 당사자들 사이에도 사실 관계에 대한 다툼이 없다.
오직 궁금한 것은 대통령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 앞으로는 어떻게 하겠느냐였다. 대통령 말을 다 듣고 나서도 후자는 해결되지 않았지만 전자는 풀렸다. 윤 대통령은 “문제라면 문제고, 좀 아쉽지 않았나 생각이 된다”고 했다. 이 문제로 부부 싸움을 한 적도 없다고 했다.
명품 백 사건에 대한 대통령의 인식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지만 특별대담이 남긴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방송 3일 전 녹화 직후 대통령실은 ‘윤 대통령이 녹화 전 참모들이 건넨 예상 질문과 답변을 참고하지 않고 대담에 임했다’는 식으로 일부 언론에 알리면서 “어떤 질문이든 마다하지 않고 다 받겠다. 참모들이 준비해 준 답이 아닌 내 생각을 솔직하게 이야기할 것”이라는 대통령의 발언을 전했다.
기자회견이든 인터뷰든 간에 언론의 질문을 받는 자리를 앞두고 있으면 대통령과 참모들이 머리를 맞대고 여러 예상 질문을 뽑아서 격론을 벌이고 소상한 답변을 준비하는 것이 상식이다. 정책 이슈에 대해선 구체적 논리와 수치를 준비해야 하고 외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에 대해선 답변의 파장을 가늠해보고 수위를 맞춰서 정교하게 준비하는 것이 마땅하다. 대통령 없이 참모들끼리 준비했다는 것도, 대통령이 그 내용을 참고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도 상식 밖이다.
우여곡절 끝에 1년여 만에 티비 카메라 앞에 서서 기자 질문을 받는 대통령이 준비도 없이 평소 생각만 설렁설렁 풀어놓진 않았을 거라 믿고 싶다. 하지만 대통령과 대통령실이 그걸 투명하고 진솔한 모습이라 여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언론과 국민들이 그런 걸 좋아하고 지지율에도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는 것 같기도 하다. 정말 참모들과 사전 토론 없이 대담에 임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아쉬운 점은 있다” ”문제라면 문제다” 같은 말이 나왔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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