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정답 가르치지 않는 美 교사
‘세계에서 가장 우울한 나라를 여행했다’는 미국 작가 마크 맨슨의 한국 방문 동영상이 최근 화제가 됐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시작되는 치열한 경쟁, 끊임없이 타인의 평가를 받아야 하는 유교 문화, 보이는 것을 중시하는 물질주의 등이 한국인들에게 스트레스와 절망을 야기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 진단이 맞든 틀리든, 화제가 된 것을 보면 공감하는 사람도 꽤 많았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주제와 관련해 미국에 살며 ‘이런 점은 배우면 좋겠다’고 느꼈던 일화가 하나 떠올랐다. 어느 날 아이가 다니는 어린이집에서 교사와 아이들이 곤충 도감을 함께 보는 동영상을 보내줬다. 한 아이가 거미 다리를 세어보고 “8개다”라고 말하자, 다른 아이가 “아닌 것 같은데”라며 다시 세기 시작했다. 이 아이는 이미 셌던 다리를 중복해 세고는 “9개”라고 말했다. 또 다른 아이는 “10개”라고 했다.
이쯤 되면 선생님이 “거미 다리는 8개”라고 가르쳐 주지 않을까. 그렇게 기대한 순간, 교사는 “너희가 거미 다리가 몇 개인지 알아보려고 한 것이 참 흥미롭구나”라고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그 까닭을 나중에 물어보니 “지금 나이에는 답을 아는 것보다 우선 스스로 생각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이후 아이가 더듬더듬 글자를 쓰기 시작하자, 교사는 “절대 철자법을 지적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아이 스스로 글자를 깨치고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기쁨을 느끼고 있는데, 철자법을 들이대면 그런 자긍심과 재미가 사라진다는 얘기였다.
대치동 영어 유치원에서는 만 4~5세부터 철자법 시험을 보고 만 6세쯤이면 거의 완벽한 글을 쓴다는데, 이런 교육법 때문인지 미국에는 나이가 더 들어서까지 철자법을 틀리는 아이가 흔하다. 그래서 “학교에서 도대체 뭘 가르치는 거냐. 이래서 미국의 경쟁력이 떨어진다”고 비판하는 미국인도 꽤 많다.
그럼에도 일정 나이까지는 한국도 정답을 가르치기보다 생각할 기회를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들에는 대개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인생’이 그렇다. 꼭 어느 대학을 나와야, 돈을 얼마나 벌어야, 어떤 집·차·옷을 갖춰야 한다는 법은 없다. 일이 뜻대로 안 돼도, 친구와 다르게 살아도, 각자 나름의 행복을 찾을 수 있다.
그런데 너무 어려서부터 정답 찾기를 하다 보면 그런 ‘자기 나름의 생각’을 하기가 어려워지는 것 같다. 어디 어디 대학을 못 가면 인생이 망한 것이고, 급여가 얼마 이하면 O백충(O백만원 급여 생활자를 비하하는 말)이고, 어느 나이에 어떤 차는 타야 하고…. 이렇게 없는 정답도 자꾸 만들어 내서 공연히 서로를 쥐어뜯는다. 거미 다리를 세다가 인생론으로 비약이 심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래도 정답 찾기를 좀 덜 해야 한국인들이 더 행복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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