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네 살 소년 日징용, 그 아들이 되살린 기록들

조봉권 기자 2024. 2. 9.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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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며 진실과 정성에 관해 내내 생각했다.

"2023년 계묘년. 아버지는 올해로 96세이시다. 그 세대가 그렇듯, 험한 시대의 온갖 악조건을 헤쳐 나오셨다. 일제강점기 열네 살이라는 어린 나이로 징용되어 끌려갔고 해방공간의 혼란에 이어 5년 만에 터진 한국전쟁 때는 군에 소집된 참전용사이기도 하다. 다행히도 아버지는 당신이 어린 나이에 겪은 시대의 고통을 세세한 기록으로 남기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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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14세 징용자였다- 지성호 지음 /논형 /1만9000원

- 한국 오페라 작곡가 지성호 씨
- 1928년생 아버지가 남긴 행적
- 답사·조사 거쳐 한 권의 책으로
- 日 착취와 그에 맞선 용기 그려

이 책을 읽으며 진실과 정성에 관해 내내 생각했다. 아름다움도 강함도, 최고 온도에 이르기 위해서는 결국 진실과 정성이 가장 중요하다. 이 책은 ‘아름다운 책’으로 다가왔다. 진실과 정성이 전해졌다.

부산 남구 대연동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에 전시된 조형물. 일제가 강제징용한 한민족의 아픔과 비참함을 형상화했다. 국제신문 DB


‘아버지는 14세 징용자였다’를 지은 저자 지성호는 1953년 충남 부여군 충화면에서 태어나 평생 작곡가로 활동하고 가르쳤다. 오페라 작곡으로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저자 지성호의 글은 세심하고 정확하며 문학·인문 소양이 깊고 풍성함을 느꼈다. 아무래도 가풍 같았다. 저자가 이 책에 쓴 에필로그 한 대목을 읽어본다.

“2023년 계묘년. 아버지는 올해로 96세이시다. 그 세대가 그렇듯, 험한 시대의 온갖 악조건을 헤쳐 나오셨다. 일제강점기 열네 살이라는 어린 나이로 징용되어 끌려갔고 해방공간의 혼란에 이어 5년 만에 터진 한국전쟁 때는 군에 소집된 참전용사이기도 하다. … 다행히도 아버지는 당신이 어린 나이에 겪은 시대의 고통을 세세한 기록으로 남기셨다.”

이 책은 1953년생 아들 지성호가 1928년생 아버지 지재관(책에는 지재호로 등장) 어른이 남긴, 그 치열하고 절실했던 삶의 기록에서 아버지가 직접 겪은 행적을 추려 한 권 책으로 펴낸 성취다. 아들은 에필로그에서 글을 이렇게 이어간다. “나는 아버지가 닥친 상황 속에서 그것을 겪어낸 당신의 마음을 나의 것으로 환원시키며 글을 써 내려갔다. 그 간극을 최소화하려고 당신이 징용자로 끌려간 여로와 강제노동의 현장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일본 답사길에 나섰다.” 아들은 일본어를 한마디도 못 했다. 그는 홀로 규슈에서 홋카이도까지 답사한다.

책은 1943년 ‘형님 대신’ 강제징용되어 일본으로 끌려간 14세 소년 지재호 시점에서 펼쳐진다. 재호는 충남 부여군 충화면 괸돌교회 근처 살던 1905년생 개화된 여성 구화서 씨의 아들이다. 일제강점기 독실한 개신교인이자 독립운동가로 헌신한 여성 지도자 백신영에게서 배우고 영향받은 화서는 자녀들을 반듯하게 키운다. 그런데 14세밖에 안 된 재호가 강제징용되면서, 이야기의 모든 것이 달라진다.

어린 재호가 충청도에서 강제징용되는 장면, 부산을 거쳐 시모노세키로 갔다가 멀고 멀고 또 먼 홋카이도의 산루금광에 처박혀 죽을 고생을 하는 이야기, 견디다 못해 생존 가능성이 0으로 수렴하는 위험을 무릅쓰고 동료들과 탈출 감행. 영혼 없는 기계처럼 비정하게 돌아가면서 결코 자신들이 이 짓을 왜 해야 하는지 묻지 않는 일제의 폭력·착취 시스템 또한 선명하다.

병을 앓아 목숨이 위태로워진 재호를 도와 끝내 살려내는 일본인 여성 간호사 다마코와 아이누족 여성 피야에라의 사연도 인상 깊다. ‘여성적인 것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는 말을 실감했다. 일제가 패망하자 더 큰 벽에 부딪힌다. 패망한 일제는 조선인을 조국으로 귀환시킬 능력이 없었다. 힘겹게 일본 열도를 종단하며 고향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는 재호 일행의 투쟁이 눈물겹다.

책은 소년 재호 시선에서 생생하고 진실하게 징용 현실을 기억·기록해 낸 점에서 귀하다. 현재 일본 정부가 조선인 강제징용을 부정하는 건, 워낙 오랜 세월 전쟁을 치르며 살아온 터라 뒤에 가서 시비 걸리거나 되치기당하는 일 없으려면 처음부터 시치미 딱 떼고 사실을 조작해야만 한다는 교훈을 1000년 이상 쌓아온 일본인이 그냥 자동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어서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일본 정부는 그냥 일단 “강제는 없었다”고 외치고 보는 것일 뿐이다.

14세 징용자가 보여주는 진실은 소중하다. 그 기록을 품고 아버지의 길을 답사한 아들의 정성도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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