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전원 생활의 ‘공포’
발 노릇 해주던 노인용 전동차를 열린 대문 앞에 쓸쓸히 남겨둔 채, 혼자 사시던 98세의 이웃 어른이 얼마 전 이승을 뜨셨다. 80을 넘기신 어떤 할머니는 노인 보행기에 의지해 가끔씩 끙끙대며 언덕길을 오르시고, 같은 연배의 다른 어른도 지팡이를 짚고 위태롭게 소로를 걸어 다니신다. 유치원 아닌 ‘노치원’(老稚園) 차는 아침저녁으로 노인들을 모셔 갔다가 모셔 온다. 닭 우는 소리, 개 짖는 소리, 온갖 숲새 소리 등을 빼면, 하루 종일 이곳은 적막하기 그지없는 ‘인영불견(人影不見)’의 마을이 된다.
정년 후 전원생활을 시작한 지 만 2년째, 적지 않은 상념들이 교차한다. 그간 그림 같은 산촌의 자연 속에서 동식물과 공존하며 황홀경에 빠져 지냈는데, 도회 생활의 때가 빠지고 전원의 삶에 적응하게 되자 문득 ‘현타’가 찾아왔다. 어쩌면 문명 혹은 이데올로기의 충돌보다 인적 끊어져 가는 전원의 고요함으로부터 ‘소멸의 카운트다운’은 먼저 시작될지 모른다는 불안감. 엄습하는 공포를 헛된 망상의 소치로 돌릴 수만은 없다.
두어 해 전 이사 준비 중에 면장을 만났다. 자신이 부임한 뒤 세 가구가 들어왔으나 그 사이에 아홉 분의 노인이 사망함으로써 오히려 주민 수가 줄었다며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는 그 말이 실감나지 않았으나, 지금은 분명한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동네 노인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모두 떠난 뒤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다면, 나는 끝내 빈 집들에 포위당하고 말 것이다. 지금은 아무 때나 차를 몰고 시내의 마트에도 병원에도 모임들에도 가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까. 전원생활의 지속 가능한 시간은 과연 얼마쯤일까.
전원생활의 로망이 ‘홀로 남겨지는’ 적막강산의 끔찍함으로 변하는 건 개인에게도 국가에도 재앙이다. 산업화 시대부터 시작된 인구의 도시 집중과 농촌 공동화 현상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진행돼 조만간 사람 대신 동물들이 전원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도시에 남느냐, 전원으로 가느냐’. 2010년대 후반부터 베이비 붐 세대의 은퇴가 본격화되면서 떠오른 ‘갈림길 담론’도 머지않아 ‘도시에 남아야 산다’는 ‘외길 담론’으로 바뀌지나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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