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기업에선 ‘그들만의 표준어’가 쓰였다
“부회장님, 급히 보고드릴 게 있어예.”
10여 년 전 재벌 계열사의 한 임원은 부회장의 잘못에 고언하려고 급히 헬리콥터를 타고 경남의 한 사업장까지 내려가 말했다. 평소 직원들과 회의할 땐 숨겨둔 사투리를 걸쭉하게 쓰면서 부회장을 설득했고, 결국 부회장은 사과했다. 그들끼린 ‘그들만의 표준어’를 썼는데 이것이 급할 때 효과를 발휘한 셈이다.
2004년 조사에선 영남이 38.4%
재벌 기업에서 ‘표준어’는 재벌 총수와 임원들이 소통할 때 주로 쓰인다. 창업주의 고향이 경남인 삼성이나 엘지(LG)에서는 한때 경상도 사투리가 표준어 노릇을 했다. 삼성 미래전략실 출신 전 임원은 “고위직에 영남 지역 출신이 많아 직원들과 대화할 때는 서울말을 쓰지만 그들끼리는 그 지역 말투가 스스럼없이 나왔다”고 말했다. 엘지 계열사의 전 임원도 “총수 일가 가운데 사투리가 강한 분이 많았고 그 지역 출신 임원도 많아 그들끼린 해당 지역 사투리로 대화하곤 했다”고 말했다.
2023년 방영된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에도 투영됐다. 진양철 회장이 “와(왜) 내를 죽일라 카는데, 와아”라고 말한 것처럼 그의 비서실장도 “도준군도 같은 생각 아임니까”라며 같은 말투를 썼다. 류한수 상명대 교수(역사콘텐츠학)는 “영국의 경우 지역보다 계급에 따라 말투가 다르고 ‘포시(posh) 영어’가 곧 부유층을 뜻한다”며 “한국에선 계급보다 지역에 따라 쓰는 말투가 곧 권력을 보여주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정치나 경제 분야에서 영남 사투리는 권력자의 언어였고 객지에서도 굳이 바꿀 필요가 없었던 반면, 권력에서 배제된 호남의 사투리는 해당 지역 차별과 편견 등으로 숨기는 경향을 보였다”고 설명했다.
반면 창업주 고향이 경기도 수원인 에스케이(SK)나 이북인 현대차그룹에선 조금 달랐다. 에스케이의 한 임원은 “일부 대학에 편중된 면이 있을 수는 있지만, 다른 재벌과 달리 다양한 지역의 최고경영자들이 있어 특정 지역이 두드러지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주요 재벌의 임원진을 살펴도 영남 집중 현상이 나타난다. 김용민 국민대 교수(경영학)는 2004년 ‘한국 대기업 최고경영자의 지연과 학연’이란 논문에서 1997∼2004년 상장사 2718개사를 중심으로 총수 일가와 전문경영인의 출신 지역 상관관계를 살폈다. 그 결과 기업주의 출신 지역은 영남이 38.4%로 가장 많고 서울·경기(33.6%), 호남(9.8%), 강원(7.2%), 충청(5.4%) 순이었다. 전문경영인은 서울(39.9%)과 영남(31.8%)이 주를 이뤘고 충청(12.4%), 호남(10.7%), 강원(1.8%) 등의 순이었다. 특히 기업주가 영남 출신이면 전문경영인은 48.8%가 영남 사람이었다. 호남 출신의 경우 동향 전문경영인이 53.0%로 더 높긴 했지만, 전체 기업주가 영남(38.5%)에 비해선 10. 2%로 적었다.
“영남 출신 은퇴 뒤 다양한 지역 임원 등용돼”
<한겨레>가 2006년 1월 보도한 삼성·현대차·엘지·에스케이 등 4대 그룹 경영진 분석에서도 총수를 제외한 전체 114명 가운데 서울·경기 출신(57명·50%)에 이어 영남 출신이 40명(35.1%)으로 가장 많았다. 반면 충청(9명·7.9%), 호남(6명·5.3%)은 적었다. 특히 삼성은 사장급 이상 51명 가운데 26명(50.9%)이 영남 출신이었다.
영남을 중심으로 작동하는 구심력은 호남 등 다른 지역을 상대로는 원심력으로 작동했다. 2013년 중국 출장길에 만난 재벌 계열사 한 임원은 술이 불콰해지자 “호남 출신으로 상무까지 온 것도 스스로 대견하지만, 앞날은 장담하기 어렵다”고 푸념했다. 그가 전남 출신임을 밝히기 전까지 말투로는 출신 지역을 가늠하기 힘들었다.
시간이 흘러 재벌들의 경영권 승계가 대부분 3·4세까지 이어지면서 그들만의 표준어 역할은 줄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나 구광모 엘지 회장 등은 서울에서 성장했다. 1970년대생이 임원까지 성장하고 이른바 엠제트(MZ) 세대가 직원의 상당수를 차지하면서 달라졌다고 한다. 1970년대생 삼성 계열사 임원은 “영남 출신 임원들이 은퇴한 뒤에는 다양한 지역 임원들이 등용되면서 과거와는 다르다”고 말했다. 비슷한 나이의 엘지 계열사 임원도 “1960년대생까진 그런 문화가 남아 서로 감싸주기도 했지만, 이젠 출신 지역도 다양해지고 성과로 평가받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하지만 가해자는 쉽게 잊어도 피해자는 기억을 각인하는 것처럼 차별을 느끼는 이들은 있다. 특히 지역과 계급에서 ‘이중차별’을 겪는 호남 사람들은 더욱 그렇다. 1980년대 말 얘기지만 강원도 출신 정치학자 전인권씨가 쓴 <김대중을 계산하자>에 등장하는 사연은 적나라하다.
“어느 날 영업회의가 끝난 후 회식을 하는데 옆 부서의 박 부장이 동석했다가 아주 끔찍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너 그때(5·18 민주화운동) 김일성 찬가 불렀지? 아주 전라도 인민공화국을 만들어버리지 그랬어! 빨갱이 새끼, 여기는 뭐 하러 왔어?’ 시간이 지나고 술에 취할수록 박 부장의 인신공격은 더욱 심해졌다. 참으로 안타까웠던 일은 김 과장의 태도였다. 그런 폭언을 듣고도 김 과장은 고개를 푹 숙인 채 거의 할 말을 잃고 있었다. 그런데 김 과장은 가끔가다가 모깃소리만 하게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게 얼마나 평화적인 시위였다고… 태극기를 흔들고. 아줌마들이 김밥을 싸오고….’”
서울과 강남, 유학파 다른 상징자본으로 확대
과거의 일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2000년대 들어서도 피죤은 한때 전라도 출신을 배격하는 모습을 보였고, 한 은행 지점장은 직원과 고객을 호남 출신이라는 이유로 차별 행위를 했다가 인사 조처를 받기도 했다. 재벌 계열사에서 일하는 호남 출신 직원은 “과거보다는 줄었지만 고위직이 총수 일가와 동향이면 프리미엄이 있는 것 같고, 승진하기 위해선 다른 지역 출신보다 두세배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권력자의 표준어인 영남 사투리는 상징자본으로서 역할을 했고, 현재 진화 중이라는 평가다. 윤석진 충남대 교수(국문학)는 “사투리가 표준어 개념에선 주변어인데 특정 조직에서는 중심어 역할을 하기도 한다”며 “정치권력처럼 일부 재벌 고위 임원진이 공용한 영남 사투리는 동질감을 보여주고 조성하는 상징적인 역할을 했고, 여기에 포함되기 어려운 다른 지역인들은 배제되기 쉬웠다”고 말했다. 이어 “재벌 총수 일가의 후손이 서울에서 성장했지만 그 뿌리가 영남인 점을 고려하면 사투리를 쓰지 않아도 서울과 강남, 유학파 등 다른 상징자본으로 확대됐다”고 말했다.
이정훈 기자 ljh9242@hani.co.kr
참고 문헌
<김대중을 계산하자>, 전인권, 새날, 1997
<전라디언의 굴레>, 조귀동, 생각의힘, 2021
*알쓸재사: 재벌과 기업의 적절한 관계는 무엇일까. 기업은 물론 국가 경제에 영향이 큰 재벌들의 사정을 살펴본다. 알아두면 쓸모있는 재벌집 사정.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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