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장에 수류탄까지... 파키스탄 ‘피로 얼룩진 총선’

류재민 기자 2024. 2. 8.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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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오전 8시(현지 시각)부터 파키스탄 총선 투표가 시작된 가운데 옛 수도 카라치 가리에서 무장 군인들을 태운 트럭이 순찰하고 있다. 파키스탄에서는 경제난과 정치 불안이 계속되는 가운데 테러까지 기승을 부리고 있다./AFP 연합뉴스

세계 5위 인구 대국(2억4000만명) 파키스탄의 차기 총리를 뽑는 총선이 8일 실시됐다. 전날 30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연쇄 폭탄 테러에 이어 투표 당일에도 무장 괴한의 공격으로 8명이 숨지는 등 어수선한 상황에서 임기 5년의 연방 하원 의원 266명(비례대표 70명 별도)을 뽑으려 1억2800만 유권자가 이른 아침부터 투표소로 향했다. 40%가 넘는 문맹률로 글을 읽지 못하는 유권자가 많은 점을 감안해 투표용지에는 후보 이름뿐 아니라 소속 당을 상징하는 큼지막한 마크도 함께 인쇄됐다.

파키스탄은 1947년 독립 이후 서구식 의원내각제를 도입해 총선을 치러왔지만 제대로 임기를 채운 총리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고질적인 정치 혼란에 시달려 왔다. 이번 총선 역시 예외는 아니다. 만성적 경제난에 시달리고 있는데도 총선을 앞두고 후보 간의 극심한 대립으로 나라가 둘로 쪼개졌고, 유혈 사태가 잇따랐다. 총선 결과는 2주 내에 나올 예정이다.

이날 선거는 극도의 긴장감 속에 진행됐다. 파키스탄 당국은 9만여 투표소에 군경 등 치안 병력 65만여 명을 배치하고 전국의 휴대전화 통신 서비스를 차단했다. 내무부는 이날 낸 성명에서 “최근 발생한 테러 사건으로 소중한 인명이 손실된 만큼 잠재적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보안 조치가 필수적”이라고 이유를 밝혔다. 파키스탄 외무부는 이란·아프가니스탄과의 국경을 폐쇄하기로 했다.

전날 남서부 발루치스탄주의 후보 사무소 부근에서 30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연쇄 폭탄 테러가 발생한 뒤 수니파 이슬람 무장 단체 이슬람국가(IS)는 자신들의 소행임을 주장했다. 선거 당일에도 북부 카이버 파크툰크와주 투표소에 무장 괴한이 난입하는 등 테러가 벌어지며 군인과 경찰 등 최소 8명이 사망했다.

이번 총선은 테러 발생 전부터 후보들 간의 혼란과 군부의 무리한 개입 등으로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총선은 과거 총리직을 주고받았던 나와즈 샤리프와 임란 칸 두 정적의 경쟁 양상으로 치러졌는데, 둘 사이의 분쟁 가운데 나라가 극도로 분열됐다. 두 사람은 각각 중도우파 정당인 파키스탄무슬림연맹과 이슬람 민족주의 성향 파키스탄정의운동을 이끌고 있다.

두 사람의 이력엔 파키스탄의 정치 혼돈 상황이 녹아들어 있다. 파키스탄을 대표하는 부잣집이자 정치 명문가 출신 ‘금수저’ 샤리프는 수차례 정치생명이 끊기는 듯했다가 ‘좀비’처럼 살아났다. 1990년 처음 총리가 됐다가 3년 뒤 정파 간 갈등으로 축출됐다. 이후 1997년 총리직에 복귀했지만, 2년 뒤 쿠데타로 실각했고, 납치·테러·부패 혐의 등으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사우디아라비아 망명 뒤 2007년 귀국해 2013년 총선 승리로 세 번째 임기를 시작했지만, 글로벌 부패 스캔들인 파나마 페이퍼 사건에 연루되면서 다시 쫓겨났다. 7년 형을 선고받고 보석 기간에 영국 런던에서 머물다 작년 10월 귀국했다. 세 차례 총리직에 올랐다가 모두 중도에 쫓겨난 그는 네 번째 총리직에 도전하는데 현재로선 승리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 우세하다. 실세인 군부의 지지를 받고 있는 데다 최대 라이벌 칸이 부패 등 혐의로 수감돼 있어 아예 출마할 수 없기 때문이다.

파키스탄의 국민 스포츠인 크리켓 국가 대표 출신으로 높은 대중적 인지도를 가진 칸은 2018년 총선에서 반부패·족벌주의 청산, 이슬람 민족주의 강화 등의 구호를 걸고 젊은 층과 서민들의 폭발적 지지를 받으며 당선됐다. 그러나 친중국 일변도의 대외 노선과 포퓰리즘 경제 정책 등으로 야당 및 군부와 사사건건 충돌했고 2022년 의회 불신임을 통해 축출됐다. 그는 지난해 8월 부패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수감된 뒤 국가 기밀문서 유출, 불법 결혼 등으로 추가 기소돼 형량이 징역 34년까지 늘어난 상태다. 게다가 향후 10년간 공직을 맡을 수 없도록 하는 조치까지 취해졌다. 이에 칸은 변호사 출신 고하르 알리 칸을 총리 후보로 내세웠다. ‘박해받는 순교자’의 이미지로 칸의 지지층이 막판 결집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실제로 칸은 전례 없는 ‘옥중 온라인 유세’까지 펼치며 지지자들의 투표를 독려하고 있다.

파키스탄에서는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선거를 치를 때마다 대규모 인명 살상 테러가 벌어지는 악순환이 되풀이돼 왔다. 지난 2018년 7월 총선 때도 투표일 직전 연쇄 테러로 14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2013년 5월 총선 때도 70여 명이 희생됐다. 2008년 1월로 예정됐던 총선 때는 승리가 유력시되던 여성 정치인 베나지르 부토 전 총리가 유세 중 자살 폭탄 테러로 암살되면서 선거 자체가 한 달 미뤄지기까지 했다.

파키스탄은 1947년 독립 후 주변국인 인도·방글라데시와 전쟁을 치렀고, 세 차례 군부 철권통치 기간도 겪었다. 이런 격변 속에서도 의원내각제를 유지하고 있지만, 고질적인 정치 혼란과 내정 불안으로 선거 때마다 유혈 참사가 되풀이되는 양상이다. 파키스탄은 인도와 영토 분쟁을 벌이는 핵보유국이고, 미국의 남아시아 군사 협력국이자 중국의 일대일로 파트너다. 또 IS·탈레반 등 인명 살상 테러로 국제사회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이슬람 무장 단체 근거지와도 접경해 있다. 이렇게 지정학적 요충지이면서 ‘화약고’라는 특성 때문에 파키스탄 선거엔 매번 국제사회의 시선이 집중돼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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