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거리 위에서 설 맞더라도…마음만은 따뜻하길”
농성 당사자와 활동가들
도란도란 모여 전 부치기
올 설에는 3곳 방문 예정
“슬퍼도 함께 나누며 이겨내
거리 차례 없는 날 꿈꾼다”
설 연휴를 앞둔 8일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 ‘비정규노동자의집 꿀잠’(꿀잠)에는 아침부터 노릇노릇 전 부치는 냄새가 가득했다. 거리에 서서 마이크를 잡고 발언하는 게 일상이 되어버린 농성 당사자들과 인권 활동가, 꿀잠 상근 활동가 등 12명은 이날 꿀잠에 모여 앞치마를 두르고 뒤집개를 들었다. “더 조그맣게 썰까” “부침가루는 덜 묻혀도 되겠다” “간 좀 봐봐” 등 이들이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동그랑땡·우엉전·호박전·동태전이 먹음직스럽게 익어갔다.
이들은 명절에도 농성장을 지켜야 하는 유가족·노동자들을 위해 설 당일 ‘거리 차례’를 지내고자 조금 이르게 차례상 준비에 나섰다. 꿀잠은 5년째 설과 추석에 ‘길 위의 차례’ 행사를 진행해왔다. 꿀잠은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2005년 사측의 불법파견·부당해고에 맞서 12년 동안 투쟁한 ‘기륭전자 사태’ 이후, 노동자들이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공감대에 따라 2017년 문을 연 쉼터이다.
올해는 10일 설 당일에 서울 강서구 방영환 택시노동자 분향소, 서울 여의도 이룸센터 앞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농성장, 서울 명동 세종호텔지부 농성장에서 순차적으로 거리 차례를 지내기로 했다.
우엉과 당근을 차분히 다듬는 허지희씨(53)는 거리 차례 준비가 이번이 5번째다.
명동 세종호텔에서 28년간 일했던 그는 2021년 12월 ‘코로나19로 인한 경영 악화’를 이유로 해고된 후 동료들과 함께 3년 넘게 복직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허씨는 “내년 설에는 깔끔히 복직돼 농성 주체가 아닌 연대자로 여기 오고 싶다”며 웃었다. 지난해 2월 코로나19 당시 해고가 부당했다는 대법 최종 판결을 받은 아시아나케이오의 사례는 그에게 희망이다. 허씨는 “아시아나케이오처럼 저희보다 빨리 해결되는 농성장들을 보면, 우리도 저렇게 마무리되는 시간이 오겠지 생각하게 된다”고 했다.
김종현 공공운수노조 택시지부장(52)은 익숙지 않은 손길로 호박에 계란 물을 묻혀내고 있었다. 김 지부장은 이번 설에 방영환 택시노동자의 분향소를 지킬 계획이다.
그는 “여전히 해성운수에선 완전월급제 시행 등을 요구하며 분신한 방씨의 유족에게 사과할 생각이 없는 듯하다”며 “장례를 치러 고인을 잘 보내드리고 저희도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텐데 어느덧 설이 됐다”고 했다.
활동가들은 “거리 차례를 지낼 일 없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고 입을 모았다. 구로공단에서 20년 넘게 노동상담을 해온 문재훈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소장(60)은 “농성장이 많을수록 슬픈 사회가 되는 것”이라며 “명절에 편하고 행복하게 쉬면 좋지, 누가 농성장을 지키고 싶겠냐”고 했다. 이어 “매년 이럴 일을 없애기 위해 차례를 모시는 것”이라고 말했다.
따뜻한 정이 모인 꿀잠의 이날 차례 준비 현장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명숙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활동가는 “투쟁 구호가 아닌 이야기를 서로 나누며 서로를 더 잘 알게 되는 듯하다”고 했다. 김소연 꿀잠 위원장도 “현실은 힘들지만, 매번 음식을 할 때마다 ‘하하호호’ 웃으면서 즐겁게 보내왔다”고 말했다.
전국 각지 활동가들이 보내온 조기·한과 등도 한가득이었다. 김 위원장은 “농성자들이 기왕이면 잘 먹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다 같은가보다”라며 “이렇게 모여서 나누는 게 공동체 문화가 아닐까 싶다”고 했다. 이날부터 9일까지 준비된 음식은 10일 오전 각 농성장의 차례상에 오를 예정이다.
전지현 기자 jhy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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