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태훈의 법과 사회] 법률가 정치인 세상

기자 2024. 2. 8.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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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가는 법 규정에 얽매여 산다. 법전을 뛰어넘을 생각도 하지 않지만, 해서도 안 된다. 법전과 판례를 금과옥조로 여긴다. 성직자와 신도들이 종교의 가르침이 적힌 경전을 절대시하는 것과 유사하다. 법률가는 법 규정의 문장과 단어가 무슨 의미인지를 밝혀 사안에 적용하는 것을 사명으로 한다. 그들은 법률이라는 틀 속에서 사고하고 행동하는 데 익숙하다. 검사는 기소 여부나 유무죄를 범인과 협상하거나 타협해서는 안 되고 판사도 마찬가지다. 유죄 아니면 무죄, 원고 승소 아니면 패소 양자택일밖에 없다.

이에 비해 정치는 선택지가 다양하다. 정치는 대립과 갈등의 조정 과정을 거쳐 합리적인 해결책을 모색하는 행위다. 대화, 협상과 타협이 정치의 본령이자 생명이다. 정치인이 상대해야 할 국민은 유죄와 무죄, 합법과 불법으로 갈라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간다는 의미에서 동료 시민이지만 성별, 나이, 이념, 기득권층, 외국인, 사회적 약자 등 다양하고 이해관계가 복잡한 국민이다. 갈수록 진보와 보수 진영 간의 대립과 갈등은 양극단으로 치닫고 사회 경제적 불평등은 심화하고 있다. 이렇게 대척점에 놓인 이해관계와 갈등을 공정하게 조정하여 제도와 법을 만들고 정책을 시행하는 것이 정치의 일이다. 다양한 국민을 통합하는 능력, ‘하나만 같아도 동지’로 보는 유연한 사고와 포용력이 정치인의 덕목이다. ‘하나만 달라도 적’으로 편 가르지 않고 대화와 설득으로 내 편을 만드는 것이 정치다. 소통해서 차이를 확인하고 이해를 조정하고 타협에 타협을 거듭해 절충적 합의점을 끌어내는 협상력이 정치의 힘이다.

사회생활 자체가 정치 행위라지만 정치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알려진 이름을 등에 업고 입문한다 해도 성공하기 어렵다. 훈련된 자만이 할 수 있는 전문가 영역이다. 분쟁을 해결한다는 점에서 법률가와 정치인은 공통이다. 문제는 법률가는 선과 악, 유죄와 무죄, 승소와 패소라는 이분법으로 해결하지만, 정치인은 그 갈등과 이해를 조정하여 대다수가 만족할 절충점을 찾아내야 한다. 중간지점이나 회색지대가 있을 수 있다. 이처럼 정치인의 무대인 여의도의 문법과 법률가의 마당인 서초동의 문법은 다르다. 그래서 어제까지 양자택일의 한계 내에서 움직여야만 했던 법률가가 하루아침에 다수결과 소수 존중, 대화와 타협을 원리로 하는 정치인으로 변신하기는 쉽지 않다. 법조인에게는 찬사인 원칙주의자, 대쪽 등 수식어는 정치에는 부적합하다는 꼬리표다.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정치인 중엔 법률가 출신이 많다. 국회의원의 비중이 너무 높다는 지적도 있다. 그런데 미국이나 독일에도 법률가 출신 정치인이 적지 않은 것을 보면 과다 대표 자체가 우리만의 현상은 아니다. 문제는 판검사가 옷을 벗자마자 곧바로 정치인으로 변신하는 사례가 많다는 점이다. 정치인으로서의 자질과 자세, 사고와 행동이 아니라 스타성이나 엘리트라는 점을 이용해 유권자의 선택을 받는다는 점이다. 법의 잣대로 법적 분쟁을 양자택일로 재단했던 판검사가 곧바로 정계에 입문하여 대화, 설득, 협상이 정수인 정치를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의문이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부터 지역, 시민단체, 정당 등 아래로부터 정치적 훈련과 경험을 쌓은 법률가가 정계로 진출하는 것이 일반적인 외국의 정치무대와 대비된다. 우리도 많은 법률가가 양성되어 사회 곳곳에 퍼져 그들이 정치적 사고와 훈련 과정을 거쳐 입법자가 되는 것, 정치인이 된다면 그들이 과잉 대표된다고 걱정할 일은 아니다. 총선을 앞둔 지금 각 정당은 공천심사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여전히 판검사 출신의 많은 법률가가 공천 대상으로 거론되고 있다. 낙하산 떨어지듯 하향식 인재 영입이 아니라, 장원급제한 엘리트라는 장점 때문이 아니라, 진정 정치인의 덕목과 자질을 갖추고 있는지가 공천 기준이어야 좋은 정치를 기대할 수 있다.

하태훈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장 고려대 명예교수

하태훈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장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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