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군 지하공작원으로 독립운동 함께 한 중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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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 중이던 1940년 중국 난징에 왕징웨이 정부가 들어섰다.
동병상련이랄까, 일제 침략을 받은 한국과 중국의 비슷한 처지에 청년들은 연대의식을 느꼈을 것이다.
일본군에 징집된 중국 땅의 조선인 청년들을 탈출시켜, 멀리 장제스 정부와 광복군 2지대가 있던 시안까지 데려다주는 지하활동을 했다.
광복군은 중국을 바로 떠나지 못했고, 남한에 자리잡은 미 군정의 환영을 받지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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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역사다] 쑤징허(蘇景和) (1918~2020)
중일전쟁 중이던 1940년 중국 난징에 왕징웨이 정부가 들어섰다. 일본 제국이 뒷배를 봐주는 괴뢰정부였다.
당시 난징에는 식민지 조선에서 유학 온 청년들이 많았다. 난징 국립중앙대학에 다니던 쑤징허는 자연스레 조선인 유학생들과 함께 어울리고 공부했다. 동병상련이랄까, 일제 침략을 받은 한국과 중국의 비슷한 처지에 청년들은 연대의식을 느꼈을 것이다.
쑤징허는 조선인 대학생들의 지하 서클에 참가한다. 학교 몰래, 일본 사람들 몰래, 조선의 독립운동을 돕기 시작했다. 1940년대 초반 일본 군대의 동향을 수집하고, 조선 청년의 광복군 합류를 주선했다. 1944년부터는 광복군 일에 더 열심히 나섰다. 일본군에 징집된 중국 땅의 조선인 청년들을 탈출시켜, 멀리 장제스 정부와 광복군 2지대가 있던 시안까지 데려다주는 지하활동을 했다. 이렇게 그가 광복군에 데려다준 사람이 100명에 이른다고 한다. 해방 전까지 광복군 규모가 수백명 수준이었다고 하니 쑤징허의 공이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다.
광복군은 미군과 함께 훈련하여 한반도에 진군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했다. 고대하던 해방이었으나 현실은 복잡했다. 광복군은 중국을 바로 떠나지 못했고, 남한에 자리잡은 미 군정의 환영을 받지도 못했다. 끝내 중국 땅에서 군대를 해산했다. 한반도에 돌아와서는 좌우 대립과 분단과 한국전쟁에 휩쓸려야 했다.
중국도 1950년까지 국공내전의 고통을 겪었다. 쑤징허는 그해 중국공산당 간부가 돼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1960년대 말 문화혁명이 일어난 뒤 핍박받고 가족과 함께 시골 농장으로 하방됐다. 한국광복군과 친했다는 게 핍박받은 이유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1992년 한국과 중국이 수교했다. 쑤징허는 한국에 살던 조일문 등 옛 동지를 만났다. 1996년에는 한국 정부가 주는 훈장을 받았다. 2020년 2월9일 101살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한국에도 그의 활동을 기억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국적과 민족을 뛰어넘은 연대, 제국주의에 맞선 용기였다.
김태권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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