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라함의 축축함을 거둘 누구나의 예술

한겨레 2024. 2. 8.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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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경의 이방인, 초라함의 상대성]

15 _아시아미디어컬쳐팩토리

2012년 소희와 친구들은 드디어 공간을 마련했다. 프리포트(Freeport)라 이름 지었다. 이주민들이 처음 마주하는 공간이 공항이나 항구이기에 자유로운 포트를 만들자, 전원을 꽂는 곳도 포트니 다양한 포트를 꽂는 플랫폼이 되자는 의지였다. 그리고 인테리어를 좀 아는 노동자를 물색했다.

2022년 발표한 음악드라마 ‘Attention 어텐션’을 소개하고자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아시아미디어컬쳐팩토리(AMC) 옥상에서 재현했다. AMC 활동가 라쉐드의 경험을 바탕으로 고용주와 주변인의 무배려, 좁은 숙소에서 움직이기 힘든 몸으로 견뎌야 했던 일 등 한국 사회에서 이주노동자가 겪어야 하는 부조리한 상황을 움직임과 음악드라마로 구성했다. 아시아미디어컬쳐팩토리 제공

영화 ‘빠마’에서 니샤를 보았다. 농촌으로 시집 온 방글라데시 여성이 자신을 잃지 않고 적응하려는 내용이다. 아침이면 자전거를 타고 한국어를 배우러 간다. 시어머니는 아이 갖기를 채근한다. 분위기를 풀려고 고기를 사 들고 온 남편. 삼겹살을 굽고는 작은 불판에 모슬렘 아내를 위해 소고기를 올린다. 어머니의 호통이 날아든다. “이게 무슨 한식구 밥상이냐!” 며칠 뒤, 새댁의 긴 머리칼은 시어머니의 성화에 못이겨 ‘아줌마 파마’ 머리가 된다. 영화 ‘빠마’는 그렇게 고조된다. 주인공 니샤를 지난해 12월17일 서울 민주노총 강당에서 열린 ‘세계 이주노동자의 날 기념대회’에서 만났다. 특별공연인 ‘나의 비자’에 출연하러 왔단다.

니샤는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에서 학교에 다니며 극단 활동을 했다. 유학을 가고 싶었지만 부모님이 반대해 일단 돈 벌고 오겠다 허락 받아 한국에 왔다. 수원 닭 가공공장에 배치됐는데 창고가 숙소였다. 남녀를 한데 넣었다. 니샤는 이주노동자노동조합을 찾았고, 수석부위원장 섹알 마문을 만났다. 마문은 영화감독이자 이주민과 선주민 예술가들이 함께하는 아시아미디어컬쳐팩토리(AMC) 활동가다. 니샤도 AMC 식구가 됐다.

이주노동 계약이 끝날 즈음 한국 대학에 입학하려던 니샤는 절망했다. 유학비자로 바꾸려면 방글라데시로 돌아가야 해서다. 마문에게 머리를 빡빡 깎겠다고 말했다. 부모님이 결혼시키려 해도 신랑감이 달아날 거라며 야물게 입을 다물었다. 마문은 가부장제 속 여성의 굴레가 참으로 보편적이라 생각하며, 니샤에게 영화에서 깎자고 제안했다. ‘빠마’가 탄생했다. 지금 니샤는 수도권 한 대학에서 국제관계학을 공부한다. 니샤는 AMC를 ‘엄마의 미소’라고 표현했다. 다카 학교에서 주말에 집에 오면 달려나와 “니샤, 왔구나!”라며 맞아주던 엄마 같다고 미소 지었다.

연극&퍼포먼스 ‘나의 비자’는 지난 가을 열두돌을 맞은, AMC가 주최한 서울이주민예술제 폐막작품이다. 비자 종류가 시민 등급처럼 낙인찍히는 이주민의 현실을 드러냈다. 비자 유지를 위해 속박된 삶을 사는 이주노동자, 번듯한 직장인 한국 남성과 결혼했다고 인권침해인지 행정절차인지 모를 대우를 받는 아시아계 여성 등을 보여준다. 무대는 음악과 빛과 춤으로 약동했다. 이주노동자, 이주예술가, 유학생, 선주민예술가 15명이 5개월여 준비한 창작극이다. 비행기 좌석 등급처럼 칸칸이 분리되어 가는 21세기 지구인의 삶일 수 있다.

연출과 안무는 선주민 현대무용가 길서영이 맡았는데, 배우들의 감정을 퍼 올릴 필요가 없었다고 회상했다. 전문예술인들이 내용 생산을 고민하며 바깥을 주시한다면 이주민들은 삶 자체가 사회에 고하는 언어이기에. 서영이 한 친구에 관해 말을 꺼냈다. 일요일 새벽마다 자전거로 10㎞를 달려 경기도 여주 버스터미널에서 첫 차를 타고 영등포구 문래동 AMC로 왔던 시물 일리야스다. 그도 문래역 7번 출구에 나오면 ‘우리 동네에 왔구나!’ 안도했을텐데, 방글라데시로 돌아가야만 했다. 쉬는 날 쉬지 않고 나다녔다며 사용주가 계약연장 약속을 파기했다. 그는 AMC의 창작극 ‘우리 동네 식당’의 주연배우였다. 마음이 모이고 발길이 모이면 기운찬 일이 꾸려지고 감정과 밥을 나누는 마을이 되는 것 같다.

2018년 제7회 서울이주민예술제에서 발표한 연극 ‘우리 동네 식당’의 한 장면. 이주노동자이자 문화활동가인 자한길 알럼 감독이 각본을 쓰고 연출한 작품으로, 이주노동자들이 자주 찾는 식당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이주민과 선주민 동네 사람들의 진솔한 삶 속에 담긴 웃음과 눈물을 그렸다. 아시아미디어컬쳐팩토리 제공

AMC는 다큐멘터리 감독 정소희와 마붑 알엄이 의기투합해서 시작했다. 이주노동자 출신 예술가들과 뮤직비디오를 만들고 미디어교육을 하며 2년쯤 지났을 때, 아름다운재단에서 한 단체를 뽑아 비영리단체로 자리 잡도록 3년간 지원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신청했고, 선정되었다. 2012년 소희와 친구들은 드디어 공간을 마련했다. 프리포트(Freeport)라 이름 지었다. 이주민들이 처음 마주하는 공간이 공항이나 항구이기에 자유로운 포트를 만들자, 전원을 꽂는 곳도 포트니 다양한 포트를 꽂는 플랫폼이 되자는 의지였다. 그리고 인테리어를 좀 아는 노동자를 물색했다. 마붑은 섹알 마문에게 연락했다. 2003년에 이주노동자 권익을 위해 싸웠던 친구로 한국인 여성과 결혼해 평범히 지낸다고 생각했다. 마문은 공장보다 의미 있는 일을 하라는 아내의 준엄한 당부에 사표를 내고 고민하던 차였다. 지금 소희와 함께 AMC를 떠받치고 있다.

소희는 공간을 마련하고서야 그 필요성을 더 깊게 느꼈다. 이주민에게는 눈치 보지 않는 곳이 중요했다. 초단편 영화를 만들도록 미디어 워크샵을 하고 두 작품을 뽑아 상패를 줬는데, 수상자인 나임과 라쉐드가 상패를 놓고 갔다. 이주노동자였는데 둘 데가 없어서란다. 창작자로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은 프리포트 뿐이었다. 이주노동자들은 AMC가 집이라고 말한다.

나임이 만든 작품은 ‘엄마의 편지’다. 주인공이 가만히 있는데 프레임 밖에서 자꾸 쪽지가 날아든다. 밥 먹어라, 외투 챙겨라. 밥통을 열어도 쪽지가 있다. 엄마의 쪽지였다. 그리운 잔소리. 라쉐드는 부인을 그리는 마음을 담았다. 결국, 일상의 부조리가 아무리 괴로워도 첫 영화에 담을 오롯한 그것은 사랑의 변주인가 보다. 이주한 자에게 그리움이란 마음 속 개울 같다. 내 안에도 흐르는.

AMC의 슬로건은 ‘예술을 원하는 우리’다. 그들을 설명하는 표어. 모든 서술과 수사를 떨어뜨리고 남겨진, 그들이 그곳에 있는 단단한 이유말이다. ‘나는 누구인가?’ 답을 찾고자 소비한 단어들이 누구나의 가슴에 수북이 쌓여 있듯, 그 고갱이가 남겨지도록 프리포트를 오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생각으로 자신을 찾고 설명하려 했을까? 나는 AMC의 슬로건에서 누구나 원할 수 있고 아무나 원해왔기에 예술이 아직 살아있음을 확인한다. 돈의 논리와 무시에 꺾이지 않은 기개를 느낀다.

12년 동안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를 발표해온 마문에게 물었다. ‘예술이 힘이 있나요?’

“2012년 아내가 이혼하자고 했어요. 제가 가구공장 공장장이었고 월급도 꽤 받았는데 ‘당신에겐 자신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공간이 없다. 생각하는 공간이 단 하나고 그 안에 공장만 있어’라고 하더군요. 저는 사람 안에 공간이 몇개 있어야 하나? 공간은 하나 아닌가? 마음이 하나잖아. 이렇게 생각했죠. 예술하면서 내 안에 공간이 많아지는 걸 알았습니다. 한 공간에서 사람에 대해 생각하고, 다른 공간에서 아내를 생각하고, 또 다른 공간에서 노조에 대해 생각하는. 전에는 다 한공간에 섞여 있었어요. 그래서 아내를 좋아한다고 말할 때도 공장이야기를 했죠. 주머니가 늘수록 생각과 표현이 다양해집니다. 슬픔을 느낄 때, 내 안의 어느 주머니에서 생각을 꺼내 극복할 수 있고 다른 사람한테 나눠줄 수도 있어요. 저는 우리 사회가 사람들에게 예술을 누리는 권리를 채워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예술은 마음을 담아내는 시간인 것 같다. 도공들이 만든 무수히 많은 그릇 가운데 어떤 그릇은 예술이라 일컬어지는 이유도 만든이의 마음이 담겨서일 터다. AMC에서는 자기 이야기를 담도록 이끈다. 그러려면 자신을 알아야 하니 생각할 수 밖에. 그 시간이 곧 주머니를 만드는 시간 아닐까? 나의 모멸감을 이해하려면 그 상황 속에서 힘을 발휘한 온갖 사고를 헤집어야 한다. 자연스레 남의 마음도 읽게 된다. 생각이 넓어진다는 것은 감정의 부딪침 속 나와 남의 마음을 헤아리는 여유일 것이다. 마문이 제기한 예술의 권리를 보다 많은 이가 누린다면 혐오도 스러지지 않을까? 우리는 주머니 속 핫팩에 기대어 혹한을 건너왔다. 예술이라는 온기를 지펴 세상에 ‘여유’를 더하면 좋겠다. 아지랑이 피워올리는 이른 봄 목련나무처럼 보송해진다면….

안희경 | 재미 저널리스트.

2002년 미국으로 이주, 문명사적 성찰과 대안을 소개하는 글을 쓰고 있다. 인류 생존을 위한 10년 전략을 제시하는 대담집 ‘내일의 세계’, 세계 지성들과 코로나19의 원인과 미래를 탐색하는 ‘오늘부터의 세계’, 리베카 솔닛 등 세계 여성 지성들과의 대담 ‘어크로스 페미니즘’, 문명의 현재와 이를 만들어온 개인의 마음 운용 실체까지 노엄 촘스키를 비롯한 세계 지성 29인과의 대담 3부작 ‘하나의 생각이 세상을 바꾼다’, ‘문명, 그 길을 묻다’, ‘사피엔스의 마음’, 현대미술 작가들과의 대담 ‘여기, 아티스트가 있다’, ‘이해인의 말’, ‘최재천의 공부’, 에세이 ‘나의 질문’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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