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려실’ 편액에 새겨진 이광사-이긍익 부자의 사랑
“글씨들 사이에서 사람 냄새가 났어요. 240여년 전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오간 따듯한 정이 물씬 느껴졌습니다.”
지난해 11월부터 국립대구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특별전 ‘나무에 새긴 마음 조선현판’을 꾸린 정대영 연구사는 이런 감회를 털어놓았다.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만난 18세기 명필 이광사(1705~1777)의 친필 글씨 ‘燃藜室(연려실)’과 이 글씨를 자신의 호로 받은 아들 이긍익(1736~ 1806)이 후대에 새긴 ‘연려실’ 편액(옛적 건물 문 위에 걸었던 글씨 액자)의 실물을 함께 전시실에서 대조하면서 느꼈던 감동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지금 박물관 진열장에 위아래로 나란히 전시된 친필 글씨와 편액을 보면 정 연구사가 왜 감동했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굳세고 비장하게 행서체로 단박에 써내려간 ‘연려실’의 친필과 이를 각수가 나무판에 새긴 편액글씨는 판박이였다. 놀랍게도 큰 자획은 물론이고 먹물을 흘린 세세한 흔적까지 똑같다. 그만큼 세심하고 정성스럽게 부친의 마음이 깃든 친필을 이어받아 새겼다는 말이다. ‘연려실’은 원래 ‘명아주 지팡이를 태워 어둠을 밝혀 역사를 연구하는 방’이란 뜻이다. 기원전 1세기 중국 한나라 시대 유향이란 학자가 밤새 이 명아주 나무를 태워 빛을 밝히며 역사 연구를 해서 대가가 되었다는 고사를 품은 말이다.
이광사는 어릴 적부터 역사에 탐닉했던 아들 긍익이 유향 같은 대가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런 내력을 담은 호를 내려주었다. 긍익은 부친의 사후 이 호를 자신의 작업실 편액에 새겨 내걸고 필생의 역작이자 조선왕조실록과 더불어 조선시대 최고의 기사본말체 사서이자 야사의 집대성으로 꼽히는 ‘연려실기술’을 저술하게 된다. 사서의 제목 또한 부친이 지어준 연려실이란 작업실에서 기록한 역사저술을 뜻하는 것이니 부자가 서로를 생각하는 절절한 마음이 와 닿는다.
원교 이광사는 조선 후기 최고의 서예가이자 명대 창안된 신유학인 양명학의 대가로서 중국과 차별화한 활달하고 유려한 서체인 ‘동국진체’를 창안해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 화풍과 더불어 당대 조선 특유의 서화예술을 정립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글씨의 거장이다.
하지만 그의 삶은 불행의 연속이었다. 왕족 출신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부친과 백부가 18세기 초 경종 즉위기 노론과 격렬한 당쟁을 벌인 소론 세력의 주요 중신들이었다는 점 때문에 영조가 즉위하고 노론이 정권을 장악하자 부친과 백부가 잇따라 옥사하거나 유배돼 객사하는 비극 속에서 가문은 몰락한다. 그는 정계를 나가지 않고 학문수양과 글씨에 몰두했으나 쉰살 넘은 1755년 자신과 친분이 있던 소론 윤지가 전라도 나주에 영조를 욕하는 낙서를 붙인 사건이 일어나면서 연루자로 지목돼 함경도 오지 부령에 유배됐고, 부인은 자결했다. 1762년에 다시 완도 옆 신지도로 이배되어 15년간 유배생활을 하다 한 많은 삶을 마쳤다.
온갖 불행을 떠안은 그에게 유일한 힘과 희망이 된 것은 두 아들 긍익과 영익이었다. 영익은 아예 유배지 신지도로 내려와 부친이 타계할 때까지 수발하며 함께 서화 작업을 했다. 긍익은 서울에서 어린 여동생과 함께 근근이 집안을 지탱해나가면서 부친과 끊임없이 편지를 나누고 거처를 방문하면서 부자의 정을 이어나갔다. 애틋한 정이 넘쳐흘렀던 부자 사이에서는 당대의 글씨와 그림에 대한 미학적 감평은 물론 역사인식과 세상 만물에 대한 철학적 사상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담론이 소통되었다.
‘연려실’에 얽힌 친필글씨와 편액이 발견된 과정도 흥미진진하다. 이긍익은 역사서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첫머리에 “선군(先君·돌아가신 아버지)으로부터 '연려실'(燃藜室) 세 글자의 수필(手筆)을 받아 서실(書室)의 벽에 걸어두고 그것을 판에 새기려다가 미처 못했다”고 적었는데 200년 넘게 실물이 전해지지 않았다.
그러다 2021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일제강점초기 조선총독부가 현재 남산의 관저터에 있던 조선시대 별저와 정자터인 녹천정에서 이 편액 실물을 수습한 뒤 여러 경로를 거쳐 박물관 안에 소장된 사실을 확인하고 보고서를 통해 공개하면서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다. 뒤이어 지난해에는 국립전주박물관이 일반 미술품 경매도록에 편액의 이광사 친필글씨 작품이 나온 것을 보고 구입하면서 지난 연말 열린 국립대구박물관의 전시에서 극적으로 아버지의 글씨와 아들이 만든 편액이 조우하게 된 것이다.
이긍익은 부친의 사후 유배생활을 한 신지도로 바로 내려가 고인의 거처에 이 편액을 새겨 단 작업실을 내고 30년을 불철주야 집필에 몰두해 마침내 저 유명한 사서 ‘연려실기술’을 완성하기에 이른다. 자신에게 호로 내려진 부친의 글씨를 제목으로 삼으면서. 이광사 이긍익 부자의 글씨와 편액의 사연들은 가족의 정이 그리워지는 설날 명절을 앞두고 더욱 살갑게 다가오는 문화유산의 에피소드가 아닐까 싶다. 전시는 12일까지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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