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넘게 남았다 [에디터의 창]
지난 7일 밤 방송된 윤석열 대통령의 KBS 대담은 실망감을 넘어서는 감정을 안겨줬다.
대담에서 윤 대통령은 김건희 여사의 명품 가방 수수 사건에 대해 “매정하게 끊지 못한 것이 좀 문제라면 문제고 좀 아쉽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고 했다. 김 여사가 명품 가방을 수수하고 반환하지 않은 데 대한 직접적인 설명이나 사과는 없었다. 정치권 안팎에서 예상했던 ‘대리 유감 표명’은커녕 ‘아쉽다’라는 말로 얼버무린 것이다. 윤 대통령은 제2부속실 설치나 특별감찰관 임명 등 제도적 보완 방안에도 미온적 반응을 보이면서 앞으로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약속해서 될 일이었으면 김 여사는 왜 ‘조용한 내조’ 약속을 깨고 숱한 논란을 일으켰나.
대통령이 사장 인사권을 행사한 KBS가 진행하고, 사전 녹화된 이 대담이 결국 ‘약속 대련’이 될 것이라는 우려도 불식시키지 못했다. 질의응답 과정에선 ‘명품 가방’이란 말은 한 번도 나오지 않았고, 그 자리를 ‘파우치’ ‘외국 회사의 조그만 백’이라는 기이한 말이 대체했다. KBS 앵커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도 아니고, 왜 명품 가방을 명품 가방이라 부르지 못하나. ‘김 여사 성역화’가 명품 가방에까지 미쳤나.
게다가 김 여사의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 특검이나 이태원특별법안 등 민감한 현안에 대해선 질문도 없었고, 언급도 없었다. 그래놓고선 윤 대통령이 직접 대통령실 청사 내부를 소개하는 ‘러브 하우스’ 형식을 대담 중간중간에 끼워 넣었다. 국민이 듣고 싶어 하는 답은 피하고, 눈길을 딴 데로 돌리겠다는 의도와 다름없다.
앞서 여권 관계자는 윤 대통령이 이번 대담에서 김 여사 논란에 침묵한 이유와 유감 표명 등을 허심탄회하게 밝히면 지지율 회복의 계기가 될 것이라고 했는데 터무니없는 소리다. 대선 후보 시절 ‘개 사과’ 논란 때부터 알아봤다. 이런 식으로 구렁이 담 넘어가듯 넘어가려는 전략이 통할 거라고 진심으로 생각하나. 윤 대통령을 보좌하는 대통령실 참모들은 무슨 생각인가. 알맹이도 없고, 마지못해 하는 듯한 대담으로는 여론을 돌리지 못한다. 혹 떼려다 혹 붙이는 격이 될 수 있다.
그나마 이번 대담의 성과라면 집권 3년차에 접어든 윤 대통령 개인은 물론, 정권의 본질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다들 잊었을지 모르지만, ‘0선 정치 신인’인 윤 대통령이 ‘별의 순간’을 잡았을 때 국민들은 그가 기성 정치 문법을 깨고, 이념과 진영에 얽매이지 않는 새로운 정치를 펼치길 기대했다. 하지만 윤 대통령이 취임 후 보여준 모습은 그런 기대에 턱없이 모자라는 것이었다. 윤 대통령의 친정인 검찰 출신 인사들이 득세했고, 윤 대통령은 ‘이권 카르텔 척결’을 밀어붙였지만, 정작 검찰·법조 카르텔에는 눈을 감았다. 만 5세 초등 입학·주 69시간제 등 즉흥적으로 던졌다가 여론 반발로 취소한 정책도 부지기수다. 장관급 후보자들은 자녀 학교폭력, 극우 발언, 주식 파킹, 안보위기 때 주식 거래 등 다양한 논란에 휩싸였다.
윤 대통령은 지난달 김 여사 특검법안과 이태원 참사 특별법안을 잇따라 거부했지만, 직접 설명은 없었다. 그래놓고 8일 현재까지 10차례 생중계된 국민과의 ‘민생토론회’에서는 하고 싶은 말만 했다. ‘극장형 정치’의 전형이다. 윤 대통령이 2030 엑스포 부산 유치에 실패한 뒤 부산 민심을 달랜다며 대기업 총수들을 거느리고 ‘떡볶이 먹방’을 한 것도 마찬가지다.
이번 대담도 그 연장선이다. 2년 연속 신년 기자회견을 패싱하고 생방송도 아닌 사전 녹화 형식의 대담을 했다. 국민을 대신한 언론들의 날선 질문과 추가 질문을 받지 않겠다는 뜻이다. 윤 대통령은 당선 직후 기자회견에서 “참모 뒤에 숨지 않고 정부의 잘못은 솔직히 고백하겠다”고 했다. 윤 대통령은 초심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차버렸다.
대통령은 고독한 자리다. 어려운 결정도 많이 해야 한다. 그런데 윤 대통령은 자꾸 쉬운 선택을 한다. 검찰 시절 몸에 밴, 익숙한 것에만 의존하다간 한계에 부딪히기 마련이다. 그건 지난 1년9개월간 국정에서 밑천을 드러냈다.
윤 대통령 지지율이 30% 안팎을 오간 지 꽤 됐다. 놀라운 건 전 세계 경기 침체 속에 지도자들도 지지율이 떨어지고 있다는 윤 대통령의 상황 인식이다. 마키아벨리는 군주에게 최악의 상황은 미움에 더해 경멸을 받는 것이라고 했다. 임기가 3년 넘게 남은 대통령을 두고 그런 마음을 품는 국민들이 늘어난다면 슬픈 일이다.
김진우 정치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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