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 지원-멕시코 국경’ 법안 부결…트럼프 압력에 난장판 된 미 의회
부결, 부결, 또 부결.
미국 의회가 우크라이나 지원과 멕시코 국경 통제를 놓고 상원과 하원이 갈등하고 공화당에선 내분이 발생하는 등 심각한 혼란에 빠졌다. 미국 의회의 ‘무정부’ 상태가 장기화될 수 있어 “우크라이나의 미래가 불확실해졌다”(워싱턴포스트)는 심각한 우려까지 나오고 있다.
미국 상원은 7일(현지시각) 1183억달러(약 157조원) 규모의 ‘긴급 안보 법안’을 표결에 부쳤으나 찬성 49 대 반대 50표로 가결에 실패했다. 찬성표는 필리버스터(의사 진행 방해 토론) 생략을 위한 60표에 크게 못 미치는 수준에 머물렀다. 이 법안은 민주당과 공화당의 초당적 합의를 통해 마련한 것으로 러시아의 공세에 밀려 “포탄이 부족하다”고 호소하는 우크라이나를 위한 601억달러, 가자 전쟁을 이어가고 있는 이스라엘을 위한 141억달러 지원 예산이 들어 있다. 합의안은 또 무단 월경자가 하루 5천명을 넘으면 즉각 추방할 수 있는 권한을 대통령에게 주는 등 멕시코 국경 통제를 크게 강화하는 내용을 담았다. 이 안은 우크라이나 지원을 위해선 멕시코 국경 통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공화당의 주장을 민주당이 받아들이며 양당 합의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합의를 이끈 미치 매코널 공화당 원내대표조차 이날 반대표를 던졌다.
전날 하원에선 공화당 소속인 마이크 존슨 하원의장이 우크라이나는 빼고 이스라엘 지원을 중심으로 하는 176억달러 규모의 예산 법안을 표결에 부쳤으나 부결됐다. 신속 처리 절차를 밟으려면 3분의 2 이상이 동의해야 하지만 찬성은 이에 못 미치는 250표(반대 180표)에 그쳤다. 하원은 이날 국경 통제 실패를 이유로 알레한드로 마요르카스 국토안보부 장관 탄핵안도 표결했으나 찬성 214 대 반대 216표로 부결됐다. 민주당 212명이 모두 반대했고, 공화당 의원 4명이 반란표를 던졌다.
미 상·하원에서 이틀째 세개의 주요 표결이 부결되는 이전투구가 벌어진 배후에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있다. 애초 공화당은 우크라이나 지원을 위해선 국경 통제 강화 조처가 필요하다고 주장해 왔다. 그 결과 자신들의 요구가 반영된 안이 마련됐지만, 트럼프 전 대통령은 이를 통과시키는 것은 “민주당에 선물을 주는 것”이라며 공화당 의원들에게 반대를 요구했다. 이 안이 통과돼 멕시코 쪽 국경이 안정되면 11월 대선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을 공격할 유력한 소재가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바이든 대통령은 트럼프 전 대통령이 공화당 의원들에게 전화를 걸어 반대하라고 협박까지 했다고 말했다.
척 슈머 상원 민주당 원내대표는 처음 계획한 대로 우크라이나·이스라엘 지원안만 따로 표결에 부치려고 했으나 공화당에서 중구난방식 주장이 나오자 이를 8일로 미뤘다. 우크라이나 지원안이 상원을 통과해도 공화당 강경파가 버티는 하원에서 어떻게 될지는 미지수다. 하원 내 공화당 강경파는 존슨 의장이 우크라이나 지원안을 상정하면 탄핵을 추진하겠다고 위협하고 있다.
미 의회의 혼미로 인해 미국의 지원예산이 언제 통과될지 알 수 없게 되자 곧 전쟁 발발 두돌(2월24일)을 맞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전황이 암담해지고 있다. 미국은 개전 이후 지난해 말까지 우크라이나에 4420억달러의 군사지원을 했지만, 지난해 말 관련 예산이 바닥났다고 밝혔다. 뉴욕타임스는 러시아군이 포탄 5발을 쏘면 우크라이나군은 1발로 대응하는 전선의 상황을 전하며, 미국의 원조가 끊기면 올 하반기엔 우크라이나에 부정적인 방향으로 전세가 바뀔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고 했다. 이 신문은 서구 은행들이 보관 중인 러시아 외환보유고를 쓰거나, 한국이 미국에 포탄을 보내고 미국은 자국 보유분을 지원한 것 같은 방식을 사용하는 안도 거론된다고 전했다.
미국의 우크라이나 지원이 늦어지고,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재집권 가능성까지 불거지면서, 유럽의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국가들이 더 긴장하고 있다. 옌스 스톨텐베르그 나토 사무총장은 7일 기자회견에서 “이것은 자선이 아니라 우리의 안보 이해에 관한 것”이라며 미국과 유럽의 지속적인 우크라이나 지원을 촉구했다. 제이크 설리번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우리는 지원안이 상·하원을 모두 통과해 대통령 서명을 위해 (집무실) 책상에 도달하도록 전력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워싱턴/이본영 특파원
e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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