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당 러브콜’ 고사한 임형주 “정치만이 세상을 바꾸는 건 아니다” [인터뷰]
여야 가리지 않는 러브콜 주인공
후한 평가 감사…제안은 모두 고사
누구도 가지 않은 길 개척한 주인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팝페라 테너 임형주(38·로마시립예술대학 석좌교수)를 따라다니는 수사는 많다. ‘최초’, ‘최연소’로 시작하는 이력만 나열해도 ‘1박 2일’이 부족하다.
‘성악 크로스오버’ 대중화를 이끈 선구자인 그는 일찌감치 ‘월드스타’였다. 시대가 얼굴을 달리할 때에도 임형주는 변치 않는 목소리로 사람들의 곁에 있었다. ‘음악의 힘’은 강력했다. 고작 열두 살에 세상에 나온 ‘미성의 소년’은 26년 간 세상과 문화를 잇는 징검다리가 됐다.
미국 뉴욕 카네기홀에서 공연한 세계 최연소 남성 성악가이면서, ‘한국인 최초’ UN평화메달을 받은 주인공. 3연임 민주평화통일자문위원,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자문위원, 영국왕립예술학회 종신 석학회원 등 이질적인 이력이 한 문장 안에 적힌다. 한국 데뷔 26주년, 세계 무대 데뷔 21년의 시간동안 쌓아온 지난 날들은 그에게 “축복이자 기적”이었다고 그는 말한다.
“정치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아직은 현실 정치에 뜻이 없어요. (웃음)”
요즘 그는 정치, 문화계에서 가장 ‘핫’한 주인공이다. 오는 4월 제22대 총선을 앞두고 여야를 가리지 않는 ‘인재 영입 리스트’의 0순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이미 지난해 연말부터 더불어민주당, 새로운미래, 국민의힘에서 그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더불어민주당과 새로운미래는 임형주에게 인재 영입을 제안했고, 국민의힘의 한 의원도 임형주를 인재영입위에 추천하겠다며 의사를 타진했다. 선거를 앞두고 이름에 회자되자 당사자인 그가 더 당혹스러웠다. 물론 이미 세 당의 제안을 고사했다.
임형주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으면 세상에 알려질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소문이 퍼져 조심스럽다”며 “여러가지로 과대평가를 해준 것 같아 감사하나 당시 세 당 모두 고사했다”고 말했다.
정치권에서 그에게 러브콜을 보낸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제20대 대통령 선거 당시에도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에서 선거대책위원장 자리를 제안한 바 있다. ‘팝페라 테너’로 걸어온 예술가로의 성취에 더해 NGO(비정부기구) 친선대사, 나눔을 위한 사회 봉사 활동, 선거관리위원회 홍보대사 등 폭넓은 행보가 임형주에게 여의도 데뷔 가능성을 키웠다.
임형주는 그러나 “정치를 하고 싶어 사회활동을 한 것이 아니라 인지도를 가진 문화예술인으로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싶었던 마음에 한 건데, 달리 해석된 것 같아 속상하다”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인재 영입 제안을 고사한 이후, 임형주가 자신의 생각을 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문화가 화두인 시대에 정치만이 사회를 바꾸고, 제도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전 문화예술인으로서 문화 DNA를 심는 역할을 해왔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예술은 길고, 정치는 짧아요.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변화를 이끄는 문화가 1중대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파워 외향형’인 그는 국가 행사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골 손님이다. 2002년 한일 월드컵, 2003년 노무현 전 대통령 취임식, 평창 동계올림픽 패럴림픽 개회식…. 정권과 진영을 가리지 않고 대한민국 경조사에는 언제나 임형주가 있었다. 지난해 9월엔 몽골에서 프란치스코 교황 집전 미사 폐막행사에 전 세계 음악가 중 유일하게 초청돼 공연하고, 특별 알현도 했다. 몽골에 여러 학교를 세운 그를 몽골 천주교 측에서 직접 초청한 것이다.
“다양한 자리에 갈 수 있어 정말 행운인 것 같아요. 문화예술인들이 자신들의 예술세계를 잘 가꿔나가는 것과 달리 내향형이 많고, 소극적인 편이에요. 미약하나마 동료, 후배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에 여러 활동을 하고 있는데, 그런 모습이 긍정적으로 보였던 것이 아닌가 싶어요.”
현재 임형주에게 ‘정계 진출’ 의사는 없다. 그는 “지금은 뜻이 없지만, 한 치 앞도 모르는 것이 인생이기에 단언할 수는 없다”고도 말한다. 올해에도 선거관리위원회 자문위원으로 위촉돼 국민들이 투표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독려할 생각이다. 바람이 있다면, 문화예술계에서도 적극적으로 정계에 진출하는 얼굴이 나오는 것이다.
“제가 아니더라도 빠른 시일 내에 문화예술인 중에 국회에 진출해 현장의 소리를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이 나오면 좋겠어요. 물론 4년 간 법안을 상정하는 과정은 아마도 지난할 거예요. 그럴지라도 헌정 사상 없었던 클래식 음악가 출신의 의원이 나와 현장의 목소리를 전한다면 K-클래식 발전에 기폭제가 되리라 생각해요.”
1998년 5월 2일. ‘이소라의 프로포즈’(KBS2)에 역대 최연소 출연자가 등장했다. 당시 방송에서 이소라는 “초등학교 6학년의 남자 아이”라며 “박수를 치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박수가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너무도 앳된 소년은 데뷔 앨범(‘Whispers of hope’)에 담긴 타이틀곡 ‘난 믿어요’와 ‘뮤지컬 거장’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에비타’ 넘버를 불렀다. 장장 6~7분에 달하는 대곡 ‘날 위해 울지 마세요, 아르헨티나여’의 고난도 테크닉을 소화한 소년은 단숨에 스타가 됐다.
“돌아보면 유명 인사 임형주의 삶을 위해 일반인 임형주는 많은 걸 희생해야 했고 10~20대 시절에만 마주할 수 있는 감정과 경험이 인생의 챕터 챕터마다 누락된 것 같아 아쉬운 점도 있어요. 그럼에도 제겐 늘 영광의 시간이었어요.”
지난해 그는 한국 데뷔 25주년, 세계 무대 데뷔 20주년을 맞았다. 돌이켜보면 음악가로서 임형주가 걸어온 모든 길이 찬란했다. 카네기홀의 전 홀에서 공연한 최초의 한국인 음악가이고, 한국을 넘어 아시아 팝페라의 선구자다. 일찌감치 얼굴을 알리며 ‘신동’, ‘천재’로 불렸지만 스스로는 “신동이나 천재는 아니었다”고 말한다. 오히려 그는 ‘성실한 노력파’였다.
“얼굴이 알려져 있어서인지 정통 성악으로 예원학교에 입학을 했는데도, 저를 대중가수나 연예인처럼 바라보더라고요.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데, 그 때는 왜 그랬는지 그런 시선을 차별이라고 느꼈어요.”
자신을 향한 시선을 극복하기 위해 더 고집스럽게 ‘정통파’의 길을 걸었다. 무수히 많은 서양 가곡의 가사를 주문처럼 외웠고, 성악 발성법이 적힌 모든 책을 탐독했다. “유튜브가 없던 때라 대가들의 노래가 담긴 CD를 모조리 사서 공부했어요. 중학교 때 이미 1000장 가까이 모았어요.”
성대는 타고 났다. 하루에 7~8시간씩 노래를 했고, 천운처럼 6개월 만에 변성기가 지나간 덕분에 음악가로 꾸준히 성장할 수 있었다. 10대 소년이 나갈 수 있는 모든 콩쿠르에서 최고의 자리에 올랐고, 서울예고에 입학 허가도 받았으나 난데없이 유학길에 올랐다. 더 큰 세상으로 나서기 위해서였다.
소위 말하는 ‘엘리트의 길’을 걷던 소년 임형주가 팝페라의 길에 접어든 것은 메조 소프라노 웬디 호프먼(1960~2005)과의 만남이 계기가 됐다. 뉴욕에서 호프먼과 그의 남편인 얼 바이스 앞에서 본 오디션은 임형주의 운명을 바꿨다.
“얼 바이스 선생님이 호프먼 선생님이 늦으니 오디션 곡을 미리 불러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 때 부른 곡이 주세페 사르티의 가곡 ‘그리운 님을 멀리 떠나’였어요. 겨우 한 프레이즈 정도 불렀는데, ‘보석 같은 재능을 찾았다’며 플라시도 도밍고의 디렉터인 에드가 빈센트, 안드레아 보첼리의 디렉터의 토니 루소 등 기라성 같은 클래식 음악계 인사들에게 저를 소개해주셨어요.”
정통 ‘오페라 가수’를 꿈꿨던 그에게 미국의 대가들은 ‘포스트 보첼리’가 될 것 같다고 ‘예언’을 했다. 선택의 길에서 고민이 깊었지만, 그의 길은 자연스럽게 운명을 향해 갔다.
“대중이 어렵게 느끼는 소수만을 위한 클래식이 아니라, 익숙한 크로스오버를 통해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소프라노 조수미 누나, 지휘자 금난새 선생님처럼 대중과 소통하는 클래식 음악가들이 저의 롤모델이었어요. 대중과 클래식 음악의 가교 역할을 하고 싶다는 꿈을 품고 가게 된 길이었어요.”
“임형주 선생님, 저희가 이렇게 활동할 수 있게 길을 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팬텀싱어’(JTBC) 시즌3에서 라비던스로 준우승을 한 테너 존노는 지난해 ‘그리움’ 앨범을 내며 임형주에게 마음을 담은 메시지를 적었다. 두 사람의 나이차는 고작 다섯 살. 하지만 임형주가 걸어온 길엔 아주 오랜 시간의 역사가 쌓였다.
그는 ‘팝페라’라는 용어도 생소하던 시절, 이 낯선 음악의 세계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다. ‘팝페라’는 팝과 오페라를 결합한 성악 크로스오버의 한 장르다.
임형주가 가는 길은 늘 처음이었다. 그가 아시아 팝페라 대중화의 선구자로 불리는 이유다. 그는 길 위에서 스스로 이정표가 됐다. “음악적으로 조언을 구할 선배가 없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유럽에서 활동한 키메라 선생님이 계시지만, 짧게 활동하고 은퇴를 하셔서 직접 뵌 적은 없어요.” 팝페라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 것도 영국의 한 매체가 키메라 공연의 리뷰를 실으면서다. ‘팝페라 효시’가 한국의 키메라라는 것을 국제 사회에 밝힌 사람이 바로 임형주다.
“사실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무렵엔 정말 어려움이 많았어요. 제 이름 석 자를 알리는 것도 벅차 죽겠는데 팝페라라는 장르도 함께 알렸어야 했으니까요. (웃음)”
임형주가 정립한 창법은 어느덧 ‘한국의 팝페라 스타일’로 정착됐다. 그는 “오페라에 팝스러운 창법을 가미하되, 보다 여러 창법을 구사해야 더 대중적으로 노크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강단에 선지는 어느덧 10년째. 그는 요즘 “내가 겪어온 시행착오를 후배들은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국내에서 학생들을 가르쳐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동안엔 해외 대학에서만 학생들을 가르쳐왔다.
임형주가 가는 길이 ‘꽃길’만은 아니었다. 보수적인 클래식 음악계에서 차별과 편견은 늘 동반자였다. 부침의 시간도 있었다. 그는 “슬럼프는 영원히 나를 배반하지 않는 친구였다”며 웃었다. 슬럼프는 그를 단련케 하는 원동력이었다.
“우리의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잖아요. 저의 25년 음악 인생도 영광과 고난의 역사였어요. 그 때마다 나 자신을 스스로 믿어주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가기 힘들 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임형주의 음악은 멀리 있지 않다. 국가의 역사적인 사건에도, 비극적인 일에도 그의 노래가 불린다. 국민에게 위로와 힘이 필요한 자리에 언제나 있었기에 임형주는 ‘시대와 함께한 목소리’로 불린다. 그는 “우리는 누구나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존재”라며 “음악을 하는 이유는 조금이라도 사람들에게 위로와 치유를 주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의 최고 히트곡 ‘천 개의 바람이 되어’는 배우 김영옥, 가수 임영웅·정동원을 통해 다시 불리며 세대를 초월한 ‘위안곡’이 됐다.
그의 음악은 다시 세상으로 향한다. 10대에 데뷔해 30대 후반이 된 그의 걸음은 해마다 세상과 조금 더 가까워진다. 지나온 25년은 앞으로 25년의 밑거름이다. 올해는 일본, 대만, 홍콩 데뷔 20주년이라 해외 활동으로도 일정이 빼곡하다. 예술가로의 길을 걷고 어느 때보다 분주하지만 그의 비전은 더 큰 무대로 향한다.
“이제 인생의 음악이 완전히 새로 시작됐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난 25년이 나를 위해 살아온 시간이었다면, 앞으로의 25년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고 싶어요. 요즘 K-컬처의 위상이 어느 때보다 높아졌지만, 그를 뒷받침할 제도와 지원의 부족함을 느껴요. 오랜 시간 활동하며 겪은 시행착오와 경험을 바탕으로 후배, 후학들의 길을 열어주면서도 문화의 저변을 확대하는 예술 행정가로의 길을 가보고 싶어요.”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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