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4명 목숨 끊었는데 겨우 징역15년?”…판사가 판결문에 남긴 말은

지홍구 기자(gigu@mk.co.kr) 2024. 2. 8. 13:3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담당 오기두 판사 “피해자 보호하는데 법률에 한계”
집단적 사기범죄 요건 및 처벌법 제정 국회에 제안
“구속기간 단기로 제한하는 형사소송법도 개정 필요”
지난해 4월 21일 오전 인천지법에서 전세사기·깡통전세 피해자 전국대책위원회와 전세사기·깡통전세 문제 해결을 위한 시민사회대책위원회 관계자들이 법원과 판사에 경매 기일 직권 변경을 촉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지홍구기자
대규모 전세사기로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인천 전세사기 주범 일명 ‘건축왕’ 남모 씨(62)에게 법원이 법정 최고형인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이 사건은 코로나19 국면 속에서 드러나지 않고 있던 전국 유사 전세사기 사건을 세상 밖으로 끌어올리는 도화선이 됐다.

특히 사기죄가 유죄로 인정되고 법정 최고형이 선고되면서 전국 유사 사건 피의자들과 잠재 범죄 집단에 경종을 울렸다는 평가가 나온다.

그러나 이 사건을 맡은 인천지법 형사1단독 오기두 판사는 피해자들의 기본권을 보호하는데 현행 법률에 한계가 있다며 국회에 집단적 사기범죄에 대한 법률 제정을 제안했다.

오 판사가 심리를 맡은 이 사건 피고인은 남 씨 포함 총 10명이다. 이들은 부동산 실권리자명의 등기에 관한 법·사기·공인중개사법·근로기준법·근로자퇴직급여 보장법 위반 혐의로 재판받았다.

검찰은 남 씨에게 이들 5개 혐의를 모두 적용해 기소했다. 남 씨외 공인중개사, 명의수탁자 등 9명은 사기·공인중개사법 위반 등 2~3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오 판사는 지난 7일 선고공판에서 남 씨에게 법정 최고형인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나머지 피고인 9명에겐 각각 징역 4~13년을 선고했다. 판결문만 118쪽에 이른다.

건축왕 ‘남 씨’ 누구 ?
남 씨는 2009년부터 인천 미추홀구 일대에서 타인 명의를 빌려 토지를 매입하고, 자신이 운영하는 건설사를 통해 PF(Project Financing) 대출을 받아 주택을 지었다. 주택이 준공되면 수탁자 명의로 등기를 마치고 준공 대출을 받아 기존 대출을 정산했다.

대출 정산 후엔 해당 주택에 근저당을 설정하고, 자신이 운영하는 공인중개사 사무실을 통해 임대차 계약을 체결하고, 임대차 보증금을 받았다. 이렇게 확보한 임대차보증금으로 대출 이자, 직원 급여 등 사업 비용으로 쓰였다. 남 씨는 이러한 과정을 반복하며 보유 주택을 2708채까지 늘렸다.

승승장구하던 남 씨는 탈이 났다. 남 씨는 자신의 부동산을 담보로 대출한 대출금 이자를 내지 못하면서 2022년 1월부터 8건의 임의경매 절차가 개시되는 등 위기에 봉착했다. 알고 보니 남 씨는 2020년 7월부터 보유 부동산에 대한 재산세를 체납하기 시작해 2022년 1월에는 3억7000만원으로 불어났다. 2021년 초순쯤부터는 중개팀 직원 급여를 지급하지 못했고, 대출금 이자 등 고정 지출 비용이 매월 17억원에 달해 임의경매를 취하하거나 담보 대출금을 갚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결국 남 씨는 2021년 3월부터 2022년 7월까지 인천시 미추홀구 일대 아파트와 빌라 등 공동주택 191채의 전세 보증금 148억원을 세입자들로부터 받아 가로챈 혐의 등으로 기소됐다. 남 씨 일당의 전체 혐의 액수는 453억원(563채)이지만 지난 7일 재판에서는 먼저 기소된 148억원대 전세사기 사건만 다뤘다. 추가 기소된 나머지 305억원대 전세 사기 재판은 따로 진행 중이다.

남 씨 변호인 등은 “등기부상 소유 명의자인 피고인들이 임대인이 되어 피해자들에게 각 부동산을 임대한 것이고, 선순위 근저당권이 있다는 사실을 임차인들에게 부동산등기부등본을 제시하는 등의 방법으로 고지를 했다”며 혐의를 부인했다. “시세보다 저렴한 가액에 임대하고, 특히 남 씨는 장기간 문제없이 임차인들의 임대차 보증금을 반환해 주었으므로 사기가 아니다”고도 했다.

사기죄 유죄 판단 근거는 ?
그러나 오 판사는 사기죄를 유죄로 판단했다. 주택 임대인인 피고인들이 피해자들과 주택임대차계약을 체결할 때 신의성실 원칙에 따라 고지의무를 이행하지 않아 피해자들이 착오에 빠져 임대차계약을 체결하게 한 것 아니냐가 핵심 쟁점이었다.

오 판사는 유죄 선고 이유로 크게 7가지를 들었다. 공인중개사가 아닌 남 씨가 공인중개사들을 고용해 급여와 보수를 지급하면서 자신의 사업운영에 가담하게 한 점, 2708채의 소규모 주택을 지어 임대하면서 받은 임대차보증금으로 앞서 들어 온 임차인에게 반환해주는 ‘돌려막기’ 방식으로 사업을 운영해 자금흐름에 문제가 생기면 그 위험이 임차인들에게 고스란히 전가될 수밖에 없는 점, 공인중개사들에게 월 200만 원 등의 대가를 지급하고 그들 명의로 위법한 범죄행위인 명의신탁을 해 피해자들로 하여금 진실한 임대인이 남 씨 임을 알지 못하게 숨긴 점, 공인중개사인 나머지 피고인들로 하여금 공인중개사법을 위반해 실질적으로 남 씨 소유인 주택을 임차인들에게 임대하게 하는 범죄수법을 사용한 점, 2018년 1월 31일 채권 최고액을 120억 원으로 하는 근저당권을 설정해 금융기관으로부터 대출받아 강원도 동해 망상지구 용지를 매수하는 등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한 점, 이러한 사업방식에 가담한 공인중개사·중개보조원인 등 나머지 피고인들이 피해자들에게 남 씨의 사업 운영방식에 관련된 사실을 전혀 고지하지 않고 임대차계약을 체결한 점, 피해자들이 임대차계약을 체결하거나 기존의 계약을 연장한 후 1개월 또는 2, 3개월이 지나자마자 해당 주택이 경매절차에 들어가 임대차보증금의 전액 또는 일부를 반환받지 못하게 된 점 등이다.

오 판사는 “이러한 점을 종합할 때 피고인들은 피해자들을 적극적으로나 소극적으로 기망해 그들로부터 임대차보증금을 속여 뺏은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징역 15년 선고 배경은 ?
형법 제347조 제1항이 정하는 사기죄 법정형은 최고형이 징역 10년이다. 경합범 가중에 의한 상한도 징역 15년이다.

남 씨와 같이 2건 이상의 사기를 저지른 피고인에게는 ‘경합범 가중’ 규정에 따라 법정 최고형에서 최대 2분의 1까지 형을 더할 수 있다.

오 판사는 피해자가 191명에 이르고 이들의 금전적 피해 규모가 148억원에 이르는 점을 고려해 가중 처벌했다. 오 판사는 “나이 어린 사회초년생, 신혼부부, 70대 노인과 같은 경제적으로 곤궁하고 취약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을 상대로 한 범행으로 수법이 매우 불량하다”고 판단했다. 오 판사는 “이 사건 피해자들의 임대차보증금은 대출·퇴직금이거나, 평생 일해 모은 돈으로 피해자들의 거의 유일한 재산”이라면서 “피해자들이 앞으로 금융기관에 갚아야 할 채무는 피해자들의 재정 능력을 벗어날 정도로 막대하다”고 덧붙였다.

오 판사는 “피고인들은 피해자들로부터 살아갈 희망을 송두리째 앗아버리고, 주택임대차거래에 관한 사회공동체의 신뢰를 처참하게 무너뜨렸다”면서 “그런데도 피고인들은 터무니없는 변명을 늘어놓아 범행을 부인하면서 무려 100여명에 가까운 피해자들을 공판정에 증인으로 소환하는 추가적인 고통을 주었다”고 양형 이유를 밝혔다. 피해자들이 남 씨 등 피고인들에 대해 엄벌을 탄원한 점도 고려했다.

오 판사는 남 씨에게 처단형의 최고형인 징역 15년을 주문하면서 범쇠수익 115억5678만원의 추징을 명령했다.

오기두 판사, ‘집단적 사기범죄법 제정’ 제안
아마도 오 판사는 현행법에서 정한 법정 최고형 이상의 형을 선고하고 싶어한 듯하다. 오 판사는 판결문 끝에 국회에 집단적 사기 범죄에 대한 적절한 구성요건과 처벌 정도를 정한 법률 제정을 제안했다. 오 판사는 “의식주는 헌법이 부여하는 기본권을 넘어선 일종의 천부인권(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는 불가침 권리)”이라면서 ”이 사건과 같이 다수 피해자를 양산한 ‘전세사기’ 범죄자에 대한 형을 정할 때 헌법기관인 법원은 천부인권 내지 실정 헌법이 규정하는 주거의 자유, 행복 추구권과 같은 기본권 보호의 관점을 택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헌법의 기본권 보장은 사법부뿐 아니라 입법부에도 요청되는 사항“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오 판사는 현행 법률의 한계를 지적했다. 형법상 사기죄는 최고 징역이 10년이고, 경합범 가중 처벌을 해도 상한이 징역 15년에 그치고 있는 점을 지적했다. 사기죄 가중처벌 규정인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도 피고인들이 피해자들로부터 가로챈 이득액만을 기준으로 처벌 정도를 규정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일반 형법이 규정하고 있는 가중 처벌조항도 ‘범죄단체 등의 조직(114조)’ ‘상습범(351조)’ 에 불과하다고 했다.

오 판사는 “이러한 현행 법률은 국민 다수의 피해자들에게 생존을 위한 기본 필수조건인 주거생활의 안정을 파괴하고, 경제적으로 취약한 피해자들의 삶과 희망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다액의 재산상 손해를 끼쳐 주택임대차 거래에 대한 사회적 신뢰를 망가뜨리는 악질적인 사기범죄를 예방하고 처벌하는데 매우 부족하다”면서 “입법부에서도 이 사건과 같은 집단적 사기 범죄에 적절한 구성요건과 처벌 정도를 정한 법률을 제정해 줄 것을 제안한다”고 했다.

실제 이번 판결에 대해 전세사기 피해자들도 범행 규모에 피해 형량이 너무 낮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병렬 인천 미추홀구 전세사기 대책위원회 부위원장은 “전세사기 피해자로 인정됐으나 아직 경찰 수사가 안되고 있는 피해자까지 합하면 2700여 세대가 2000억원의 전세 보증금 피해를 본 것으로 추산된다”면서 “다른 피해자들의 피해까지 합쳐 형량을 더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오 판사는 “형사소송법의 구속기간을 부당하게 단기로 제한해 법원의 심리 기간을 강제로 단축하는 일이 없도록 형사소송법도 개정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오 판사는 “일제강점기의 인신구속 기간 장기화 경험에 따라 도입된 구속기간 제한 규정을 시대의 흐름에 맞게 적절하게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