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이 두려운 기재부 만년 사무관들[세종팀의 정책워치]
※특정 구성원을 비판하려는 내용이 아니므로 취재원은 모두 익명으로 서술했습니다.
아직도 사무관이야? 승진은 대체 언제 시켜준다니?
기재부 사무관들을 만나서 얘기하다보면 A 사무관처럼 ‘명절 공포증’을 호소하는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습니다. 친척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기재부 사무관들의 승진 여부는 종종 이야깃거리가 되곤 합니다. 행정고시 중에서도 난도가 높은 재경직에 합격해 ‘핵심 부처’로 손꼽히는 기재부에 들어간 조카, 사촌의 행보는 친척 중 누구라도 궁금해할 만한 이슈겠죠.
A 사무관은 “농담처럼 ‘직장에서 사고쳐서 승진 못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를 하기도 한다”며 “웬만하면 그러려니 하고 웃어 넘기지만 요즘은 정말 기분이 상할 때도 있다”고 했습니다.
“늦어지는 승진, 자존심에 상처”
기재부는 정부 중앙 부처 중에서 승진이 늦은 곳으로 유명합니다. 다른 부처는 5급 사무관에서 4급 서기관까지 평균 8~9년이 걸리지만, 최근 기재부는 짧으면 12년에서 길면 15년 이상까지도 걸린다고 하죠. 자리는 제한돼 있는데, 연차가 내려갈수록 인원은 많아져 “1, 2년차 새내기 사무관들은 4급 승진에 20년이 걸릴 수도 있다”(3년차 B 사무관)는 말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승진이 늦는다는 건 여러 문제로 이어집니다. 단순히 친척들 앞에서 면이 안 선다거나 월급(2023년 기준 5급 사무관 1호봉 월급 265만700원)이 적어서 불만인 것만은 아니고요. “조직원들의 자존심에 상처”(13년차 C 사무관)가 생긴다는 게 공통된 의견입니다. ‘기재부에서 일한다’는 자부심으로 살인적인 야근도 버텨내는 사무관들이지만, 요즘은 이마저도 무너지고 있다는 건데요.
다른 부처 동기랑 편하게 전화 통화를 하는데, 이 동기는 이미 승진해서 과장을 달았거든요.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업무 얘기를 좀 물어봤는데 ‘아, 그건 내가 잘 모르니까 우리 사무관이랑 통화를 한 번 해보라’는 거예요. 기분이 확 나쁘더라고요. 당연히 악의 없이 한 얘기겠지만 솔직히 서운한 거죠. 한편으로는 ‘이 친구는 이미 관리자 시각에서 업무를 대하고 있는데 나는 아직도 일선 실무자로만 일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어서 기분이 참 그렇더라고요.(C 사무관)
사실 기재부는 예전부터도 타 부처에 비해 승진이 늦었던 게 사실입니다. 항상 사무관 숫자는 많고 승진 자리는 적어 다른 부처에 비해 2, 3년씩 승진이 늦은 건 예사였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 격차가 5년 이상으로 확 벌어지면서 좌절감을 느끼는 사례도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방 도청에서 근무를 시작해 사무관 초년생 때 기재부로 이동한 D 사무관은 “도청에서 6급 주사로 함께 일하던 분이 최근 4급으로 승진했다고 연락이 왔다”며 “지자체에선 승진이 빨라서 이렇게 계급이 역전되는 경우도 흔히 있다”고 했습니다.
그럼 왜 승진이 점점 늦어질까요? 기재부 안팎에선 2008년 기획예산처와 재정경제부가 기획재정부로 합쳐지면서 인사 적체가 시작됐다고 보고 있습니다.
나뉘어 있던 정부 부처가 하나로 합쳐지면 과장, 국장 등 간부 자리도 구성원 숫자에 비례해 늘어야 할 거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정부 각 기관은 기획조정실, 대변인실, 인사과 등 지원 부서를 갖고 있는데, 여러 조직이 하나로 합쳐지면 지원 부서도 1개씩만 필요하니 그만큼 자리가 줄어들게 됩니다. 또 부처 통합 때 인사혁신처와 협상하는 과정에서 계급별 정원이 줄기도 합니다.
‘기재부 해체’ 공약 은근히 반기기도
정리하면사람은 늘었는데 자리는 줄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승진 대기자는 많아지는데 자리는 그대로니 연차가 낮아질수록 승진까지 걸리는 기간이 길어졌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대선 후보 시절 내놓은 ‘기재부 해체’ 공약에 은근히 기대를 거는 구성원이 많았다고 합니다. 당시 이 대표는 “기재부의 제일 문제는 기획·예산·집행 기능을 다 가진 것”이라며 “예산편성 기능을 떼어서 청와대 직속 또는 총리실 직속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고 했습니다.
언뜻 생각하면 조직의 권한이 줄어드는 일인데 왜 반길까 싶지만, 조직이 쪼개지면 앞서 말한 지원 부서가 많아져 실·국·과장 등 간부 자리가 늘어나니 승진 기회가 더 생길 거라는 기대가 있었다고 합니다.
‘기재부 사무관이 그만두고 로스쿨에 갔다더라’, ‘가상자산 거래소로 이직했다더라’ 하는 얘기는 세종 관가에서 수 년째 돌고 있는 얘깁니다. 일은 많고, 승진은 멀어보이니 다른 길을 택하는 이들이 많은 거죠. 지난해 말에는 저연차 사무관 4명이 한꺼번에 로스쿨과 치의학전문대학원에 합격해 떠나면서 조직이 술렁이기도 했습니다.
인사 적체를 해결할 방법은 결국 “윗선에서 인사혁신처나 행정안전부 등 공무원 인사를 담당하는 부처와 담판을 짓는 것”(11년차 E 사무관)이라는데요.
조직의 수장인 부총리를 포함한 ‘윗선’이 인사 적체 문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해결을 위해 나서는 게 필요하다는 겁니다. 하지만 과연 그런 일이 벌어질지에 대해선 아직 회의적인 시각이 더 많아보입니다.
윗분들 사이에선 여전히 ‘싫으면 나가라’, ‘너 아니어도 일할 사람 많다’고 생각하는 분위기가 있는 것 같아요. 매년 사무관이 수십 명씩 들어오니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하죠. 조직 개편이 쉬운 일도 아니고… 솔직히 큰 기대는 없어요.(E 사무관)
조응형 기자 yesbr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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