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계절 이 여행] 강릉을 사랑한 얼굴들
(시사저널=글 강은주·사진 신규철)
강원도 강릉의 산과 바다, 문화유산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이 도시에 싱그러운 숨결을 불어넣은 크리에이터 4인이 우리의 걸음을 안내한다.
강릉에 닿을 때마다 이 짧은 시를 생각한다. "늙으신 어머님을 고향에 두고/ 외로이 서울길로 가는 이 마음/ 돌아보니 북촌은 아득도 한데/ 흰 구름만 저문 산을 날아 내리네". 고향을 향한 애틋함, 기구하고도 험준한 대관령 고개의 풍광이 녹아 흐르는 글줄. 서른여덟의 사임당이 산마루에서 쓴 '유대관령망친정'이다. 강릉이란 도시의 질감과 정서, 시간과 거리 감각을 이처럼 절묘하게 드러낸 문장이 또 있을까 싶다.
철길과 고속도로가 놓이기 전 강릉은 사임당이 썼듯 아득히 먼 고장이었다. 오죽하면 과거 이곳 사람들은 대관령을 넘어갈 일 없이 평탄하게 살다 간 이들을 행운아라고 여길 정도였다. KTX를 타고 서울역에서 강릉역까지 불과 2시간 만에 주파하는 시대. 수많은 이를 압도하고 또 사로잡았던 강릉의 옛 관문, 대관령을 다시 만나러 가는 길이다. 장엄한 회청색 능선이 저 멀리서 파도치듯 아물거린다.
자연의 소리에 응답하는 시간
대관령은 영동과 영서, 강릉과 평창에 걸친 분수령이다. 이번 여정의 첫 경유지는 강릉의 서쪽 끝, 성산면 어흘리에 자리한 작은 은신처다. "어서 오십시오. 여기는 성산면입니다." 환대 어린 표지판을 지나자 눈앞에 보이는 건 온통 숲, 숲뿐이다. 그로부터 10분을 더 들어가 '들을리 소향'에 다다른다. 첩첩산중 자연에 파묻혀 치유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삶을 꾸려 온 최소연 대표가 낯선 객을 살갑게 마중한다. "잘 오셨어요. 이곳은 대관령 아흔아홉 굽이를 넘어 100번째 고개에서 만나는 가상의 마을이자, 몸과 마음의 힘을 기르기 위한 웰니스 코스를 경험하는 장소예요."
우선 과로로 점철된 일상의 묵은때를 씻어 내기로 한다. '대지의 걸음'은 들을리 소향 인근에 펼쳐진 숲에서 맨발 걷기와 나무 끌어안기, 명상 등으로 이루어지는 어싱을 체험하는 코스다. 산은 깊고 숲은 넓으니, 산책길은 계절과 날씨에 맞추어 매번 달라진다. "이곳은 100년 전에 씨를 파종해 조림한 솔숲이에요. 예부터 집 짓는 데 쓰던 소나무가 보기 좋게 자라 울창한 녹음을 이뤘어요." 최 대표가 이끄는 대로 발 벗고 숲길을 걷는다. 걸음마 하듯 한 발짝씩 조심스레 지면을 디뎌 본다. 바닥에 깔린 푹신한 솔잎이 낯설고도 기분 좋은 자극을 준다. "나고 자란 강릉을 떠나 서울에서 직장을 다녔는데, 우연히 타이 치앙마이에서 트레킹 여행을 하고 돌아와 인생을 재정비하겠다고 결심했어요. 도시 생활을 정리한 뒤엔 강원도 화천과 평창에서 머물며 여러 가지 치유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시도하기도 했죠." 끝내 대관령 자락에 생활을 의탁한 그는 단출하고 고요한 삶을 꿈꾼다. "자연에서 태어났으니 자연으로 살고 싶어요." 숲 내음 같은 말마디를 선물 받은 순간. 우리가 끌어안은 아름드리 소나무에 환한 아침 햇살이 내려앉는다.
이제 대관령 정기가 깃든 몸을 온기로 어루만질 차례. '음미하는 소향달: 차곡차곡'은 최 대표가 손수 덖고 빚은 두 잔의 차와 두 잔의 술을 번갈아 마시면서 긴장을 누그러뜨리고 감각을 일깨우는 프로그램이다. 바지런히 움직이던 그의 손에 찻잔과 술잔이 들린다. 진피차와 '소향 약주', 돼지감자말차와 '소향 탁주'의 향내가 코끝을 간질인다.
"제게 술 빚는 일은 전통을 복원하고 자연을 순환하는 과정이에요. 이 술에 들어간 쌀은 강릉 사천면에서 옛 방식을 따라 햇볕과 해풍만으로 말려 가공한 거예요. 쌀, 물, 누룩으로 술을 만들고 남은 지게미는 농사를 돕는 소 일곱 마리의 양식이 되지요. 알고 보면 모든 단계가 하나로 이어진 셈이에요." 목구멍을 타고 차향이, 술 기운이 온몸으로 스민다. 곁들이로 나온 연근, 무, 떡의 담백한 맛이 풍미를 돋우니 언 뺨이 스르르 녹는다. "사찰에서는 술을 '곡차'라고 불러요. 술은 몸을 건강하게 하는 균이자 약이에요. 정월대보름에 복쌈을 먹고 귀밝이술을 마시는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어요." 자연에서 충전한 기운 덕일까. 강릉의 맹렬한 겨울 앞에 감히 맞설 용기가 샘솟는다.
바다의 위로가 당신에게 닿기를
바다는 하늘의 거울이다. 강문 바다가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란 하늘을 투영하는 오후, 백사장 뒤꼍 골목에 자리한 공방 겸 소품 숍 '유리알유희'의 주인장 이경화 대표는 가방을 둘러메고 산책을 나선다. 그가 눈을 반짝이며 찾아 헤매는 것이 있으니, 이름하여 '바다유리'다. 바다에 흘러든 폐유리가 모래와 물살에 마모되면 석회와 탄산나트륨 성분이 녹아 반투명한 우윳빛으로 바뀐다. 바다유리는 이처럼 오랜 시간 물리적․화학적 변화를 거친 유리 자원을 뜻한다. "날카롭고 위태로운 유리가 뭉툭하고 따스한 질감을 지닌 바다유리로 변한다니, 참 신기하죠? 누군가에겐 쓰레기였을 테지만 알고 보면 이렇게 보석처럼 예쁘다는 사실도요." 세월의 풍파를 견뎌 내고 운명을 거스른 바다유리의 맷집이야 보석보다 단단할 테다.
프랑스 니스의 바닷가에서 처음으로 바다유리를 만난 이 대표는 고운 빛깔과 촉감에 홀려 공예를 시작했다. 고향인 강릉에 귀촌해 유리알유희를 차리고 작업을 이어 나가던 그는 2021년 중소벤처기업부가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 선정한 '로컬 크리에이터'로 활동하며 바다유리를 알리는 작은 전시관을 꾸몄다. 여기서 얻은 정보에 따르면, 강릉 바다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는 바다유리 색깔은 옅은 청자색이다. 한때 강원도 지역 소주로 유통한 '경월소주'의 영향이다. 프랑스에서는 포도주를 담던 짙은 갈색 유리병 조각이 자주 나온다고 하니, 흥미롭고도 씁쓸한 이야기다.
최근엔 비치 코밍, 즉 일부 해양 표류물을 공예 소재로 재활용하는 일이 널리 유행하면서 바다유리의 위상이 높아졌다. 이 대표의 수집 노하우는 비 온 다음 날, 썰물 시간을 공략하는 것. 살뜰히 모은 바다유리는 공방 안쪽 작업실에서 바다와 모래와 바람의 빛깔을 담은 작품으로 거듭난다. "이곳엔 혼자서 바다를 보러 오는 여행자가 많아요. 삶의 중요한 분기점에 놓인 이들에게 바다의 위로가 닿기를 바라요. 날씨나 계절에 구애되지 않고, 여기서만은 저마다 보고 싶었던 바다를 만났으면 해요."
착한 재료로 아름답게 만든 한과
볕 좋은 사천 땅에서 길러 낸 쌀은 예부터 맛이 좋기로 유명했다. 사천 한과마을 안에서도 솜씨 좋기로 이름난 최씨 가문 여인 최현철은 1939년 이곳에 방앗간을 개업한다. 먼 훗날, 어머니의 손맛을 지키고 싶었던 아들 김남대 대표와 그의 아내 조미영 대표가 선미한과를 창립했다. 그리하여 오늘날 3대 김성래 대표와 김지혜 실장은 전통을 고수하는 집념, 동시대 감각에 대한 포용력으로 가업을 계승하고 있다.
은은한 유과 빛깔 외관이 눈을 사로잡는 선미한과 건물에 들어서면 통창 너머로 한과 제조 공정을 맞닥뜨린다. 설비와 위생 장비는 현대화했으나 모든 작업을 여전히 손으로, 옛 방식 그대로 해내는 모습이 묘한 감동을 안긴다. 이곳 제품은 자연 발효시킨 백옥찰을 콩물로 반죽해 고소하면서도 그윽한 풍미를 살리고, 무쇠 가마솥에서 네 시간가량 반죽을 저어 전분을 균일하게 호화하는 것이 특징이다. 찜기로 가마솥 역할을 대체한 공장형 납품 업체와 대별되는 지점이다. '착한 재료로 아름답게 만든 한과'라는 슬로건에 부응하기 위해 바탕을 신중하게 재단하고, 신선한 기름으로 건조한 바탕은 유탕해 부풀린 뒤 조청으로 버무려 건강한 단맛을 더한다. 여기에 바다, 해당화, 연꽃 등 강릉의 자연에서 영감을 얻어 디자인한 패키지까지 입혀 갈무리한다.
얼마 전부터 선미한과는 전통 한과에 서양식 디저트 기법을 접목해 차와 한과 차림상을 선보이는 '라운지 시시호'를 운영 중이다. 한국 다과의 미감을 만끽하는 것은 물론, 선미한과의 전통과 유산이 새로운 시대를 만나 어떻게 진화했는지 엿볼 수 있는 시간이다. 김지혜 실장은 맞이차와 한입 유과, 디저트 한 상 차림을 정성 어린 손길로 내어 준다. "할머니 손맛과 강릉의 풍미를 떠오르게 하는 요소를 곳곳에 넣어 보았어요. 강릉 딸기를 토핑한 유자 양갱은 물론, 강릉 오미자 소르베와 씀바귀 정과를 올린 쌀튀밥 파베 초콜릿까지 어느 하나 공들이지 않은 게 없어요." 과연 세월과 유행을 비켜 간 강릉의 참맛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강릉의 얼굴
강릉에는 산과 바다, 호수와 솔숲, 그리고 우리 인류가 힘을 모아 보존해야 할 문화유산이 있다. 바로 강릉단오제와 강릉관노가면극이다. 늦봄과 초여름 사이, 남대천 변의 녹음이 한껏 무르익을 즈음 강릉은 축제의 흥취와 신명에 휩싸인다. 2005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강릉단오제는 한국 최대 행사 규모를 자랑한다. 작가이자 강릉을 대표하는 문인인 허균이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에 펴낸 문집 에 따르면, 그 또한 계묘년 5월 초하룻날 명주(오늘날 강릉)에 머무르면서 대관령 산신을 맞는 연희를 감상하며 즐겼다. 이때의 연희를 강릉관노가면극의 원형으로 추정한다.
2022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오른 한국의 탈춤 18종목 중 하나이자 국가무형문화유산인 강릉관노가면극은 단오제례, 단오굿과 더불어 강릉단오제의 주축을 이루는 의식이다. 이름처럼 탈놀이를 이끄는 주체는 관아의 노비였다. 국사성황신을 봉안한 성황당 앞에 선 이들은 장자마리, 양반광대, 소매각시, 시시딱딱이라는 인물이 되어 다섯 과장에 걸친 춤과 소동을 해학적으로 선보여 왔다. 흥미로운 사실은 연희 전체가 무언극으로 이루어진다는 것. 강릉관노가면극은 몸짓언어의 원초적 쾌감으로 가득한 탈놀이다.
경포 바다는 강릉관노가면극의 역사적 실체를 기록한 허균의 생가 터와 맞닿아 있다. 이곳에서 강릉관노가면극의 현재를 이끄는 얼굴을 만났다. 탈을 쓴 채 행드럼을 연주하는 새로운 시대의 시시딱딱이, 김문겸 이수자다. 고등학교 시절 강릉관노가면극에 입문해 지금까지 전통 연희자의 길을 걸어온 그는 지역 고유의 문화를 퍼트리는 열망과 패기가 가득한 젊은 예술가다. 예순에서 일흔에 이르는 관노가면극보존회 구성원 사이에서 청년기를 보냈기에 누구보다 교육과 전승, 대중화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달은 그다. 대학원에서 국악교육을 공부하며 탈춤은 물론 다양한 예술 장르를 섭렵한 까닭이다.
김문겸은 무대에서 관객을 기다리지 않는 공연가다. 그는 벚꽃이 만발한 경포대에서, 어둠이 내린 월화거리에서, 인적 드문 노암터널에서 퍼포먼스를 펼쳐 보인다. 춤과 음악이 발산하는 특별한 기운에 관객이 모여드니, 김문겸이 존재하는 곳 어디든 금세 무대가 된다. "제가 의도한 대로 관객이 반응할 때 희열을 느껴요. 버스킹 공연을 통해 관객을 찾아가는 이유예요." 그는 또한 전통을 계승하는 데 그치지 않는 전방위 아티스트다. 무언극이라는 강릉관노가면극의 특징을 활용해 농인 학생들과 교유하거나, 행드럼 연주에 국악을 접목해 실험적인 퍼포먼스를 시도한다. 행드럼의 몽환적인 음감이 궁금하다면, 강릉의 공연 예술 구심점인 명주예술마당에서 2월 중 열리는 그의 공연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촛불 200개를 켠 채로 행드럼을 연주할 예정이에요. 음악에 몸과 마음이 자연스레 감응할 거예요."
그의 최종 목표는 기술과 예술을 아우르며 이 시대와 소통하는 것. "2021년 강원문화재단 신진 예술가 지원 사업을 계기로 일인극 LED 탈놀이를 구체화했어요. 하나의 탈과 의상으로 강릉관노가면극 등장인물 넷을 형상화하도록 LED 배선 작업을 했고, 스위치를 바꿔 가며 모든 역할을 연기하는 거죠." 경포호 산책로에 둥실 뜬 거대한 달 조명 앞에서 LED 탈을 쓴 김문겸이 춤을 추기 시작한다. 양반광대의 거만한 얼굴이 금세 시시딱딱이의 해학적인 표정으로 바뀐다. "제가 몸담았던 공연 제목 중 하나가 '술술탈탈'이에요. 기술과 예술을 더한 탈을 쓴 채, 탈 난 걸 털어 버리자는 의미예요." 마침 쾌청한 바닷바람이 불어와 그의 옷자락을 훌훌 건들거린다. 술술탈탈, 덩실덩실, 희희낙락. 황홀한 달밤이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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