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릴 수 없는 깃발 ‘대안교육’의 지속을 위해
[세상읽기] 이병곤|제천간디학교 교장
딱 한번 마라톤 완주를 해본 적 있다. 2009년아일랜드 수도에서 열린 더블린마라톤에서였다. 뛰는 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서 국제사면위원회(앰네스티 인터내셔널)로 이메일을 보냈다. 며칠 뒤 우편물 한뭉치가 날아왔다. 어떻게 모금할지 자세히 알려주는 설명서, 단체 상징물이 새겨진 라운드 셔츠 등이 담겨 있었다.
“아직 괜찮아 보여요. 힘내서 뛰세요. 앰네스티!”
행사 당일 달리는 중간중간 국제사면위원회 셔츠를 입은 활동가들이 간식과 물을 건네며 목청 돋워 격려해줬다. 마라톤 완주를 준비하는 5개월 동안 90여만원을 모아 기부했다. 모은 돈을 따로 송금할 필요는 없었다. 국제사면위원회가 알려준 모금 전용 웹주소를 소셜미디어로 연결했더니 후원자들이 직접 기부금을 낼 수 있었다. 신용카드 번호 입력만으로도 기부할 수 있어 편리했다. 나는 건강을 챙겨서, 벗들은 나와의 인연으로 기부금을 내서, 공익단체는 후원금을 받아서 모두가 이득인 셈이었다.
2000년대 초 유학 시절 런던 캠던구에 있는 ‘와크(WAC: Weekend Arts College) 공연예술·미디어학교’의 대표 실리아 그린우드 선생을 만난 기억이 떠오른다. 가난한 집 청소년들에게 미술, 연극, 공연예술, 영상기술, 웹디자인을 가르치는, 일종의 예술계 대안교육기관의 운영자였다. 서류 뭉치와 온갖 장비의 선들로 뒤엉킨 사무실을 배경으로 실리아 선생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예술교육을 통한 청소년들의 자기 발견이 얼마나 신비롭고 중요한 일인지를 힘주어 말했다.
인터뷰 끝자락에 정부 공식 지원 없이 어떻게 300명 넘는 청소년들에게 예술교육 프로그램 수강 혜택을 줄 수 있는지 물었다. 시민들 후원금, 지방정부 지원금, 학생들이 내는 약소한 참가비, 유럽연합이 내려주는 문화예술진흥기금, 수익사업, 공모에 지원하여 받는 사업비 등으로 꾸려나간다고 답했다. ‘연중 수십군데 기관에 공모지원 서류를 내느라 엄청 바쁘다’며 양손을 벌린 채 어깨 한번 으쓱할 뿐이었다. 공익 기능을 수행하는 민간 자선단체로서의 교육기관이 그렇게 자립적인 형태로 존립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신기했다.
‘도시×리브랜딩’을 읽었다(박상희·이한기·이광호, 2023). 어떻게 하면 특정 도시를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경험하게 할 것인가. 이 어려운 주제를 놓고 고민하는 모습을 엿보았다. 도시 브랜딩의 시작은 그 도시의 비전, 철학, 핵심 가치를 무엇으로 삼을지부터 정하는 것이라 했다. 해당 도시가 가진 실체를 바탕으로 정체성을 만들고, 그와 관련한 소통 방식을 어떻게 설계하는가에 따라 외부인이 갖게 되는 도시 이미지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브랜드 경험 설계 방법’에 초점을 두어 국내외의 다양한 도시 리브랜딩 사례를 소개해 준다.
우리나라 비인가 대안학교 현장이 무척 어렵다. 지난 25년 동안 대안교육계가 힘들지 않은 해는 없었다. 하지만 지난해 말부터 상황이 정말 예사롭지 않다. 신입생이 너무 많이 줄었기 때문이다. 3년 뒤 초등학교 취학 학생 수가 29만명 수준으로 떨어진다는 통계도 보았다.
잠들기 전 이런저런 궁리를 하다 보니 옛 기억들이 자꾸 떠오른다. 모두에게 보람과 행복감을 전해주는 세련된 기금모금 방식을 어떻게 기획할 수 있을까. ‘와크 공연예술·미디어학교’처럼 교육기관의 공익적 성격을 잃지 않으면서도 재정적인 독립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또렷한 정체성을 지켜오면서도 다양한 교육 실험을 펼쳐온 대안교육기관의 실천을 어떻게 리브랜딩해서 더 많은 사람과 경험을 공유할 수 있을까.
다행히 아직 학교는 든든하다. 하지만 마을 일이 걱정이다. 예비사회적기업 인증을 받아 1년 동안 운영해온 회사 ‘마을너머’는 사업이 아직 제 궤도에 오르기 전인데, 사람을 고용할 지원금이 모두 끊겼다. 마을과 학교를 더 든든하게 연계해줄 마을공방 추가 건립도 자금 부족으로 아직은 요원하다.
민간의 노력으로 지역사회에 바탕을 둔 공적 영역을 꼭 만들어볼 거다. 가정, 시장, 국가와는 또 다른 삶의 터전으로서 공유 공간을 이른다. 그 안에서 경쟁과 두려움, 불안 없이 자라는 청소년들을 계속 바라보며 지켜갈 심산이다. 유치환 시인이 노래했듯이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이며, 결코 내릴 수 없는 ‘깃발’이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공익을 지향하는 실험이고, 도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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