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칠리아 신전 텔라몬 상은 고려 경천사탑과 어떤 인연 있었을까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의 얼굴인 고려 경천사터 10층 석탑은 이탈리아 시칠리아섬에서 2500여년간 자리를 지켜온 옛 제우스 신전과 내밀한 인연을 지니고 있었다. 이탈리아에서 유학한 한국 건축가 윤재원(70) 박사가 지난달 29일 시칠리아 남서부 아그리젠토시에 있는 고대 그리스신전 유적지인 ‘신전의 계곡’ 부근 피에트로 그리포 박물관에서 청중의 갈채 속에 그 인연에 얽힌 이야기들을 풀어냈다.
아그리젠토시와 신전의 계곡 관리기구가 한국∙이탈리아 수교 140돌을 맞아 ‘문화유산 유적지의 박물관화와 맞춤 박물관에 대하여’를 주제로 마련한 양국 전문가들의 공동심포지엄 자리였다. 아그리젠토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의 심볼 모티브가 된 유적지이며 고대 그리스인들이 이주해 만든 신전 유적의 규모와 위상이 파르테논신전이 있는 그리스 아테네 못지않다는 명소다.
“19년 전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전시관 통로 뒤쪽 홀에 고려시대의 경천사석탑을 꾸려넣은 사연을 전하려고 왔습니다. 왜 굳이 찾아와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지 의아하지요? 때는 3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유학한 로마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결혼한 뒤 신혼여행을 여기로 왔어요. 바로 여기 박물관을 찾아갔는데 거대한 석상 텔라몬이 서 있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어요.”
1967년 개관한 이 박물관을 설계한 로마대 건축과 교수 프랑코 미니시는 신전의 계곡 한가운데서 제우스신전을 떠받쳤던 거대한 남성상 텔라몬을 전시하려고 천장 높이만 10m를 넘는 제우스 홀을 따로 만들었다. 1960년대 초까지 신전의 폐허 옆에 부서진 채 방치됐던 텔라몬 상 일부를 복원해 온전한 석상으로 만든 뒤 전용홀에 전시하게 한 초유의 시도였다.
“텔라몬은 아그리젠토의 고대 유산을 상징하는 작품이 됐지요. 저는 깊은 감동을 받았어요.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이 있던 서울 광화문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하면서 용산 박물관을 새로 짓게 됐는데요, 제가 그때 국내 최초로 주요 소장품을 주인공으로 전시 공간을 연출하는 맞춤형 박물관을 기획했었습니다. 아그리젠토의 텔라몬상 전시에서 받은 기억과 영감을 모아 새 박물관에도 대리석탑인 경천사탑을 대표 소장품으로 돋보이게 전시하기 위한 큰 홀을 만들기로 마음먹었지요.”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는 민족정기 차원에서 총독부 청사를 70여년 만에 헐고 새로 박물관을 짓게 된 과정과 경천사탑을 새 박물관 앞자리 으뜸홀에 설치하려다 당대 고려 권력자들이 원나라 황실을 위해 원나라 장인들을 건립에 관여시켜 지었다는 사서 기록 등을 이유로 뒤편 홀에 밀려나면서 원래 구상이 온전히 실현되지 못한 아쉬움 등을 차분하게 설명했다.
신전의 계곡은 기원 전 6세기 본토와 로도스 섬의 그리스인들이 건너와 도시국가 아크라가스를 건설하면서 남긴 유적이다. 제우스 신전, 헤라클레스 신전, 주노 신전, 카스토레와 폴루체 신전 등 10여개의 신전터들이 양호한 상태로 남아있다. 윤 박사가 지칭한 제우스 신전에는 기원전 5세기 기둥을 받쳤던 것으로 추정되는 높이 8m가량의 남성거인 조각상인 텔라몬의 부재들이 지금도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지난 100여년 동안 부재들을 수습해 복원한 결과 현재 박물관 안에 1개의 신상을 전시할 수 있었고 3구는 머리를 수습해 전시 중이다. 이 조각상이 하부 기단과 더불어 30개가 넘는 열주를 이루며 허물어지기 전의 위용을 단박에 느끼게 했다. 현재 유적 현장에는 모조품 텔라몬상을 눕힌 채 전시 중인데 시와 학계 쪽은 부재 발굴과 복원 작업을 지속해 유적 현장에 다른 텔라몬상을 따로 세울 계획이다. 옛 유적에 인공적인 복원 건물을 세우거나 기둥 벽체 등에 새 부재를 갈아 끼우는 것을 최대한 피하고 시간의 흐름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폐허의 아름다움(LA BELLEZZA DEI RUDERI)’이란 특유의 미학적 명제가 현지 유적에서는 관철되고 있었다.
이날 학술대회는 국내에서는 박물관 설계 전문가인 윤 박사 외에 세계유산이 된 가야유산 복원 선양 사업을 벌이고 있는 윤형원 국립김해박물관장이 온라인으로 참여해 가야 해양문명 유산들을 소개했고 이탈리아에서는 주세페 아베니아 박물관장과 도나텔라 만조네 연구관, 건축가협회장 리노 라 멘돌라 등 현지 문화유산 전문가들이 함께 발표·토론했다. 문화유산 분야에서 세계적 트렌드인 야외 유적의 현장 박물관화 흐름에 대해 아그리젠토와 한국의 박물관 전시 시스템 등을 각각 소개하면서 비교 검토하는 내용이 담겼다.
텔라몬 상이 가져다준 맞춤형 박물관의 열망이 한국 국립박물관의 경천사탑 홀을 낳았다는 윤 박사의 발표는 심포지엄이 끝난 뒤에도 계속 화제를 낳았다. 행사 직후 신전의 계곡 남쪽 산 레오네의 바닷가 레스토랑에서 열린 오찬에서도 경천사탑이 원나라 황실을 위해 원나라 장인들이 지었다는 점이 화두가 되어 미적 가치와 역사적 가치 가운데 어디에 우선을 두고 작품을 배치해야 할 것인가를 두고 건축가와 문화유산 행정가들 사이에 열띤 토론이 이어졌다. 건축가 알폰소 미차케는 “현대 건축물 안에 고려탑이나 텔라몬 같은 수백, 수천년 전의 유물을 집어넣어 연출한다는 것은 역사를 보존하는 것을 넘어 새롭게 조명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의미있고 가치 있는 일”이라고 했다.
심포지엄 전날에는 한국의 무용과 성악, 차 문화를 무대에서 실연하는 문화예술 딸림 교류행사도 마련되었다. 아그리젠토 출신의 극작가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거장 루이지 피란델로의 이름을 딴 시내 공공극장 로비홀에서는 지난해 미국 뉴욕의 일무 공연을 안무해 세계적인 화제를 모았던 정혜진 전 서울시무용단장의 ‘비상’ 창작춤 단독공연이 펼쳐져 현지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현지 성악계에서 활동 중인 소프라노 이윤순, 이지영씨의 한국가곡과 오페라 아리아 무대, 다도연구가 추순옥, 김무진씨의 전통차 시음행사 등도 잇따라 펼쳐져 한류의 향기를 흩뿌렸다. 현장을 지켜본 프랑코 미치체 시장은 “내년 이탈리아의 문화수도로 지정된 아그리젠토는 역사적 기억과 물질적, 비물질적 유산의 아름다움을 주축으로 다양한 문화 정체성을 찾는 교류 프로젝트를 추진해 왔는데 한국 전문가들과의 문화유산 교류행사는 이런 취지에 부합하는 인상적인 성과를 남겼다”면서 “앞으로 공원, 조형물 등 여러 방향으로 교류를 확대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시칠리아/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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