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망 부재로 짊어진 ‘생계 유지형’ 채무…사회가 고통 덜어줘야

박준용 기자 2024. 2. 8.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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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파산] ④ 생계형 채무, 오롯이 개인의 책임일까
파산자 10명중 4명 ‘생계 유지형’ 채무
사회가 고통 분담해야 할 ‘사회적 부채’
개인회생 상황에 처한 김민자(가명)씨가 자신이 복용하는 약을 여행용 가방에서 꺼내고 있다.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개인 파산자에 대해 얘기할 때 사람들은 흔히 “투자 실패나 투기 혹은 과소비를 한 사람의 빚을 왜 탕감해주느냐”고 묻는다. 하지만 전문가들의 견해는 다르다. 파산자들에 대해 분석해보면, 본인이나 가족 구성원이 실직·재난·질병 등의 상황에 처해 생계와 부양에 돈을 쏟아붓다가 빚을 지게 되는 경우가 많다. 최근 투자(주식 등) 실패로 인한 파산자가 증가하는 추세이지만 여전히 11.3%(서울회생법원 2022년 개인파산사건 통계조사 결과보고서) 정도이고, 그나마 ‘사기 피해’와 합친 수치다.

한국사회보장학회의 학술지에 실린 논문 ‘과중채무자의 유형화와 특성 분석: 개인채무자 지원제도 이용자를 중심으로’(박정민·노법래, 2017)에 실린 채무조정제도 이용자 분석 결과도 비슷하다. 개인파산과 개인회생, 개인 워크아웃 등의 채무조정제도 이용자 209명을 분석한 결과, ‘생활형’(생활비·의료비·교육비) 채무자가 37.8%(79명)로 가장 많았고, ‘사업형’(사업이나 점포 운영의 실패)이 32.1%(67명), ‘금융피해형’(보증이나 명의 도용과 같은 사기 피해)이 17.7%(37명), 기타(연체이자, 도박이나 취미, 음주 등)가 12.4%(26명)였다. 논문을 쓴 박정민 서울대 교수(사회복지학)는 “과중한 채무의 원인은 흔히들 생각하는 투자나 투기, 과소비가 아니다. 생계를 유지하려다 소득이 감소해 파산이나 회생 신청까지 오는 경우가 많다”며 “논문에서 ‘사업형’으로 분류된 채무자에 소상공인이 포함된 걸 고려하면, 설문 대상 채무자 절반 이상이 생활 용도로 빚을 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박세연(가명·63)의 채무기록이 대표적이다. 박세연은 2019년 음식점을 열었으나 이듬해 코로나19로 인해 손님이 뚝 끊겼다. 2022년에는 뇌혈관 질환이 발병해 뇌수술을 하는 바람에 가게 문을 닫는 일이 많아지면서 결국 폐업을 하게 됐다. 같은 해 건설사에 다니던 동거인도 5개월 체불임금과 퇴직금도 받지 못하고 일자리를 잃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영향으로 건설자재 값이 상승한 탓이었다. 박세연은 ○○카드에서 800만원을 빌려 병원비로 쓰고, ○○은행에서 500만원을 빌려 생활비로 썼다. 이렇게 쓰기 시작한 빚이 3천만원으로 불어났고, 지난해 파산 신청을 했다.

박세연처럼 감염병과 전쟁 재난으로 인한 폐업과 실직, 질병과 부양 등을 겪은 이들의 생계형 채무는 오롯이 개인의 책임일까. 전문가들은 이런 부채는 우리 사회가 개인에게 짊어지도록 맡긴 ‘사회적 부채’라고 규정했다. 한영섭 세상을 바꾸는 금융연구소 소장은 “기업 행위를 하다가 생긴 부채와 개인이 살아가다 생긴 빚은 성질이 다르다”며 “코로나19 같은 재난이나 학자금, 돌봄, 의료와 같은 비용은 사회적 안전망 부재로 인해 생긴 사회적 부채”라고 말했다.

정부의 정책도 사회적 부채에 영향을 끼쳤다. 서민들에게 의료·교육·돌봄과 관련한 복지 지원책보다는 대출 지원을 하는 데 집중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서민에게 저리로 대출을 제공하는 서민정책금융을 위해 지난해 10조6758억원을 투입했다. 전년(9조7649억원)보다 9.3% 늘었다.

대출은 일시적 도움이 될 수는 있어도 근본 대책이 될 수는 없다. 한 소장은 “코로나19 당시 소상공인에게 재난지원금을 더 주는 대신 대출 위주로 상황을 모면하게 했다”며 “사회적 부채를 개인화한 대표적 사례”라고 말했다. 가계부채 전문가인 제윤경 에듀머니 사외이사도 “대출이 안 갚아도 되는 돈은 아니지 않으냐”라며 “생활비가 부족한데 지원이 아니라 급전 빌려주는 것, 장학금을 주고 무상교육 기회를 확대하는 게 아니라 학자금 대출을 늘려주는 것이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대출보다는 부채 탕감 등의 채무조정 프로그램을 확대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렇게 해서 생산가능인구를 늘리면서 경제적 선순환 효과를 노려야 한다는 얘기다. 정부는 2022년 10월부터 코로나19 때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를 대상으로 대출 원금을 60~80%(취약계층은 최대 90%)까지 줄이는 ‘새출발희망기금’을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고금리·고물가가 이어지고 있는 올해 관련 예산은 금융위원회가 애초 요청한 7600억원에서 3300억원으로 크게 삭감됐다. 파산·회생 전문가인 김남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민생경제위원장은 “회수 가능하지 않은 가계의 사회적 부채를 탕감해줘야 그 가계가 소득 활동을 하고 세수도 증대될 것”이라고 말했다.

빚을 모두 탕감하는 개인파산보다 일부라도 갚게 하는 개인회생에 더 집중하는 법원의 보수적 관점도 바꿔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법원은 근로능력이 있다고 판단하면 주로 개인회생을 유도하는 방식을 택하는 경향이 있다. 백주선 한국파산회생변호사회 정책이사는 “재산 은닉 등의 사유만 없으면 바로 파산으로 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빚을 면책해야 새출발이 가능하다”며 “개인회생은 3년 동안 안정적으로 빚을 갚아야 하는데, 채무자가 그러기는 쉽지 않다. 대부분 다시 파산으로 간다”고 말했다.

근본적으로는 다중돌봄의 책임을 지고 있거나 간병 등의 부담을 지고 있는 이들을 위한 정부의 사회복지 제도 정비가 우선되어야 한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학술지에 실린 논문 ‘노인의 돌봄 자원 이용 영향 요인에 관한 연구’(이상우, 2022)를 보면, 한국의 노인이 가족 구성원에 의해 돌봄을 받는 비율은 2020년 기준으로 여전히 87.4%에 이른다. 2008년 노인장기요양보험 제도를 도입했지만, 이 비율은 2008년(87.8%)과 2014년(91.9%)에 견줘서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박정민 교수는 “돌봄이나 간병 문제가 채무의 출발인 비율은 그렇게 높지 않겠지만, 사업의 실패 이런 것들로 출발하다가 돌봄이나 간병이 더해질 때 훨씬 심각한 위기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이라며 “가계 부채 문제는 사회복지 제도와 사회 안전망의 안정성과 밀접히 관련돼 있다. 이런 제도가 충분히 갖춰질 때 과중 채무로 가지 않도록 막아주는 안전판 역할을 하고, 과중 채무에 빠진 사람들의 재기를 돕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박준용 기자 juneyong@hani.co.kr 김지은 기자 quicksilver@hani.co.kr 이재훈 기자 n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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