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의 5·18’ 윤광장 전 5·18기념재단 이사장 [영상채록5·18]
1942년생
광주 대동고등학교 교사
광주지역 교사단체 '삼봉회' 활동
민주교육 광주전남교사협의회 초대회장
전 5·18민중항쟁구속자동지회장
5·18 기념재단 9대 이사장
무지하다 보니, 윤광장 선생님을 몰랐습니다. 윤광장 선생을 가장 쉽게 설명하는 말은 5.18 마지막 수배자 윤한봉 선생의 친형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설명은 선생에 대한 무례입니다. 학생들을 가르치고 품어온 '영원한 오월교사' 윤광장 선생의 5.18 역사를 따라가 봤습니다.
■ "동생 재판을 보면서 내가 세상을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구나!"
역시 얘기는 동생 윤한봉 얘기로 시작됐습니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 전에는 본인은 평범한 교사였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동생 윤한봉이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집안 전체가 용공, 간첩으로 몰리면서 인생 항로가 달려졌다고 했습니다. 재판 과정에서 동생이 논리적 정당성을 주장하는 과정을 쭉 지켜보면서 "내가 세상을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구나" 느꼈다는 겁니다.
바뀐 생각은 당시 광주 대동고 교사로 일하면서, 자연스레 동료 교사들과의 활동 도모로 이어졌습니다. 가장 낮은 저항 운동으로 앰네스티에 가입해 활동했다고 했습니다. 뭔가를 더 도모하려면 가끔 만나야 하는데, 엄혹한 유신 시절 조직 이름을 갖는 것만으로 정부 '안테나'에 걸릴 수 있으니 만나서 고스톱이나 치는 모임으로 위장했습니다. 그래서 정한 이름이 '삼봉회'입니다.
삼봉회 활동은 책 읽는 모임, 양서협동조합 창립으로 이어졌습니다. 윤광장 선생 기억으로는 1979년 9월 옛 광주 YWCA 2층에 사무실을 냈다고 합니다. 그곳은 곧 광주지역 민주화 운동 인사들의 사랑방이 됐습니다. 양서조합에는 고등학생들이 자유스럽게 드나들었고, 그 학생 중에는 제자인 광주 대동고 학생들도 끼어 있었습니다.
"대동고 학생들 독서회가 조직됐어요. 자연 발생적으로 자기들끼리, 그 양서조합에 드나들던 애들을 중심으로. 나중에 들으니까 독서회 이름을 '목암'으로 지었드만요."
학생들과 유대는 깊어졌습니다. 그리고 역사는 5.18이란 비극을 불러왔고, 우연인지 필연인지 목암에서 5.18 참여자가 많이 나왔습니다.
■ "지금 나가면 개죽음이다." 온몸으로 막아선 학생 시위
"(1980년) 5월 18일은 일요일이었잖아요. 그래서 19일에 학교에 갔더니, 수업 할 분위기가 아니에요. (학생들이) '우리 부모 형제, 형님들, 누나들을 다 죽이고 있는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책상에 앉아서 책벌레처럼 공부만 하고 있으면 되겠습니까? 선생님은 저희를 그렇게 안 가르쳤잖아요.' 이렇게 달려드는데 제가 할 말이 없대요."
윤광장 선생은 당시 대동고 상황을 들려줬습니다. 학생들이 학교 운동장에 모여 시내 상황과 계엄군의 만행을 얘기하는 학내 집회를 열었고, 시내 진출을 시도했다고 했습니다. 다급해진 윤광장 선생과 동료 교사들은 " 지금 나가면 개죽음이다. 너희들하고 똑같은 심정이다마는 지금은 때가 아니다."라며 교문 앞에 드러누워 학생들을 막아섰답니다. 그리고 다음 날 광주 시내 전역에 고등학교 휴교령이 내려졌다고 회고했습니다.
학생들의 집단 동요와 참여를 막으려는 조처였지만, 시위 참여를 원천 봉쇄할 수는 없었습니다. 학생들은 개별로 시위에 가담했습니다. 다수의 학생이 돌을 들고 총을 들었습니다. 5월 21일 대동고 3 학년 정영진 학생이 시위에 참여했다가 머리에 총상을 입고 사망했습니다. 학생들이 5.18에 참여하고 희생되는 모습을 지켜보는 교사의 마음은 어땠을까? 고통스런 기억을 끄집어냈습니다. 1980년 5월 29일 저녁, 붙잡혀 끌려간 보안사에서의 얘기입니다.
"학생 하나를 데리고 와요. 우리들이 보는 앞에서 엎드려뻗쳐를 시켜놓고 몽둥이로 그놈을 가해하는데, 꼭 내가 맞는 것 같아요. 그놈 이름이 구교철입니다. 때리면서 뭐라고 하냐면 너희들 시위를 뒤에서 조종한 선생님을 대라는 거에요. 끝까지 해도 이놈이 쓰러질 때까지 그런 선생님 없다고 하면서 쓰러져요. 수사관이 가고 내가 쫓아가서 '바보같이 맞고 있으면 어쩌냐, 내 이름이라도 대든지….'
하도 많이 맞아가지고 엉덩이가 부어서 혁띠를 풀고 보려는데 내려가지를 않아요. 어떻게 할 방법 없이 그냥 그놈 붙들어 잡고 얼마나 내가 울었는지 몰라요."
■ 강요와 조작으로 이뤄진 조사…지옥에서 만난 '천사'
29일 새벽 보안사로 끌려가서 받은 조사와 고문은 집요했습니다. '5.19일 대동고 시위 배후 조종', '수습위 참석 강경 발언', '도청 앞 시위', '동생 윤한봉 행방'을 묻고 또 물었습니다. 시위에서 누굴 봤느냐, 아는 사람 이름을 대라고 했지만 그런 식으로 관련자를 늘려간다는 걸 안 민청학련 학습효과로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표도 강요했지만 거부했습니다. 결국 사표는 군 수사기관의 협박과 회유를 못 이긴 아내가 냈습니다. 지하 조사실에서 일주일 넘게 버텼지만, 홍남순 변호사가 짜 맞춰진 수사에 인정했더랍니다. '나도 변호사지만 우리가 여기서 뭔 힘이 있는가? 법정에서 싸울 수밖에 없네' 홍남순 변호사의 말이었습니다.
"내가 이걸(진술 조서) 어떻게 써야 하나 생각하다가 기상천외한 생각을 했어요. 토씨 하나도 안 틀리고 그대로 그것(홍남순 변호사 조서)을 베껴버렸어요. 주어만 홍 변호사에서 나로 쓰고 그대로 썼어요. 수사관이 요령을 부린지 알았어요. 또 종이 주고 또 쓰고, 내가 똑같이 세 번을 써버렸거든요."
'강요, 조작'이라는 흔적을 남기려는 고육지책이었습니다. 검찰로 넘어가서는 이 조서마저 부인했습니다. 윤 선생은 그때 만난 부장 검사를 '지옥에서 만난 천사'라 표현했습니다. 황석영과 경복고등학교 동기 동창이라는 그 검사가(성이 박 씨이고, 지금은 강릉에서 변호사를 하는 것으로 윤광장 선생은 알고 있었습니다) 면도도 하게 해주고, 커피와 담배도 권하며 긴장을 풀어준 얘기를 들려줬습니다. 조서를 부인하면 다시 보안수사대 지하실로 끌려가야 해서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는 처지에 못 쓰겠다며 부장 검사에 조서를 맡겨버렸다는 겁니다. 졸지에 피고인의 진술조서를 쓰게 된 당시의 부장검사는 세 번을 썼다 찢었다를 반복한 끝에 조서를 내밀었습니다. 윤 선생이 보기에 그야말로 '이현령비현령'이더랍니다. 그리고 도장을 찍었습니다.
■다시 교육현장으로…"우리 집안은 '간대폐소', 겁이 없어요."
감옥살이를 마치고(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으로 1980년 10월 24일 석방) 윤광장 선생은 어렵사리 1983년 교단에 복귀합니다. 그리고 다시 1986년 5.10 교육민주화 선언과 전교협 결성에 참여합니다. 1987년 9월 6일, 전국에서 처음으로 '민주교육 추진 광주전남 교사협의회'의 닻을 올립니다. 전교조의 전신입니다. 윤광장 선생이 회장으로 추대됐습니다. 1989년 전교협이 전교조로 전환되고, 윤광장 선생은 두 번째 해직을 당합니다. 날짜를 또렷하게 기억했습니다. 1989년 8월 2일 입니다. 5.18로 갖은 고초를 겪고 나서 교육운동은 외면하고 싶지 않았는지 물었습니다.
"저희 형제들이 DNA가 그런가는 몰라도 겁이 없어요. 우리 집안은 '간대폐소' 그러거든요. 어떻게 보면 진짜 간덩어리가 커진 것 같아요. (감방) 갔다가 나와서 민주운동이랄지 사회운동 이쪽은 들여다보지도 않고 살 그런 생각들을 주변에서 하는데, 나는 그게 아니었어요."
■"민주시민 교육이 중요…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노력해야!"
교단에 섰을 때, 학생들도 그렇고 주변에서도 그렇고 오월정신이 뭐냐는 질문이 많았다고 했습니다. 선생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첫째, 오월정신은 불의에 대한 저항정신이다. 둘째, 배려 정신이다. 세 번째는 나눔의 정신이다. 넷째, 참여 정신이다. 배려의 정신과 나눔의 정신 두 개를 합쳐서는 공동체 정신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적게는 3개, 많게는 4개로 얘기할 수 있다."
얘기는 자연스레, 최근의 오월단체 잡음으로 이어졌습니다. 선생은 해법으로 적극적인 참여를 얘기했습니다. 논의 사항이 생기면 결정된 뒤에 문제제기를 하지 말고, 꼭 참여해서 같이 토론하고 또 의견도 나누고 잘못된 거 있으면 지적도 하고 하자는 겁니다. 그러면서 가장 중요한 건, 민주시민 교육이라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말씀'에 대한 대답입니다.
"이제 교육밖에 없다. 입시 위주의 교육이 되다 보니 민주시민 교육을 할 수 있는 공간 확보가 안 된다. … 우리나라가 교육이 바로 서야 사회가 바로 서고 민주주의가 바로 설 텐데, 그것이 안 되고 있어서 안타깝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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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호 기자 (menbal@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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